만끽!2023. 9. 15. 22:24

영화 <바빌론>을 봤다.
 
보다가 자연스럽게 <원스어폰어타임인 할리우드>가 떠올랐다. 만약 쿠엔틴 타란티노가 먼저 사용하지 않았다면, 데이미언 셔젤은 그 제목을 고려하지 않았을까? 두 영화는 닮은 점이 많다. <원스어폰어타임 인 할리우드>에서 주요 배역으로 출연했던 브래드피트와 마고 로비가 <바빌론>에서도 주연으로 나온다. 두 영화 모두 영화 산업의 메카인 헐리우드를 배경으로 삼고 있고, 화려한 영화 산업의 이면을 보여준다. 성공을 향한 치열한 생존 본능과 흥망성쇠나 희로애락을 담고 있다. 무엇보다도 두 영화 모두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헌사를 주제로 하고 있다. 그리고 또 하나. 그러하기 때문에 영화가 담고 있는 시대의 배경에 대한 일종의 선행학습은 영화를 깊이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배경 지식 없이 보았다간 재미를 느끼기는 커녕 당황스럽고 당혹스러울 게 틀림 없다.
 
물론 두 영화는 서로 다른 영화다. <원스어폰어타임 인 할리우드>가 헐리우드 영화 산업이 공고했던 1960년대 말을 그리고 있다면, <바빌론>은 헐리우드 영화 산업의 태동기인 1920년대 말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원스어폰어타임 인 할리우드>보다도 <바빌론>은 좀 더 노골적으로 영화 산업의 뒤안을 파고든다. 영화를 사랑하고 영화가 주는 환상에 꿈을 꿔 왔던 사람들에게 그것은 필시 '불편한 진실'이다. 영화 속 우상들이 사실은 밤마다 퇴폐와 향락에 빠져 지내는 개차반들일 뿐이었고, 그렇게도 매력적이었던 영화가 실상을 알고 보니 별 체계도 없이 마구잡이로 찍어내는 것에 지나지 않았으며, 돈벌이를 향한 무자비한 공장 시스템 속에서 스태프나 보조연기자들은 기본적인 안전 개념조차 없이 소모품처럼 쓰이다 버려지고 있었다는 진실 말이다.
 
<바빌론>은 그렇게 추악한 진실을 알게 되고도 영화를 사랑할 수 있겠느냐고 묻는 영화라고..., 많은 평론가들이 알려주었다. 그러함에도, 그 모든 것을 다 알게 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영화를 사랑할 수밖에 없노라 애틋하게 말하는 영화라고...., 역시 평론가들에게 주워 들었다. <바빌론>에 대한 평론들은 간지러울만큼 칭찬 일색이었는데, 야박했던 대중들의 평가와 평론가들의 감상이 크게 엇갈린 것은 영화와 영화사와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애정과 관심과 지식의 차이만큼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아는만큼 보인다, 뭐 그런 얘기일텐데. 영화를 소비의 대상으로 여기는 일반 대중에게 불친절한 것은 분명하다.
 
이 영화에서 대놓고 영화에 대해 찬사를 늘어놓는 장면은 곳곳에 포진해 있다. 대표적으론 잭 콘래드가 브로드웨이 배우 출신인 자신의 부인과 언쟁을 하는 장면. 너무 노골적이어서 순간적으로 계몽영화 보는 줄 알았다. ㅋ 넬리 라로이가 재기를 위해 교양인들의 파티에 참석했던 에피소드도 내겐 그렇게 보였는데, 그 시절 영화인들이 교양없고 추잡해 보일지언정 순수하고 솔직하지 않았느냐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교양을 내세우면서 사실은 위선적이고 속물적이며 구역질 나는(!) 누군가보다 낫지 않았느냐고 강변하는 것처럼 보였다.
 
프레임 너머의 진실이 프레임 위에서 보여지는 것과 같지 않은 것은 방송도 영화와 같아서, 나는 또한 <바빌론>의 이야기를 자연스레 방송 산업에 대입해서 보게 되었다. 방송도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브라운관이 쏟아내는 이미지를 소비하고 더러는 그것을 맹신하기까지 하게 되지만, 브라운관 뒷모습은 대중이 소비하는 이미지와 아주 큰 격차가 나기 때문이다. 브라운관의 스타는 사실 그렇게 훌륭한 인격체가 아닌 경우가 흔히 있고, 방송 업계의 비정규직 시스템은 여타 산업들과 견주어 보아도 많이 낙후돼 있다. 사극 제작 과정에서 제작 기법의 하나로 퇴역경주마가 희생되는 일이 당연하지 않아진 것처럼, 이제는 프레임 안과 밖의 격차를 줄이라는 대중의 요구가 방송에도 쏟아지고 있다. 방송산업의 황금기에 그 준비를 미처 하지 못했던 우리는 N중고의 위기를 맞이할 수밖에 없게 된 셈이다.
 
<바빌론>에서 배경이 되는 1920년대 말은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영화 산업의 축이 크게 바뀌는 때이다. 영화에 소리가 하나 추가되었을 뿐인데, 모든 것이 바뀌었다. 영화를 제작하는 시스템도 더 이상 주먹구구식일 수 없게 되었고, 아무 말이나 지껄여도 됐던 배우들은 이제 대본을 완벽히 외우고 숙지해서 오차 없는 연기를 요구받았다. 더욱이 대중의 의식 수준은 영화에 "도덕성"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결국 무성영화의 스타들은 바뀐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새 시스템에 더 이상 맞지 않아 도태되어 사라져 버리곤 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의 변화보다 더 급격한 환경 변화 속에 있다. 콘텐츠의 전달 수단이, 소비 플랫폼이 바뀐 것에도 좀처럼 적응을 못하고 있는데, GPT로 대변되는 생성AI가 이제 어지간한 콘텐츠 제작을 넘보는 걸 걱정해야 하는 상황까지 마주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미디어는 이렇게 바뀌어 가는 환경에 적응하고 진화해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일까. 아니면 무성영화의 스타들처럼 쓰임이 다 되었음을 인정하고 쓸쓸히 퇴장하는 것이 온당한 것일까. <바빌론>을 보며 어지러이 혼미했던 것이, 비단 환락과 광란의 파티 장면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Posted by the12th
만끽!2023. 9. 15. 22:21

영화 <헤어질 결심>을 보았다.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 휘청이며 영화관을 나서는데, 앞서 가던 젊은 커플의 대화가 들려왔다. 여성 관객 왈, "나 깜빡 졸았잖아". 졸 정도였다고?? 그렇다. 이건 젊은이들은 쉬이 이해하거나 납득하기 어려운, 중년의 중년을 위한 중년에 의한 로맨스 영화다. 애들은 가라. 이 영화도 우리 꺼다.
 
사랑은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감정이다. 표출하고 드러내는 것이 부끄러울 일이기는커녕, 아름다울 일이다. 하지만 사회적 제도나 규범, 윤리, 이미 맺어진 누군가와의 약속과 신뢰, 다른 이들의 시선 등등의 조건이 따라붙으면 그렇지 않다. 무릇 중년에게 '새로운 사랑'이란 그래서 대체로 추하고 더러운 욕정으로 평가받곤 한다. 쉽게 말해 불륜이고.
 
그렇기 때문에 '사랑할 결심'같은 건 필요치 않다. 부지불식간에 불쑥 불쑥 올라오는 어떤 자연스러운 감정을 무던히 다스리고 내치고 억누르는 노력만이 필요할 뿐이다. 그걸 미처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고 말았을 때 필요한 게 아마도 '헤어질 결심' 같은 거겠지.
 
박해일은 원래도 믿고보는 배우이지만, 이 영화 이후로 그 믿음은 신봉에 가까워질 것 같다. 서래가 외국인인데다 대상화되어 있는 까닭에 신비롭고 아련한 매력을 주는 데는 부족함이 없지만, 그러하기에 영화는 전적으로 해준의 역동적인 퍼포먼스에 의존하게 된다. 박해일은 그간 수많은 작품들을 통해 누적해 온 순수함, 자상함, 품위, 똘끼, 유머러스함, 개구짖음, 그리고 애틋함을 이 영화에서 아주 있는 힘껏, 그리고 맘껏 쏟아낸다. 서래가 그를 사랑하게 되는 게 충분히 납득될 만큼이다.
 
해준의 아내 정안은 이과적으로 사고하며 과학을 신봉하는 사람답게 "완전히 안전"하다는 믿음 속에 원전에서 일 하는 연구자다. 남편에 대한 그녀의 믿음도 다분히 이과적이다. 논리와 이치를 앞세우지만, 사람의 감정이 어찌 단단하고 치밀한 논리나 이치대로 움직일 것인가. 그녀가 "완전히 안전"하다고 믿는 원전도, 어지간한 파도야 감당하겠으나 그 파도가 지진해일과 같은 수준으로 덮치면 결코 안전할 수 없는 법이듯이.
 
서래를 탕웨이가 맡은 것은 어쩌면 필연이다. 탕웨이는 <색, 계>에서 목적을 위해 전략적 접근을 하다 상대와 찐사랑에 빠지는 레지스탕스 역을 했었고, <만추>에서는 남편을 죽인 죄로 복역하다 가출소 중 만난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 애나 역을 잘 소화한 바 있다. 서래는 그 캐릭터들의 연장선상에 있다. 탕웨이를 빼고 서래 역을 맡을 배우를 쉽게 연상하기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녀가 의사 소통이 좀 어려운 외국인이라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사랑은 소통이 어려운 관계 맺음이다. 같이 쓰는 언어를 노골적으로 해도 발화의 의도가 온전히 전달되기 어려운 법인데, 언어가 다르고 서툰 관계에서의 소통은 더 말할 여지가 없다. 모호하고 막연하고 심지어는 생경한 문어체(혹은 AI 번역체)를 통해야 하는 소통 과정에서 두 사람은 역설적으로 행간의 의미에 더욱 집중하고 훨씬 섬세한 관계를 직조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이 영화가 관객과 소통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원래 영화의 메시지 전달이라는 게 텍스트 마냥 직설적으로 전하는 방식이 아니긴 하지만, 이 영화는 한층 더 그러하다. 관객과 밀당을 하기라도 하려는 듯 한껏 모호하고 은근하다. 관객이 밀어내려는 타이밍엔 기가 막히게 유머나, 수사물의 긴박감을 던져 넣어 주의를 환기시키고 몰입케 한다. 그리고 엔딩에 이르러서는, 관객 스스로 팽팽한 밀고 당기기의 게임을 포기하고 말게 만든다. 이거 아주, 선수다 선수.
 
폭풍같은 엔딩 뒤의 여운이 영화관을 나온 뒤 물에 잉크가 번지 듯 서서히 물드는 것 같더라니, 며칠만에 집채만한 파도가 되어 마음을 덮치고 있다. 자꾸 미결된 결말이 생각나고, 밤 늦게까지 이 영화 관련 유튜브 영상을 보고, 감독의 인터뷰 기사를 찾아 보는가 하면, 정훈희의 '안개'를 들으며 흥얼거린다. 처음엔 쉽게 이겨낼 수 있으리라 여겼었는데, 그만 나도 모르는 새 붕괴되고 말았다. 박찬욱 그가 원하던 대로, 마침내.
Posted by the12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