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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07.16 [음반] 듣는만큼 중독된다
만끽!2014. 7. 16. 17:38













 중독 되고자 한다면, 그에 걸맞는 피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아무 노력의 경주 없이 중독의 댓가를 바라는 건 몰염치한 짓이다. 애저녁에 내가 뭐랬나. 카사비안의 노래는 첫인상만으로 쉬이 판단내리고 말 밴드가 아니라고 하지 않았나. 


 고백하노니, 내가 그랬다. 4집 <Velociraptor>는 전혀 인상적이지 않았다. 노래들은 평이했고 공감되지 않았다. Day are Forgotten이 섹시한 멜로디라인을 보여줬지만, 그저 그 뿐이었을 뿐 더 나아가지 못했다. 아, 이제 이 젊고 색다르고 재기넘치던 밴드도 정규앨범 네 장 째쯤 뽑아 내게 되니 슬슬 밑천의 바닥을 드러내는구나, 라고 여기게 됐다. 


 5집 <48:13>이 발매되자마자 구매한 것은, 2014 펜타포트 락페스티벌에 카사바인아 헤드라이너로 온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서 덩달아 신규앨범 발매 사실을 인지하게 됐기 때문일 뿐이었다. 펜타에 가서 방방 뛰며 Club Foot나 Shoot the Runner, Fire 등을 들을 생각에 마음이 다 설레였었지만, 척박한 주말 근무 여건은 그나마의 향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아쉬운대로 이 희한한 듯 무심한 듯 또는 성의없는 듯 작명된 앨범이나 한 번 들어볼 뿐이었다. 


 첫 인상은 4집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타이틀곡인 Bumblebeee는 무료했고, 싱글 컷으로 나온 Eez-eh는 발랄하긴 했으나 앨범을 이끌고 나가기에는 중량감이 떨어졌다. 나머지 곡들도 귀에 잘 안꽂히기는 매한가지. 가령 3집에서의 Vlad the Impaler나 2집의 Seek & Destroy, 1집의 Cutt Off처럼 내 귀에 친화적인 노래도 잘 안 걸려들었다. 아 역시 카사비안은 끝난 거였어, 라는 판단이 이대로 굳어지는 듯 했다. 


 의외의 조건으로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심사숙고 끝에 여름에 쓸 블루투스 이어셋을 한 개 구입했는데, 이 녀석의 성능을 시험해보기 위해서라도 음악을 자주 듣게 된 거다. 잡다하게 아무거나 듣지 말고 새로 산 앨범이나 꾸준히 들어보지 뭐, 하고는 별 생각없이 <48:13>을 무한 반복으로 돌렸다. 그리고 애써 들으려 하지 않고, 그 순간만큼은 그냥 달팽이관을 카사비안에게 맡겼다. 


 그러자 언젠가부터 새로운 세상에 귀가 띄이기 시작했다. 몇 번을 돌려 듣고 또 들었는지 셀 수도 없었던 어느날, 불현듯, 열 번째 트랙 clouds에 이르러서 부터였다. 형형색색으로 화려하게 치장된 간주가 내 귀를 유혹하기 시작한 것이다. 곡 전체가 무슨 기승전결이 딱 떨어지는 곡이 아니지만, "We rise above the clouds, We rise above the clouds~" 뒤 나오는 폭발적인 일렉트로닉 사운드는 마치 듣는이로 하여금 스스로 구름 위를 넘나드는 것만 같은 엑스타시를 한껏 선사한다. 그 황홀경의 순간엔 귀가 이 곡이 만든 세계로 온통 뒤덮여 있어야 온전히 빠져들 수 있게 되는데, 그 세계에 한 발이라도 더 깊숙이 들어서기 위해선 나도 모르게 이어폰 폼팁으로 차음하고 볼륨을 올릴 수밖에 없게 된다. 


 5집에 대한 내 감탄은 이곡에서부터 시작됐다. 앨범에 대한 내 귀의 어떤 봉인이 해제된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알았다. 내가 4집에 충분한 시간과 노력을 들이지 않았음을. 따지고 보면 Days are Forgotten과 친해진 것 역시, 앨범을 통해서라기 보다는 카시야스가 등장했던 국내 모 자동차 광고 BGM을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접했기 때문이었음도.


 clouds의 놀라운 경험을 하고 나자 바로 이어지는 Eez-eh도 평범하게 들리지 않았다. 가사를 보니 그냥 발랄한 게 아니라, 발칙한 힘이 있었다. 연이어 Bow의 멜로디도 쏙쏙 들어오고, S.P.S.도 Happiness와 같은 앨범을 닫는 서정적 트랙으로 손색이 없어 보였다. 후반부의 노래들과 함께 다시 한 바퀴 돌아 만나게 된, 앞에 펼쳐져 있던 Stevie와 doomsday, Treat, Explodes는 이제 나도 모르게 자연스레 흥얼거리는 트랙들이다. 아는만큼 보이듯, 카사비안은 역시나 아무래도, 듣는만큼 중독되는 법이다.


 앨범 전반은 일렉트로닉과 댄서블한 기조가 더 강해진 느낌이다. 나를 이 앨범에 반하게 한 clouds가 대표적이다. 몽환적이고 대단히 현혹적인데, 약 빨고 흔들어대는 느낌을 선사해준다. 다른 곡들도 가볍게 몸을 까딱일 수 있게 만드는만큼의 리듬감을 한껏 뽐낸다. 


 다시금 카사비안에 빠져 지내게 되면서, 옛날 노래까지 다시 들어봤다. 이번 앨범에서 clouds가 내게 했던 역할을 1집에서 했던 곡이 Cutt Off였는데 다시 들어봐도, 이 곡은 정말 일품이다. 다섯번 째 정규앨범까지 온 상황에서 과거와 견주어보면, 신나고 흐느적거리기 좋은 노래들이 주류를 이루면서, 1집에서 보였던 그 음습한 물이 지속적으로 쪽쪽 빠지게 된 것은 많이 아쉽다. 초기 멤버였던 크리스토퍼 카를로프의 음악적 성향이 그의 탈퇴로 탈색된 까닭이겠으나, 그 매력에 중독되는 바람에 지금까지 카사비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팬의 입장에선 애인의 사라진 매력이 너무 아쉽고 안타깝다.


the best track : clouds


calvin.

Posted by the12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