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5'에 해당되는 글 15건

  1. 2018.05.30 [TV] 상처와 이해
  2. 2018.05.27 [애니] (여러모로) 아빠를 위한 만화
  3. 2018.05.27 [애니] 거장의 유작
만끽!2018. 5. 30. 19:23


뒤늦게 tvN 드라마 <나의 아저씨>를 마저 봐 치웠다.


- 사실 런칭할 때, 마침 당시 미투 운동과 맞물려, 이 드라마가 20대 젊은 여성과의 연애를 꿈꾸는 40대 개저씨들의 로망을 대리실현해준다는 세간의 비난 때문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제목부터 해서, 그렇게 보일 여지가 다분했다. 그런데 앞서 이 드라마를 봐 오던 누나가 "그거 그런 얘기 아냐"라며 도리어 칭찬을 하기에, 비난과 칭찬 사이의 간극을 확인해 보고 싶어져 보기 시작했다.


- 드라마에서 20대 여성 이지안이 40대 남자부장 박동훈을 좋아하는 마음을 숨기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그 좋아한다는 마음이 이성으로서 좋아한다는 건지, 사람으로서 좋아한다는 건지, 혹은 어른으로서 좋아한다는 건지가 불분명하다. 아니, 무게중심은 분명 뒤쪽에 더 실려 있다. 유감스럽게도, 이걸 '로맨스 드라마'로 두고 불편하게 바라보는 시도는 무리수다.


- 드라마를 관통하는 주제는 '세대 간의 공감과 위로'다. 풍요의 시대에 청년기를 보내고 대기업 정규직에 안착했지만 결코 행복한 삶을 살고 있지 못하는 40대 중년과, 그 짧은 풍요조차 겪어 보지 못한 채 불행과 불안을 반복하고 있는 20대 청년 사이의 공감대를 넓히는 이야기로 읽는 편이 도리어 자연스럽다.


- 동훈과 형제들은 순탄히 대학을 졸업해 취업했지만, 이내 자영업 실패로 이혼위기에 몰리거나 영화감독의 꿈을 쫓다 만년 백수가 되거나, 혹은 착하고 평범하게 살아왔지만 도리어 불행한 삶을 살고 있다. 그들은 특기 하나 없어 노상 술이나 마시고 수다나 떠는, 더럽게 따분한 40대 남성들을 대변한다. 반면 가장 찬란해야 할 시기를 보내는 지안은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을만큼, 인생이 힘겹다. 불안하고 불행하고 불투명한 현실에, 그렇다고 앞날이 더 나아질 것 같다는 희망도 없는 어둠 속의 20대 청춘을 대표한다.


- 불안한 현실과 불투명한 미래의 절망 속에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살고 있는 청년들에게, 기성세대는 자신을 짓누르는 기득권에 불과했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고 더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이용하고 착취하고 군림하는 자들이었다. 좋은 어른으로서의 기성세대는 없었다. 지안에게 동훈과 후계동의 중년들은, 비로소 처음 만난 '어른'이다. 훈계 대신 공감을 하고, 설교 대신 위로를 해 주는, 나아가 꼰대질 대신 기꺼이 연대를 할 수 있는 진짜 어른 말이다.


- 동훈이 자신을 이해해 주자, 지안은 동훈을 돕는다. 지안이 기를 쓰고 동훈을 돕는 것은, 동훈 개인에 대한 호감 때문만은 아니다. 나쁜 기성세대들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좋은 어른'이 불행 속에 좌절하지 않고 성공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은, 자신이 앞으로 살아갈 좋은 미래를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 세대간의 소통, 공감, 위로가 시대의 코드가 되어가고 있다. 촛불혁명으로 젊은세대는 자신들의 목소리와 요구를 더욱 가감없이 드러내기 시작했다. 착한 어른들은 그걸 응원하고 뒷받침한다. 이제서야 서로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됐다. <나의 아저씨>는 그런 바뀐 세상에 대한 메타포와 같은 이야기가 아니었나 싶었다. 

calvin.





Posted by the12th
만끽!2018. 5. 27. 22:01


누군가 <레디 플레이어 원>의 원형이 <주먹왕 랄프>에 있다고 그래서, 애니메이션 <주먹왕 랄프>를 봤다. 그러고 보니 일전에 취향저격이 될거라며 일찌기 추천받았던 애니메이션이었다.


- <레디 플레이어 원>이 주인공이 게임 속으로 들어가서 벌어지는 이야기라면, <주먹왕 랄프>는 게임 속 주인공들의 이야기다. 특히 오락실에서 즐겼던 추억의 아케이드 게임들을 그대로 접목해, 어렸을 때 오락실 죽돌이들이었다면 마치 <레디 플레이어 원>을 보며 팝컬쳐 아이콘들을 찾던 재미를 여기서도 느껴볼 수 있겠다.


- 게임 속 세상을 대단한 상상력으로 잘 구현해 놨다. 코드라든지, 오류라든지, 버그(사이버그!) 등의 게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기술적 개념들도 아주 훌륭하게 잘 이야기 속에 버무려놨다.


- 오락실 게임에서 건물 깨부수는 악당 역할을 하는 랄프가, 왜 자기는 영웅이 돼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수 없냐며 불만과 의문을 품는 것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슈렉>처럼 안티히어로의 서사인데다, 프로그래밍 된 본인의 '운명'을 거스르고자 하는 메시지까지 내포돼 있어, 오락실을 잘 드나들지 않아 옛날 게임을 즐기지 못했음에도 상당히 내 취향이다.


- 프리퀄의 방식으로 사고해 보면, 더 생각할 여지가 있다. 원래 세가에서 만든 이 게임의 프롤로그에서 랄프는 그저 평화롭게 나무 그루터기에서 살던 야생의 존재였는데, 어느날 아파트 개발에 삶의 터전을 잃고 똥무더기에서 살게 되면서 분을 이기지 못하고 아파트를 깨부수는 악당이 되었다. 악당은 원래 악당인가, 그 악당을 만든 배경은 무엇인가, 선악의 구분은 누가 어떤 기준으로 정하는가, 뭐 이런 피곤한 생각까지, 하려면 할 수도 있겠다.


- 그보다, 꼬마아이 바넬로피와 랄프의 교감 과정이 특히 내 마음을 건드렸다. '미운 7살'을 제대로 선언한 딸 아이가, 부쩍 훈육을 거부하는 사례가 늘어 갈등이 격해지던 중인데, 요즘엔 애가 다칠까봐 지적하는 문제들에 대해서도 따르지 않고 미운짓을 해대는 통에 결국 고함치며 화도 몇번 냈었다. 애니메이션에서 (킹 캔디의 농간에 속아넘어간 것이긴 해도) 바넬로피를 걱정하고 생각해 그녀의 차를 부수는 랄프와 거기에 상처를 받는 바넬로피를 보면서, 목적이 아이를 위한 것이라 하여 방법까지 수용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나의 훈육에 아이를 끼워맞추려 하기 보다, 훈육 방법을 바꿀 것을 생각해 봐야겠다.


- 조만간 <주먹왕 랄프> 2가 나올 모양인데, 기다려진다. 딸 아이랑 같이 사이좋게 볼 수 있으면 더 좋겠다.


ca;lvin.

Posted by the12th
만끽!2018. 5. 27. 21:59



다카하타 이사오 선생을 추모하며, 그의 유작 <가구야 공주 이야기>를 봤다.


- 원작이라 하기도 뭣하지만, 이 애니메이션은 일본의 가장 오래된 구전 민담을 애니메이션화 한 것이라고 한다. 물론 큰 줄거리를 가져왔다는 것이고, 디테일한 이야기 전개는 감독의 역량이 채웠다.


- <가구야공주 이야기>에는 여성, 생태, 생명 존중, 본질적 행복 추구, 기성 체제에 대한 저항 등 다카하타 이사오 선생이 평생 작품 속에 녹여왔던 주제들이 모두 담겨 있다. 일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고 친숙한 이 고전에 자신의 (다소 과격한) 작품 철학을 절묘하게 접목시킨 지점이 놀라웠다.


- 작화의 완성도에 대한 고집스러움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추억은 방울방울>에서 실사를 방불케 하는 디테일한 그림에 홀딱 반했던 기억이 있는데, 현대적 (미야자키 식)그림체를 버린 이후에는 그야말로 득도의 경지에 올랐다. <이웃집 야마다군>도 그랬지만, 여백을 한껏 강조해 단조로우면서도 그러나 있을 거 다 있는 이 애니메이션의 그림체에서도 그 특유의 장인 정신이 묻어난다. 특히 가구야 공주가 연회장을 박차고 산으로 뛰쳐 나가는 장면은 정말 기가 막힌다. 제작기간이며 막대한 제작비가 다 수긍이 간다.


- 산중의 노부부가 어린 딸을 얻게 돼 애지중지 키운다는 이야기는 다카하타 이사오의 대표작이자 초기 연출작인 <빨간머리 앤>을 연상시켜 느낌이 찡했다. 딸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는 특히 이 이야기가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진정한 행복은 세속적인 데에 있는게 아니라는 가르침, 삶 그 자체의 가치에 대한 깊은 통찰은 양육자에게 짙은 울림을 준다. 괜히 거장이 아니다.


- 이 정도의 작품을 유작으로 남겼으니, 다카하타 선생은 분명 열반하였을 것이다. 다시 한 번 고인의 명복을 빈다.


calvin.

Posted by the12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