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금니 충치가 더 이상 방치하기 힘들 정도여서, 결국 가기 싫어하는 치과엘 가게 됐다. 어떻게 잘 좀 예쁘게 때워달라고 말했더니, 의사 선생이 이건 사랑니란다. 때우지 말고 그냥 확 뽑아 버려야 한단다.
사랑니 난 기억도 없는데 사랑니라니라니라니.... 누나를 비롯해 주변 사람들이 사랑니 날 때마다 고생하는 걸 지켜보고, 끝내 치과에서 생니를 뽑아 볼이 퉁퉁 부은 것을 볼 때마다 아직 사랑니가 나지 않았음에 감사하고 또 앞으로 나게 될 것에 두려워 했더랬는데, 소리소문도 없이 사랑니가 나버렸다는 거다. 그것도 위아래 네 군데 죄다. 가지런한 모양새로, 마치 지가 어금니인 것처럼 감쪽같이 위장을 하고 말이다. 아유, 앙큼한 것들 같으니.
“거 참 신기한 일이네... 아니 이게 언제 난 건데요?” 혀끝으로 새삼 재발견한 사랑니들을 훑어가며 질문을 던지자 의사는 어깨를 한번 으쓱 한다. 하기사, 이 주인인 나도 몰랐는데 처음 본 이 양반이 알 턱이 있겠나. 사랑니라면 아직 나지 않은 것까지 잇몸을 째서라도 모조리 뽑고 싶어하는 게 치과 의사들이라지만, 별 소란 없이 우뚝 나서 생니 모양을 하고 있는 이놈들을 어쩌지는 못할테다. “뭐 다 뽑을 필요는 없는거죠?” 부러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묻자, 의사 선생은 아주 나직이 ‘끄응’ 앓는 소리를 내고는 “그래도 그냥 두면 썩을 수 있으니까 가급적이면 뽑는 게 좋죠”라며 불끈대는 본능을 숨기지 않는다. 엇... 경계 태세 강화.
충치가 절반 이상을 파먹어 들어갔다는 왼쪽 아래 사랑니 녀석은 아무래도 뽑는 게 좋겠지만, 이 녀석은 다른 사랑니들과는 달리 어금니 기능을 하고 있기도 하다. 악관절 장애 탓에 위치가 이미 어금니 위치인 까닭이다. 이걸 뽑아버리면, 아무래도 어금니 하나 뽑은 거나 매한가지의 상황일 것인데, 다음에 병원 갈 때 정말 때워줄 수는 없는 거냐고 다시 한 번 물어봐야겠다.
사랑니가 고통 없이 나 준 것은 분명 고마운 일인데, 뭔가 좀 허전하기도 하다. 남들 대부분이 겪는 사랑니 통증이라는 게 내게는 없는 것이라니 말이다. 대개 사랑에 빠지는 나이에 나는 거라 해서 사랑니라고 부른다고도 하고, 통증이 사랑의 고통과 비견할 만 하다 해서 사랑니라고 부른다고도 하고, 뭐 그래서 사랑니로 아프고 나면 철이 들었다고 한다는데, 그에 따르면 난 아직 사랑다운 사랑도 해 보지 못했다는 말이고 또 아직 철도 채 들지 않았다는 얘기일테니 말이다. 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닌 게 아니라 정말 그런 거 같네.
아프지 않고선 철이 들지 않는다는 얘기. 사랑니로 아팠다면 그걸로 때울 수 있었을 텐데, 내겐 그 과정이 없었으니 철이 들자면 다른 통증이 필요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역시나, 좀 더 아파야 하려나? 세상엔 확실히 공짜가 없다.
calv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