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를 매우 잘 하지도, 운동을 잘 하지도, 노래를 잘 부르거나 춤을 잘 추지도, 잘 생기지도, 그렇다고 애들을 잘 웃기지도 못했던 내가 학교에서 친구를 사귈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학기 초 어느날 쉬는 시간에 조용히 연습장을 펴고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애들이 등 뒤에 모여들며 말을 붙였다. 그림이 마음에 들면 달라는 애들도 있었고, 자기가 원하는 그림을 그려달라는 요청도 받았다. 학기 말 방학이 되기 전 발행되는 학교신문의 네컷 만화는 공모하는 족족 내 차지였다.
강호에는 원래 고수가 많은 법이어서, 학년이 바뀔 때마다 그림 깨나 그리는 애들은 새로운 반에 등장하는 경쟁자를 의식하게 된다. 그냥 서로 각자의 스타일이 다르고 잘 그리는 게 다를 뿐인데도 아이들은 누구 그림이 더 죽인다는 둥 누구 그림은 어째서 별로라는 둥 품평을 했고, 당사자들은 내색은 안 했지만 그런 평가에 적잖은 내상을 입곤 했다. 그래서 의도치 않게 라이벌리로 묶였던 애들하고는 묘한 긴장관계가 생기면서 결국 썩 친해지지는 못했었다.
그런 소년시절을 보냈으니, <룩백>의 시놉시스를 보고 안 보고 지나칠 수가 있었겠나. 학교 신문에 네컷 만화를 연재하던 주인공, 만화로 인정욕구를 가득 충족해 왔지만, 어느날 학교 신문에 기가막힌 수준의 풍경화를 그린 히키코모리 경쟁자의 존재를 확인, 노오오오오오력을 통해 더 잘 그리려 해 보지만 그것은 노력이 아닌 재능의 영역임을 확인하고 좌절,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자신에게 열등감을 안겨줬던 경쟁자가 오히려 자기 만화의 왕팬이라는 사실을 고백하자 무너졌던 자존감이 일시에 회복되고 두 소녀는 둘도 없는 절친이 된다... 뭐 이 정도가 이 작품의 시놉시스다. 학창시절 그림 좀 그려봤던 애들에게는 아마 적잖이 있었을 그런 에피소드들이다.
이야기는 두 소녀가 따로 또 같이, 성장하는 이야기로 이어진다. 그러다가 세상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던 한 사건을 모티브로 한 충격적인 사건이 절정을 이루고, 충격에 놀랐을 사람들의 마음을 만화만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위로하고 보듬는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므로 후반부 얘기는 여기까지만.
이 애니메이션은 우리나라에선 <체인소 맨>으로 유명한 후지모토 타츠키의 자전적 단편만화를 영상화한 것이다. 처음엔 그림쟁이들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작품에서 두 소녀를 통해 만화라는 매체가 그림실력과 이야기 구성 능력으로 구분된다는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걸 생각해 보면 그림보다는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라고 보는 편이 맞는 것 같다. 만화가 됐든 애니메이션이 됐든 혹은 영화가 됐든 소설이 됐든, 수단이 다를 뿐 모든 이야기를 만드는 창작자들에 대한 헌사라고나 할까.
후지노는 쿄모토에게 "만화를 그리는 일이 하나도 안 즐겁고 귀찮기만 하고" "하루종일 그려도 완성되지 않고" "읽기만 하는 게 낫지 직접 그릴 게 못된다"고 부정적으로 말한다. 그러자 쿄모토가 묻는다. "그럼 넌 왜 만화를 그려?" 후지노의 대답은 끝내 나오지 않았지만, 아마도 분명히 자기가 만든 이야기를 보며 즐거워하고 감동을 받고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 아니겠나. 후지노에게 처음의 쿄모토가 그랬듯이.
제목인 <룩백>에는 다중적 의미가 내포돼 있다. 쿄모토가 친구가 된 후지노의 뒤를 따라 세상 밖으로 나설 때의 시선이기도 하고, 후지노가 회한 속에 과거를 되돌리고 싶어하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기도 하며, 쿄모토가 마지막에 그린 네컷 만화에서 유머러스하게 친 대사이기도 하지만, 실은 만화가-창작자들이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그 뒷모슴을 의미한 것이다. 한 시간이 채 되지 않는 러닝타임 내내 그 뒷모습을 반복했던 것까지 포함해, 작가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위해 고단함 속에서도 묵묵히 제 자리에서 만화를 그리는 창작자들의 뒷 모습을, 좀 봐달라고 말 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그러니, 세상 모든 창작자들에게 경의를 보낸다. 나도 만화 그리고 싶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