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끽!2025. 5. 24. 23:58

 

<아노라>에서 션 베이커 감독의 앞선 대표작인 <플로리다 프로젝트>를 연상하게 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사실 베이커 감독은 적지 않은 작품 속에서 미국내 소외되고 취약한 계층들의 이야기에 카메라를 깊숙이 들이미는 연출을 일관성 있게 해 왔는데, <아노라>역시 그 작품세계의 연속선상에 있는 영화이고 그래서 그의 전작들에서 기시감이 느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일 수밖에 없다.

 

특히 <플로리다 프로젝트>와는 이란성 쌍둥이처럼 보일만큼 흡사하다.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10번 가까이 볼 만큼 내겐 '인생영화'의 범주에 들어가는 명작인데, <아노라>의 아노라(혹은 애니)는 마치 무니의 성인 버전을 보는 것 같은 감정을 전해준다. 척박하다 못해 시궁창같은 환경에 빠져 있지만 그런 조건에 흔들리지 않고 최선을 다해 밝고 명랑하게 삶을 즐기려는 태도, 행복하게 살고자 하는 희망, 그리고 그런 행복을 추구하는 데 있어 단순하고 순박한 성격에서 무니와 아노라는 닮아있다. 

 

아노라는 뉴욕에서 스트리퍼로 생계를 유지하는데 손님이었던 러시아 재벌 2세 이반을 만나게 되면서 새로운 세계를 만난다. 자신에게 홀딱 빠진 이반이 청혼을 하자 어두운 생활을 청산하고 신데렐라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덜컥 결혼식을 올리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이 결혼을 승낙할 리 없는 이반 부모의 힘과 냉혹한 현실 세계를 마주하고 만다. 아노라가 자신이 겨우 안착했다고 믿은 행복을 지키기 위해 홀로 고군분투하는 과정이 이 영화의 주된 내용이 되겠다.

 

영화의 내용은 어찌보면 매우 단순하지만, 감독은 마치 한 편의 소동극으로 이야기를 경쾌하게 풀어나간다. 켄 로치에 버금가는 강한 계급주의적 작품 철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션 베이커 감독이 한층 더 기대되는 지점은 바로 이런 디테일한 연출과 위트 때문이다. 매우 흥미로우면서도 매우 무거우면서도 매우 웃기면서도 매우 슬프면서도 매우 따뜻한 여러가지 모순된 감정들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이 션 베이커 영화의 매력 포인트다. 

 

결혼을 취소처리 하려는 이반 부모의 태도는 자신들이 가진 힘을 조금도 절제할 생각이 없다는 듯 천박하고 무자비하다. 사람에 대한 예의와 배려는 애저녁에 쌈싸먹은 이 사람들은 자신들의 돈 아래 있는 사람들을 도구화하고 물질화 하는데, 그 모습은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체제의 잔혹함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반면 아노라와 러시아 재벌가가 만든 영화 내 계급 체계 가장 말단에 있는 이고르는 가장 품위있는 인간성을 보인다. 이반의 부모는 마치 천한 아노라가 자신들의 재산을 노리고 이반을 꼬신 것처럼 여기지만, 청혼을 한 것은 이반이었고 아노라가 확인하고자 했던 것은 돈이 아니라 오직 그의 진심, 사랑이었다. 일찌감치 육체적인 관계를 '매매'의 대상으로 삼았기에 아노라에게는 자신의 성을 결혼을 목적으로 한 수단으로 삼을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그녀가 마지막까지 희구했던 것은 매우 고답적이게도, 자신에 대한 이반의 마음, 그것 하나였다.

 

영화 말미에 결국 모든 것을 빼앗긴 뒤 그녀는 불현듯 이고르에게 다가간다. 하지만 그건 그를 사랑하게 돼서가 아니다. 그녀에겐 그에게 고마움을 갚을 방법이 그것 뿐이었기 때문일게다. 그러나 이고르가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려는 순간 아노라는 감정이 북받치고 만다. 그녀가 입은 상처는 기실 마음의 상처이고 사랑의 배신이었기 때문에, 채 아물기도 전에 들어오는 이고르의 마음이 외려 상처를 덧냈던 것이었으리라.

 

어떠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늘 웃으며 즐겁고자 했던 무니가 영화의 말미에 울음을 터뜨렸던 것처럼, 아노라도 마지막 순간 꾹꾹 눌러왔던 울음을 터뜨린다. 자신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 꿋꿋하고 억척스럽게 버텨왔던 그녀였던 것을 알기에, 그녀가 무너진 그 순간에 관객의 마음도 같이 무너진다. 그녀의 울음을 목도하자마자 영화가 닫히기 때문에, 갑작스럽게 연민과 애틋함과 슬픈 감정이 마구 소용돌이 치며 긴 여운이 남는다. 그녀의 앞으로의 행복한 삶을 빌게 되면서.

 

이고르는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바비와 같은 존재다. 험난한 투쟁을 하고 있는 연약한 그녀들이 그래도 숨통을 트일 수 있도록 옆에서 묵묵히 관찰하고 위로해주는 사람이다. 그리고 <플로리다 프로젝트> 때도 그랬지만, 이고르는 감독이 관객에게 설정해 준 역할이기도 하다. 이 소외되고 상처받은 이들이 잘 버티며 살아나갈 수 있도록 멀지 않은 거리에서 애정어린 눈빛으로 지켜보고 응원해 주라고. 너무 쉽게 다가가지도 그렇다고 외면하지도 말고 그 정도 거리에서 그 정도 사람다운 역할만 해도, 그들은 이 풍진 세상에서도 꿋꿋이 잘 참고 이겨내며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

Posted by the12th
만끽!2024. 12. 26. 14:29

앞서 안중근 의사의 거사를 소재로 삼은 다른 영화와의 차별화를 위해서도 그랬겠으나, 스크린에 걸리는 영화로서 OTT 창작물들과 차별점을 확보하기 위함인 듯 이 영화는 우선 '비주얼'에서 승부를 보려는 것이 느껴진다. 큰 화면에 그려지는 장대한 로케이션의 풍광이 극의 웅장미와 더불어 꽤 보는 맛을 준다.
 
그런데다 주인공을 맡은 게 현빈이다. 야 안중근 역에 현빈이라니 이건 좀 반칙이 아니냐 했는데, 이게 웬걸, 이동욱도 나오고 정우성도 나온다. 조우진과 박정민까지 준수한 미모를 자랑하는 걸 생각해 보면, 비주얼만으로 단숨에 대한민국 만세가 외쳐진다. 아무것도 안 하고 토끼굴 같은 데서 단체로 담배만 뻐끔뻐끔 피워 대도 독립운동가들을 막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샘솟을 정도다.
 
\비주얼만으로 승부를 봤다고 하면 감독이 억울해 할지 모르겠다. 역사적 사실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허구의 캐릭터들을 적절히 집어넣어 극의 긴장도를 유지하는 한편, 단순히 안중근 의사의 거사를 재현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전체 독립운동가들이 보인 헌신의 역사를 상징적으로 담아내기도 한다. 영리한 구성이다.
 
뮤지컬 영화였던 <영웅>이 신파와 다소 어설픈 유머코드로 모두가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을 대중화해 보려는 시도를 했다면, <하얼빈>은 극도로 그런 장치들을 절제한다. 마치 꽝꽝 얼어붙은 두만강처럼, 감정의 소용돌이를 저 아래 묻어둔 채 냉정을 두텁게 유지하며 절정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간다. 관객들에게도 좀처럼 감정의 동요를 꺼낼 틈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함에도 거사가 치러지는 절정의 순간에는 부지불식간에 불쑥 울컥하는 감정이 올라오고 만다. 뛰어난 연출과 연기력 덕분이기도 하겠으나, 그보다도 그건 아마 역사적 사실의 위대함에 기댄 감정이 아니었을까 싶다.
 
처음부터 너무 무겁고 경직된 분위기 때문이었는지 중반까지는 연기들이 좀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영웅>이 뮤지컬 보는 느낌이었다면 <하얼빈>은 연극을 보는 느낌이 컸다. 그러나 중반 이후에는 극에 몰입할 수 있었기 때문인지 몰라도 배우들의 연기에 자연스럽게 수긍할 수 있었다. 특히 고뇌하고 번뇌하는 안중근 의사를 연기한 현빈이 반짝였다. 결혼 뒤 연기 커리어의 변화를 모색해야 했을 그에게 이번 안중근 의사 역할은 뚜렷한 분기점이 될 거라 생각한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신경의 한쪽 끝에 현실 상황을 염두에 두며 보게 되기도 했다. 선인들이 어떻게 싸우며 어떻게 되살리고 어떻게 지켜온 나라인데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나. 너희가 믿는 신령이 누군지 몰라도, 의사와 열사들 영혼의 힘만으로도 천벌을 받기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Posted by the12th
만끽!2024. 12. 26. 14:25

삶의 낙을 FC서울에 의탁하다 보니 유튜브 알고리즘도 온갖 축구 콘텐츠를 밀어 올려주는데, 덕분에 넷플릭스에 '프로축구의 태동기'를 다룬 드라마가 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됐다.
 
그리하여, 2020년에 공개됐던 넷플릭스 오리지널 6부작 <잉글리시 게임>을 뒤늦게 보았다.
 
유럽의 프로 축구를 보고 누군가 "수만명의 거지들이 22명의 백만장자가 뛰는 걸 보는 스포츠"라고 평했다던데, <잉글리시 게임>은 바로 그 '백만장자'들이 처음에 어떻게 시작됐는지를 그린 드라마이다. 19세기 축구가 막 인기 스포츠로 뿌리내리기 시작하던 시기, 실존인물들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정비되지 않은 전략 전술이나 다듬어지지 않은 규칙과 같은 초기 축구의 거친 형태를 보는 재미를 준다. 불법인 상황에서 전업 축구 선수를 몰래 스카웃한다거나 다시 경쟁팀에 빼앗긴다거나 그러다 이적료를 지불한다거나, 나아가 축구 경기 관람권을 돈받고 판다거나 하는 프로스포츠의 개념이 처음 등장하는 것을 보게 되는 것도 흥미롭다.
 
초기의 현대 축구는 규칙을 제정했던 엘리트 귀족들이 주도권을 행사한 '아마추어 스포츠'였다고 한다. 귀족들은 FA를 설립해 임원을 도맡아 하며 규칙을 제개정했고, 동시에 올드이토니언스라는 팀에 참여해 경기에 뛰면서 FA컵을 독식해 왔다. 축구의 인기가 높아지자 공장 자본가들은 자신의 노동자들로 팀을 꾸려 운영하기도 했는데, 성적을 더 높이고 싶었던 다웬의 방직공장주가 멀리 스코틀랜드에서 공 좀 차던 퍼거스 수터와 지미 러브에게 별도의 돈을 주고 다웬으로 데려오면서 축구판에 파란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축구의 순수성(!)을 주창하며 돈을 위해 뛰는 선수가 있어선 안 된다고 주장했던 FA의 귀족들은, 공정성을 저해한다며 프로축구 선수의 등장을 봉쇄하려 한다. 그러자 올드이토니언스의 주장이자 에이스인 아서 키네어드가 나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좋은 음식을 먹고 여유롭게 훈련도 하고 그래서 체격도 체력도 좋다. 그러나 저 노동자들은 수십시간씩 노동으로 지친 상태에서 훈련도 제대로 못하고 먹는 것도 열악하다. 그렇다면 이런 상태에서 우리가 저들과 경쟁하는 것은, 과연 공정한가?"
 
애초에 출발선이 다를진대 다름아닌 '공정'을 내세우며 기계적인 눈 앞의 조건만 맞추려는 것은 사실상 '불공정'에 다름 아니라는 얘기다.
 
아서 키네어드도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승부에 집착하던 초반부에 그는 자기 팀의 구성원들이 FA임원이라는 점을 활용해 규칙을 유리하게 적용하며 퍼거스 수터의 다웬FC를 꺾는다. 그런데 비겁한 자신의 모습에 실망하는 아내의 표정에 가책을 느끼게 되고, 아내를 통해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한다. 그리고 우연한 기회에 노동자들이 처한 현실을 직시하면서 마침내 균형감을 갖춘 사람이 된다.
 
축구를 소재로 했으나 사실은 공정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고 또한 두 계급 사이 축구 경기 이야기를 펼쳐내고 있지만, 보편적 공정성보다 계급간의 차이와 비례적 공정의 가치가 더 강조돼야 함을 힘주어 짚는다. 그걸 <잉글리시 게임>이라는 제목으로 둘러 축구 종주국으로서의 자부심을 슬며시 과시함과 동시에, 영국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라는 점도 분명히 한다. 영리하다.
 
어느 스포츠가 그러지 않으랴만, 축구는 공정함을 지향한다. 초기의 어설펐던 규칙들이 계속 개정돼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다듬어졌던 것도 조금 더 공정한 게임을 만들어 나가는 노력의 과정이었다. VAR도 처음엔 축구의 순수성을 운운하며 저항했던 자들이 있었지만, 오심이 선수들의 공정한 노력을 훼손해선 안 된다는 원칙적인 목소리가 더 컸기에 도입됐고 지금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축구의 일부가 되었다.
 
드라마에 나온 FA는 처음엔 플레이어이자 규칙 제정자의 모순된 위상을 지니며 불공정하고 탐욕스러운 주체로 비쳐지지만, 아서 키네어드와 같은 사람의 노력으로 이내 공정한 운영자로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그 결과 축구는 엘리트 귀족들의 전유물에서 벗어나, 만인의 사랑을 받는 스포츠로 발전해 나갈 수 있게 된다. 공정성은 축구가 사랑받을 수 있는 가장 절대적인 가치다. 공정성이 훼손된다면, 그런 축구는 의미가 없다. 세상에 누가 불공정한 경기를 보고 싶어 하겠는가.
 
그런데 고개를 돌려 보니, 우리의 축구협회는 19세기 FA보다 미개하구나... 공정성이 결여된 성취가 반가울 리 없다. 축구의 정신을 뿌리째 훼손하고 있는 자들 같으니.. 정몽규와 홍명보는, 이제 그만 나가라. 쫌!
Posted by the12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