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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2.04 12.1" 8
만지작2008. 2. 4. 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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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재용이라며 회사가 준 첫 번째 컴퓨터는 HP에서 나온 14인치 노트북이었다. '이동 편의성'이 강점인 랩탑치고는 무게가 만만치 않아 동기들 사이에서 우스개 소리로 "들고 다니는 데스크탑"이라 불리기까지 했는데, 나중에 보니 아닌 게 아니라 "데스크탑급 사양"이 이 노트북의 대표적인 장점이라고 했다.

 회사는 향후 취재기자가 노트북으로 방송에 참여할 수도 있는 환경 변화를 고려해 일부러 사양이 높은 노트북을 취재장비로 선정했고 그 까닭에 무겁고 크게 된 것이라 설명했다. 하지만 내가 이 노트북을 짊어지고 다닌 4년 동안 회사가 심사숙고해 고려했던 그런 방송 환경은 오지 않았다.

 타사 기자들이 소형화 기술의 발달 덕을 톡톡이 보며 점점 작고 가볍고 심플한 취재장비를 들고 다니는 추세를 도도히 거슬러, 회사는 이 컴퓨터 이후에도 오히려 점점 더 무겁고 크고 심지어 '와이드'하기까지 한 컴퓨터를 지급했다. 물론, 그만큼 사양도 높아져 갔음이 분명하기야 하겠지만.

 새로 지급되는 노트북도 결코 작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무거운 노트북을 짊어지고 뛰어 댕기느라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닌 여기자들과 허리 디스크 환자들을 중심으로 작은 노트북에 대한 요구가 터져 나왔다. 급기야 자비를 털어 작은 노트북을 사 쓰겠다는 사람이 생기까지 했는데, 회사는 보안상의 이유를 들어 '공인된 컴퓨터' 이외의 노트북에 취재 관련 프로그램을 깔아 주는 데 몹시 인색해 했다.

 4년 연한이 다 된 컴퓨터를 바꾸게 될 즈음, 결국 '작은 노트북'에 대한 요구가 반영됐다. 15.4인치 노트북과 12.1인치 노트북 가운데 원하는 컴퓨터를 지급해 준다는 수요 조사를 한 것이다.
 
 하지만 수요조사를 통해 뚜껑을 열어보니, 사실 작은 노트북에 대한 욕망은 소수에 불과했던 모양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15.4인치 급을 선택했으니 말이다. 그들은 대부분 스스로를 어지간한 노트북 무게는 감당할 수 있는 건장한 남자라 자신했기 때문인 듯 보였다. 물론, 작은 노트북은 글자 역시 작은 법인지라 눈의 피로를 염두에 뒀을 수도 있고 말이다. '대세'를 거슬러, 나는 여사우들을 쫓아 꿋꿋이 12.1인치를 선택했다.

 나에게 회사가 주는 노트북은 인터넷 쇼핑을 한다거나 게임을 한다거나 영화를 보는 데 좋은 것이 아니라, 들고 취재 현장 이곳 저곳을 뛰어 다니며 기사를 작성하고 전송하는 데 능한 것이어야 한다는 평소의 '신념'을 묵묵히 따른 것이다. 사양이 떨어진다거나 화면이 작다거나 그로 인해 글자 가독성이 떨어진다거나 하는 단점이야 있지만, 그런 점을 충분히 상쇄시켜주고도 남는 '이동 편의성'을 보장해 주기 때문이다. 꽃피는 봄이 오면, 개구리들과 함께, 다시 '들판'으로 나다녀야 할 처지인 까닭이다.
 
 연장 좋다고 좋은 목수 되는 것은 아니고, 책가방 좋다고 공부 잘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좋은 연장과 좋은 책가방은 더러 긍정적인 동기 부여를 하기도 한다. 새 노트북과 함께 할 4년이 기대된다. 그 덕에 내게는 결핍되어 있는 일에 대한 욕심마저 살짝 스며 나온다. 이 녀석과 좋은 기억을 많이 만들 수 있으면 좋겠다.

calvin.

Posted by the12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