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지작2010. 2. 22. 11:24
 많은 남자들이 그렇듯, 나도 '전자 기기'를 좋아라 한다. '얼리 아답터'를 동경할만큼 새로운 기기들에 대한 관심이 높지만, 쳇, 얼리 아답터는 아무나 하냐. 다 주머니가 풍요로워야 가능한 일인 법이다. 단순히 신기해서 또는 막연히 경험해 보고 싶어서 아무 기기나 마구잡이로 사들일만큼, 살림이 넉넉하지도 않을뿐더러 난 중독돼 있는 것도 아니어서, 내게 최적의 기기를 맞춰 갖추고, 놀고, 지낸다. 그렇게 살다 보니, '얼리 아답터'씩이나 될 순 없더라도, 최소한 나 역시 '디지털 노마드'의 범주 정도에는 들어가 있을테다. 

 '디지털 유목민'으로서의 삶을 거슬러 오르다 보면, 아무래도 이 기기에 닿을 수밖에 없다. 중학생 때 아버지의 선물, 눈 돌아갈만큼 화려하고 뽀대가 났던 AIWA의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HS-J800이다. 이 분야에서는 '워크맨'을 보통명사로 만들어 버렸던 소니의 명성이 더 자자했지만, 난 이 제품 하나로 '아이와 빠'가 되고 말았다. 내 손에 쥔 이 물건 때문에, 난 아이와가 소니보다 더 대단한 전자 회사라고 우기고 다녔다.
 
 디지털 방식의 액정과 버튼식 오토 튜닝 시스템, 이어폰과 연결된 액정 리모컨의 포스가 장난 아니었다. 이 멋들어진 기기와의 행복한 삶은, 그러나 몇 달을 가지 못했다. 독서실에서 도난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만큼 뽀대나는 기기는 언제나 누군가 마수의 표적이 된다는 걸, 그만 깜빡하고는 방심했던 탓이다. 속상함에 며칠을 잠도 이루지 못했다.

 이후 LG의 아하, 삼성의 마이마이 등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가 내 손을 거쳐갔지만 이 제품에서 만큼의 애착은 다시 생기지 않았다. 가장 짧은 시간동안 함께 했던 카세트 플레이어였지만, 오히려 내게 '카세트 플레이어'라고 하면 이 기기 외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나같은 막귀에 CD는 사치"라며 카세트 플레이어에 만족해 하면서, 난 중고등학교와 대학 시절까지 지나 보냈다. 그 시절 나의 감수성을 자극했던 동물원이나 오아시스와 같은 밴드의 음악들은 모두 카세트테입을 통해 귀에 닿았다. 카세트 생활을 청산한 것은 대학을 졸업한 뒤 <뉴스툰>에서 일하던 때였는데, 박봉일지라도 월급다운 월급을 받아쥐게 되자 난 돌연  CD를 사 모으기 시작했고, 그러자 CD플레이어가 필요해졌다.
 
 당시 대히트작이었던 아이리버의 슬림X가 눈에 들어왔지만, 가격의 압박에 단념했다. 결국 인터넷을 뒤져 고른 적당한 제품은 파나소닉 SL-CT800. 단순하고 꼭 필요한 기능에 슬림하고 깔끔한 디자인이 강점이었다. 충전할 때 램프의 깜빡임도 시각적 즐거움을 주기에 충분했고. 여기에 파나소닉 특유의 중저음을 강조해주는 음장(...이라고는 하지만 내 막귀는 역시 알 수 없었음...), 가방의 CDP포켓에 넣어 다니는 휴대성도 뛰어났다. CD뿐 아니라 CDR도 읽을 수 있어 mp3 파일을 CD에 마구 구워 들으며 다녔다.

 내가 CDP를 사서는 결국 mp3를 구워 듣고 다녔듯이, 시대는 이미 CD가 아닌 mp3의 시대로 넘어가고 있었다. 본격적인 디지털 세상이 온 것이다. 하지만 마땅히 마음에 드는 mp3플레이어는 찾아지지 않았다. 보통 256MB의 용량, 많아봤자 512MB의 용량이었던 mp3플레이어는 파일을 수시로 넣었다 지웠다를 반복해야 하는 일이 번거롭게만 느껴졌기 때문이다. 차라리 mp3를 때려넣은 CDR을 교체하는 게 수월했다. 그렇게 한동안 파나소닉 CDP에 만족해 하다, 이 제품을 보고 난 지체없이 넘어갔다. 아이리버 최초의 하드디스크 타입 mp3플레이어인 ihp-120d다.
 
 mp3플레이어로는 무한대나 다름없게 느껴졌던 20GB의 대용량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소장하고 있던 모든 노래들을, 교체해야 할  부담 없이, 그냥 몽땅 때려 박아 놓아도 충분한 용량이다. 모두 집어 넣고 그때 그때 듣고 싶은 노래들을 찾아 들으면 되는 점이 편리했다. 거기에 남는 공간은 이동식 하드디스크로 쓸 수 있는 점도 효용성을 높였다. 널찍한 액정과 모든 기능 조작이 가능했던 리모컨, 그리고 충분한 배터리 용량까지, 아쉬울 게 없는 이 제품은 참 오랫동안 나의 유목민 생활을 함께 했다. 순천에서 근무할 때 주말에 서울 올라오는 무료한 시간을 함께 해줬고, 영국 여행길의 장거리 비행 시간도 이놈 덕분에 이겨낼 수 있었다. mp3플레이어로서는 내게 완벽해 애지중지했던 이 기기는 평생 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또다른 디지털 기기인 휴대전화기는 군에서 제대한 뒤인 2000년 무렵에 처음 갖게 됐다. 아버지께서 불쑥 사주신 LG 싸이언의 플립 모델이었다. 미국 연수를 다녀온 뒤에는 누나가 사용하던 애니콜의 폴더 모델을 이어 받아 사용했다. 
 
 내가 스스로 선택한 모델은, 그러니까 이게 처음이었다. 인터넷을 뒤져 보상 기변의 형식으로 손에 쥐게 된, 삼성 애니콜 SCH-X730인데, 이 기기는 참 뛰어난 스펙을 가지고 있음에도 의외로 많이 알려져 있지 않았다.
 
 액정 로테이션에 터치가 가능했던 전화기였다. 아마도 우리나라 최초의 터치폰이 아니었을까 싶은데, 이 터치 기능 덕분에 스타일러스로 SMS를 써서 보낼 수 있는 점이 특장점이었다. 전화기를 갖고 터치질을 하고 있으면 주변에서 신기하다며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이 많았다. 지금도 태블릿PC가 대세이듯, 그 때 난 터치스크린이 대세라고 생각했다. X730의 액정 필기와 터치 기능은, 그래서 내게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게 했다.


 PDA는 지금의 회사로 옮기면서, 주머니 사정이 좋아지게 되자 자연스럽게 눈이 돌아간 디지털 기기다. 뭐 혹시라도 일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일종의 자기 투자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PDA에 대한 관심을 부추겼다. 그 뒤 이 물건의 쓰임새를 가만 생각해 보면, 그건 사실 그저 핑계거리에 불과하긴 했지만.
 
 내가 처음 쥐게 된 PDA는 HP iPaq-4450이다. 신품은 100만원에 육박하는 고가였지만, 새거같은 중고를 무려 60만원에 업어들였다.
 
 PDA는 Palm Top, 그러니까 '손 안의 컴퓨터'로 불리며 장차 노트북을 대체할 것으로 여겨지는 제품이었다. 난 PDA를 사용하면서 몇년동안 이어 사용해 오던 다이어리를 손에서 놓았다. 이 물건 하나면 일정 관리와 연락처 관리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동영상 재생과 음악 재생, 그리고 문서 작업 기능도 할 수 있었다. 무선랜이 탑재돼 있어 인터넷도 쓸 수 있었으며 지문 인식 기능 덕분에 보안성도 훌륭했다. 어플리케이션을 깔면 게임도 하고, 전자사전도 되고, 지하철 노선도 검색할 수 있다. 급하게 컴퓨터로 할 수 있는 일들이 대개 가능한, 정말 만족스러운 휴대기기였다.


 사람들의 관심을 받던 SCH-X730은 오래 가지 못했다. 회사에 들어오자 법인폰으로 갈아줬기 때문이다. 팬택앤큐리텔의 전화기였는데, 별다른 기능없이 전화를 걸고 받는 데 집중한 '딱 법인폰처럼 생긴' 전화기였다. 그 전화기가 여기저기 잔고장 증세를 보이고 배터리도 수명을 다 해갈 즈음, 난 자비를 들여 과감히 단말기를 교체했다.
 
 SCH-B410 가로본능에, 무엇보다도 지상파 DMB가 가능한 전화기였다. 나도 손에 들고다니는 TV 시대로 본격적으로 진입한 것이다. 요즘 DMB폰과 달리 안테나가 내장돼 있어 그냥 뽑아 쓰면 DMB가 잘 잡혔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이 전화기는 훌륭했다. 새벽에 경찰서로 출근해야 했던 2006년 독일 월드컵 때도, 이 휴대전화기를 차에 거치해서 새벽의 중요한 경기를 챙겨 볼 수 있었다.  

 첫번째 PDA였던 5450을 쓰다 보니, 다소 떨어지는 사양과 적은 용량의 메모리가 갑갑하게 느껴졌다. 난 결국 잘 쓰던 5450을 중고로 값을 잘 받아 처분하고는 10만원 정도의 추가금을 더해 용량이 조금 더 크고 RAM도 좀 더 넉넉한 iPaq 5550 사들였다. 5450과 기능면에서 큰 차이가 아니었지만, 사용하다 보면 크게 느껴지는 차이가 있는 기기였다.
 
 PDA는 확장팩에 따라서 다양한 용도로도 사용이 가능하다. 아이킷을 끼우면 전화기로도 사용이 가능하다. CF메모리를 끼울 공간이 없지만 CF확장팩을 끼우면 CF메모리도 쓸 수 있다. 난 아이나비 킷을 사서 썼다. 내비게이션으로 사용이 가능하도록 한 것이다. 차에선 내비게이션으로 사용하고, 차에서 내릴 땐 거치대에서 빼서 PDA로 사용했다. 나름대로는 유용했다. 하지만 동시에 불편하기도 했다. 차에 탈 때마다 거치를 해야 하고, 또 내릴 때마다 거치를 풀어야 했다. 차에 오래 거치하면 여름엔 열을 받아 맛이 가기 십상이었다.

 PDA의 결정적 단점은 무겁다는 것이었다. 주머니에 넣을 수 있는 사이즈이긴 했지만, 주머니에 넣을 수 없는 무게였다. 금세 떨어지는 배터리 용량도 이 물건의 한계였다. 심지어 실용성도 떨어졌다. 일정이나 연락처 관리는 그 즈음 휴대전화기로도 충분히 가능했다. 동영상을 재생하려면 번거롭게 인코딩 작업을 해야 했다. 내비게이션으로만 쓰자니 차에 항상 두는 게 불안했다. 휴대용 기기를 차에만 박아두는 것은 또한 제대로 활용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했다.

 부족한 메모리, 지지부진한 사양 업그레이드, 묵직한 무게, 단조로운 어플리케이션, 둔탁한 확장팩 등은 그 시절 대부분 PDA의 공통적인 문제점들이었다. 지금이야 PDA의 결정적 단점들은 결국 개선돼서 스마트폰 형태로 진화했지만, 난 그 때만 하더라도 PDA가 미래에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PDA의 단점을 상쇄하는 다양한 기기들이 그 즈음 불쑥 불쑥 튀어나와 주기도 했다. 난 좀 더 효율적인 방식으로 디지털 삶을 영위하기 위해, 시대에 뒤떨어진 PDA를 처분하고 효용성을 키우는 방식으로 기기 변경을 하기로 결정했다.  

 PDA의 다이어리 기능은 휴대전화기에 맡겼다. 동영상 보는 빈도는 떨어지고, 음악은 iHP-120D가 있으니 문제 없다. 무선 인터넷은 당시만 해도 AP가 흔치 않았던 터라 어차피 유용하지도 않았다. 마지막으로 가장 PDA에 의존했던 건 내비게이션 기능이었는데, 이건 전문 내비게이션에 맡기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PDA와 아이나비 킷을 중고로 팔아 치우고 그 돈으로 아이나비 스마트 장만했다. 작은 PDA의 세로 화면으로 길 안내를 받지 않아도 됐고, DMB 기능도 탑재돼 있어 차에서 작은 휴대전화기 화면으로 DMB를 보지 않아도 됐다. 휴대성을 위한 탈착 배터리가 있어서 필요하면 PDA처럼 들고 다닐 수도 있었다. 동영상 재생도 가능했으니, 내가 쓰기엔 PDA 부럽지 않은 기기였다. 다만, 4인치의 답답한 화면은 불만이었다.

 내비게이션 시장은 7인치 시대로 넘어갔다. 넓은 지도 화면은 내가 간절히 바라던 바다. 아이나비 스마트를 누나에게 양도하고, 아이나비 G1을 사들였다. 7인치 내비게이션 가운데 최고의 기기다. 

 무엇보다도 디자인이 잘 빠졌다. 슬림하고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 넓은 화면과 DMB, mp3플레이어, 동영상 재생 등의 기능도 수준급이다. 노래방이나 게임 기능은 잘 사용하지 않지만, 없는 것보다 낫다. 특장점이라고 광고해 대는 G센서도 왜 있는지 모르겠지만, 역시 없느니보다 낫다. 꾸준한 지도 업데이트나 펌웨어 업데이트로 기기를 계속 향상시키는 업체 측의 노력도 만족스럽다. 뭐 가끔 길 안내에서 헤매는 면이 없지 않지만 그건 현존하는 모든 내비게이션들에 해당되는 얘기니 단점이라 하기도 뭣하다. TPEG을 이용하면 막히는 길을 피해 지름길을 안내해줘 가끔씩 유용하기도 하다.  

 화려한 그래픽의 3D 내비게이션을 포함해 G1이후 나온 다른 내비게이션들 가운데 이 기기를 대체할 내비게이션은 없다. 디자인과 맵, 그리고 사용자 편의성 면에서 G1은 나무랄데 없는 명기다. 3년여 동안 내비게이션 기변을 꿈도 꿔보지 않은 이유는 거기에 있었다.

 차에서 내비게이션도 쓰고 카팩 연결된 mp3플레이어로 음악도 듣고 하다, 평생 같이 할 것 같던 IHP-120D를 떠나 보내게 됐다. PMP의 세계로 진입하기 위해서다. 맥시안 E900T 많은 면에서 오히려 PDA를 능가하는 제품이다. 인코딩 필요 없이 뛰어난 동영상 재생력은 물론, 60GB의 넉넉한 용량으로 모든 mp3를 때려박아놓고 들을 수도 있다. 애지중지하던 120D를 처분할 수밖에 없었던 건 그 기능이 E900T로 대체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DMB가 되는 것은 물론이다. 각종 사전도 추가 구입해 사용이 가능하다. 말하자면 동영상, mp3, 문서읽기, 일정관리, 전자사전, DMB가 이 기기 하나로 모두 되는 것이다.  

 배터리 지속 시간도 만족스러운 정도지만, 여기에 탈착식 배터리를 적용해 여분의 배터리만 있으면 장거리 여행에서도 불안하지 않다. 충전과 TV연결을 동시에 해주는 거치대가 있어 TV로 PMP의 동영상을 볼 수 있는 점 역시, 여타 다른 제품과 차별적인 기능이다. 최근 나온 고사양의 PMP들의 경우엔 거치대가 없고 내장 배터리라서 매력이 없다.

 단점이라면 블루투스 기능이 없다는 점과 USB메모리를 본체에 바로 끼울 수 없다는 점 정도. 하지만 이 조차도 블루투스 동글과 USB젠더로 보완이 가능하다. 불편함보다는 장점이 더 많은 제품. 이 기기도 오래 쓰고 싶은 기기다.


 내비게이션 기기 중엔 대체품이 없었던 G1을 떠나보냈다. 장점이 많은 기기지만 멀티미디어 기능은 부족했다. 멀티미디어로서 역할을 위해 E900T를 차에 거치해 썼지만, 작은 화면과 여러 번거로움이 또 나를 귀찮게 했다.

 빌립 X70반트 7인치 PMP에 아이나비 SE와 GPS가 내장돼 있는 디지털 기기다. 용량은 60GB, 배터리는 탈착식이다. WIFI 이용도 가능하며 블루투스도 된다. 들고다니는 PMP로는 크고 무게도 꽤 나가지만, 내비게이션을 겸한 차 안의 멀티미디어 시스템으로는 최적이다. G1과 사용빈도가 현저히 떨어진 집의 Wii를 팔아 치우고, 추가금을 좀 보태 스스로에게 생일 선물로 삼았다. 

 사용 편의성은 조금 아쉽다. 전원을 리모컨으로 켤 수 없다든지, 더블터치를 해야 기능이 작동된다든지 하는 건 옥의 티다. WIFI도 만족할만한 수준은 못된다. 차계부도 그닥 정밀하게 설계돼 있지 못하다. G1보다 모자란 점들도 벌써 눈에 띨만큼, 최고의 기기는 아니다. 

 E900T까지 대체해 줄까 기대하기도 했지만, E900T는 그대로 쓰임새가 따로 있다. 휴대성이 좋고, 거치대로 TV와 연결할 수 있다는 점이다. 새로운 디지털 기기들이 무수히 쏟아져 나오지만, 내 생활 패턴이나 미감에 맞지 않으면 무용지물. 그래서 아마도 오랫동안 E900T는 X70반트와 함께 내 디지털 유목민 삶을 책임져 줄 것이다.

calvin.
Posted by the12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