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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4.25 [음반] 좋아 죽겠네, 아주 그냥
만끽!2009. 4. 25. 23:55













 이건 뭔가. 1980년대에 태어난 녀석이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유행하던 노래를 부르고 있는 이런 상황은. 뭐 한 겨-우 초등학생 쯤 되었을 무렵에 기껏 이선희 누나나 알았을 녀석이 신중현이나 산울림, 송골매 같은 노래를 부르고 그 정서를 완전히 포착해 내고 있잖어. 이건 20대라고 하기에는 뭔가 너무 원숙한 게, 어딘가 늙주그레죽죽한 정서마저 있는 것 같으면서도, 그걸 또 저항 정신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너무 쿨 한게, 어찌 보면 심하게 자유 분방하달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심지어 그걸로 세대를 뛰어넘는 공감을 이끌어내는 녀석의 등장이라니, 이건 뭐 완전히 별일임에 틀림 없다. 

 처음 웃음을 자아내는 안무의 '달이 차오른다, 가자'를 들었을 때, 난 그냥 별 이상한 놈이 다 튀어나왔다고 생각했다. 그 다음 역시 웃음을 자아내는 가사의 '싸구려 커피'를 들었을 때, 난 이 별 이상한 놈이 아주 골때리기까지 하는 녀석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거기까지라고 생각했다. 웃긴 걸로 대중의 이목을 어찌 어찌 이끌어 보긴 했으나, 웃음으로 흥한 자 치고 오래 가는 놈 없었기 때문이다. 지루하고 심드렁한 일상에 작은 파문을 줬을 뿐, 그저 스쳐지나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첫 앨범을 듣고서야 내가 틀렸다는 걸 알았다. 그가 노래에 심은 것은 개그가 아니라, 일종의 '페이소스'였으니 말이다.

 이들의 노래는 낄낄 거리며 듣다보면 어느새 마음을 짠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가령 첫 번째 싱글 '싸구려 커피'부터가 그랬다. 룸펜 혹은 장기 실업자의 처지를 유희적인 가사로 묘사했지만, 거기엔 자학이 섞여 있고 처참한 일상에 대한 비애가 배어있다. 처해진 상황은 비참하기 이를데 없지만 딱이 탈출구라고 할 게 없으니, 그저 자조할 따름이다.

 '싸구려 커피'가 포함된 앨범 <별일 없이 산다>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사실 '상실감'이다. 하지만 장기하와 얼굴들은 그걸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노골적으로 드러냈다면 그들은 모던록을 하고 있어야 할 일이다. 대신 장기하와 얼굴들은 그 가슴의 상처를 "별일 없"는 듯 억누르며 환하게 웃는다. 

 앨범의 타이틀 곡인 '별일 없이 산다'는 '포크록'이라는 밴드의 장르에 가장 부합되는 사운드를 들려준다. 몸을 들썩이게 하는 기타 리프에 맞춰, 장기하는 최대한 단호하고 강단있는 보컬로 "별일 없이 살"고 "별다른 걱정 없"고 "사는 게 재밌"고 "하루하루 신난다"고 반복해 강조한다. 하지만 단호하고 강단있을지언정 그 목소리에 환희와 유희는 배어 있지 않다. 메말라 있고 심드렁하고, 심지어 악에 받쳐 있기까지 하다. 강한 긍정은 강한 부정으로 들리는 법이다. 게다가 상대에게 "절대로 믿고 싶지가 않을" 것이라며 작심하고 경고하는 일이라는 게 고작 "별일 없이 산다"는 건, 자신이 할 수 있는 저항이 겨우 그것일 뿐이라는 얘기다. 노래는 자신을 차버린 연인을 향한, 자신의 인생을 망친 상대를 향한, 혹은 위압적인 공권력이나 신자유주의 시스템을 향한, 소심한 복수로 들린다.   

 "선지자"에게 "완전히 속"은 상실감을 재밌는 가사와 밝은 템포로 전달한 '아무것도 없잖어'나, 서정적인 멜로디에 헤어진 연인을 그리는 가사를 실어 전한 '정말 없었는지', 어깨 춤으로 또 다시 화려한 무대 매너를 자랑하고 있는 '나를 받아주오'도 같은 맥락이다. 

 장기하와 얼굴들은 완전히 고루한 음악을 완전히 새로운 음악으로서 21세기에 끌고 들어왔다. '싸구려 커피''나를 받아주오'에서는 포크록과 토속적인 타령을 절묘히 결합했던 신중현 음악의 향이 짙게 배어 있고, '달이 차오른다, 가자'에서의 팔을 팔랑거리는 안무는 북한에 보내는 신호였다는 김추자의 '거짓말이야' 춤을 연상시킨다. '별일 없이 산다'의 창법은 푸석푸석해 묘한 매력을 불러 일으켰던 배철수의 그것이고, '나와' '아무것도 없잖어' '오늘도 무사히'는 한국형 포크록의 전형 산울림의 노래를 제법 쏙 빼닮았다. 

 단지 흘러간 옛 노랫자락을 답습한 것에 머물렀다면, 장기하와 얼굴들은 카피밴드에 지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장기하는 그런 점에서 '온고지신'이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친구다. 이건 뭔가 랩이라고 하기엔 뭔가 아니다 싶은, 차라리 판소리의 아니리에 가까운, '싸구려 커피'에서의 인상적인 래핑이나, '달이 차오른다, 가자' 나를 받아 주오'에서의 화려한(?!) 무대 매너는 그가 70년대 노래를 가져 오는 데 있어서 그저 똑 떼어 들고나온 게 아니라 90년대를 관통해 끌고 들어온 것임을 분명히 한다. 70년대 음악을 80대 생이 90년대를 입혀 2000년대에 소개하는 식이다.

 음악과 함께 빛이 나는 것은 노랫말이다. 왜 하필 포크록이냐는 어느 인터뷰에서의 질문에 대해 장기하는 포크록이 우리 말을 가장 잘 담아낼 수 있는 장르이기 때문이라고 답한 적이 있다. 노래를 듣다 보면 자꾸 입이 들썩이며, 아주 그냥, 마침내 따라 부를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the best track: 별일 없이 산다
 
calvin.
Posted by the12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