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끽!'에 해당되는 글 41건

  1. 2023.10.27 미야자키 유니버스의 총화 1
  2. 2023.09.18 단잠과 악몽 사이
  3. 2023.09.15 아메리칸 이카로스
만끽!2023. 10. 27. 08:39

미야자키 하야오 선생의 은퇴번복작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보았다.

미야자키 선생의 영화이니 반드시 보긴 보았겠으나, 아마도 제목이 영어 제목처럼 <소년과 왜가리> 이런 식으로 나왔었다면 개봉 당일부터 부랴부랴 찾아가 보지는 않았을 거 같다. 그만큼 내게는 이 제목이 강렬했다. 요즘 부쩍 꽂혀있는 화두라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미야자키 선생이 혼란한 내 마음에 영감 한 방울 떨궈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나의 발걸음을 평일 퇴근길에 영화관에까지 이르게 하였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 제목은 일본의 학자 요시노 겐자부로의 동명 소설(혹은 청소년 인생지침서?!)에서 가져온 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 본인이 소년 시절 어머님의 권유로 읽고 큰 감명과 영감을 받은 책이라고 하는데, 그렇다고 이 책이 영화의 원작인 것은 또 아니다. 제목과 미야자키 본인이 받은 영감, 그리고 이 책을 만났던 본인 이야기를 모티브로 삼아 만든 미야자키 선생의 오리지널 스토리인 건데, 책과의 연결성이 가깝다고도 또 멀다고도 할 수 없다. 책이 준 영감이 작품 제작의 단초가 되었다고 하니 아마도 요시노 겐자부로의 책을 읽으면 보다 더 영화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기는 할 것이다.

책도 책이지만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좀 더 잘 보려면 미야자키 하야오가 만들어온 그간의 작품들을 다 섭렵해 두는 편이 더 필요하다. 이 영화는 '미야자키 유니버스'를 집대성했다 할만큼, 그간 미야자키 하야오가 만들어온 작품들의 흔적들이 아주 두텁게 칠해져 있는 작품이다. 어디선가 본 듯한 장면, 어디선가 만난 듯한 풍경이 눈에 자꾸 밟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가령 파도가 넘실대는 장면은 <벼랑 끝의 포뇨>를, 하늘에 떠 있는 돌은 <천공의 성 라퓨타>를, 귀여운 와라와라는 여지없이 마쿠로구로스케나 코다마를 연상시킨다. 주인공 마히토는 <바람이 분다>의 지로를, 그가 모험에 돌입하는 과정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꼭 닮았다. 마히토와 히미가 함께 위기를 헤쳐나가는 장면들은 <미래소년코난>과 <천공의성 라퓨타> 등에서 숱하게 보였던 소년소녀 모험물이고 마히토가 큰할아버지를 만나는 정원은 다름아닌 <붉은돼지>에서 지나의 정원이다. 그 밖에도 미야자키 선생은 영화 곳곳에 전작의 상징적 장면들과 은유를 덧대고 또 덧댄다. 때문에 미야자키 하야오 세계를 아는만큼 이 영화를 더 풍족하게 즐길 수 있다.

이 영화가 난해하다는 인상을 받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싶다. 혹은 미야자키 하야오가 거장이 되고 국제 영화제에서 작품성을 인정받으면서, 이해되지 않는 장면마다에 무언가 의미를 심어놓았다는 의심(?)을 받게 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미야자키 유니버스'는 원래부터, 현실 세계의 눈으로는 개연성이 없으나 풍부한 상상력만 있다면 환상적인 이야기들이 가득찬 곳이었다. 뜯어보고 따지기보다 그냥 선생이 펼쳐놓은 무한한 상상의 세계에 몸을 내맡기면 그것만큼 재미있는 게 없는 곳이다.

그렇게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미야자키 하야오 자신이 만들어 온 세계를 정리하고 종합하고 또한 극대화한 작품이다. 여전히 신나는 모험이 있고 여지없이 환상적이고 몽환적이면서도, 그 이면에는 여실히 실사와 컴퓨터그래픽이 닿을 수 없는 고집스러움과 치열함도 엿보인다. 이 정도라면 나이 여든이 넘은 노애니메이터가 은퇴를 번복할 만 한 이유가 충분하다.

영화의 말미에 마히토는 선택의 기로에 선다. 막강한 권한을 가질 수 있는 저 세계에 머무를지, 혼란하고 악의가 가득한 이 세계로 돌아갈지. 마히토는 후자를 선택한다. 그가 선택하는 이유가 성장하는 소년 답다. 그 숱한 어려움들을 혼자 힘으로 이겨내지 못하면 친구들과 함께 이겨내겠단다. 요시노 겐자부로의 책에서 주요한 내용 중 하나가 친구들과의 다툼을 어떻게 극복할지에 대해 서술한 부분이라고 하는데, 영화 초중반부에 마히토가 학교 친구들과 갈등을 빚었던 장면들을 되짚어보면, 마지막에 그가 직접 목소리를 내는 '친구론'이 이 영화가 거의 유일하게 직접 드러내는 주제 의식이라 할 수 있다.

혼탁하고 어지럽고 앞이 잘 가늠되지 않는 세상이지만, 그러함에도 극복하고 이겨내야 한다, 혼자 하려 하지 말고, 주변의 여러 친구들과 함께, 그러니까 말하자면 '연대의 힘'으로 헤쳐나가야 한다는 말씀 되시겠다. 나도 그렇게 살 것이라 마음 먹는다.

역시, 미야자키 선생을 서둘러 알현하길 잘 했다.

Posted by the12th
만끽!2023. 9. 18. 17:07

모처럼 반려자랑 영화관에 가서 영화 <잠>을 보았다.
(최대한 피하려고 했으나 스포가 있을 수도 있겠다)
 
생각해 보니 나도 내 수면중 무호흡이 고약하다는 사실을 결혼 뒤 반려자를 통해 알게 됐었다. 청소년기 때부터 잠을 혼자 자게 됐기 때문에 내 잠버릇을 알게 되는 게 불가능했으니, 옆에서 누군가 잠자리에 함께 하고 나서야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러니 잠에 빠져 코도 골고 이도 갈고 침도 질질 흘리는 나의 가장 원초적인 못볼 꼴을 죄다 보게 되는 배우자는, 내게 얼마나 가까운 사람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배우자는 엄밀히 말하자면 남이다. 가족 구성원 가운데 유일하게 나와 DNA로 얽히지 않은, 생물학적으로 타인이다. 닮은 구석도 없고 성격이며 MBTI도 다르고, (사람마다 지속 기간의 차이가 있기야 하겠지만) 한 때 사랑했던 마음으로 결혼이라는 제도에 묶이는 바람에 가족이 되었을 뿐이다. 어찌 보면 이런 남에게 나의 가장 무방비 상태인 잠에 빠진 모습을 그대로 노출하는 셈이니 그 자체로 배우자는 나의 목숨줄을 내맡기게 되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니 피 한방울 안 섞인 타인이지만 가장 가까운 사이다 못해 나의 안전을 온전히 맡겨야 하는 상대인 배우자에게 가장 중요한 조건은 무엇이 되겠나? 신뢰다. 신뢰가 없으면 부부 관계가 유지될 수 없다. 신뢰가 없는 부부 살이는 온갖 의심이 도화선이 돼 악몽에 공포 호러물이 따로 없게 될 것이다.
 
<잠>은 몽유병에 걸린 배우자가 이상행동을 보이며 완전한 타인이 되어 나와 가족의 안전을 위협할 때 어떻게 할 것인가,로부터 상상력을 확장해 부부간 신뢰의 문제를 곱씹어 보게 만들어주는 수작이다. 짧은 시간, 제한된 공간, 그리고 단조로운 소재를 가지고도 매우 풍성한 이야기거리를 만들어 냈다.
 
사실 남편 현수(이선균)가 보이는 이상행동의 원인은 수면클리닉에서 명쾌하게(!) 진단했 듯 단순하다. 몽유병이다. 적절한 진단과 처방을 받고 치료하면 된다. 그런데 아내 수진(정유미)의 믿음에 이내 균열이 생긴다. 수면 중 이상행동이 생각보다도 지나치다 보니 남편을 밤새 감시해야 했던 아내가 이번엔 스스로 불면증에 빠지면서 정신이 혼미해진 거다. 정신이 흔들리며 남편과 과학(의학)을 향한 믿음에 균열이 발생하자 그 틈을 무속 신앙이 파고 들면서, 부부 간의 신뢰는 무너지고 서로 다른 것을 믿는 양상으로 치닫는다.
 
서로를 믿지 못하게 될 때 부부 사이의 갈등은 해결하기 쉽지 않다. 서로 다른 가정, 서로 다른 교육, 서로 다른 문화적 환경에서 성인이 될 때까지 성장한 두 사람이 사회적 제도에 의해 부부가 됐다 하여 매사에 같은 사고와 감정을 공유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게다가 부부는 동급이라 수평적 위치에서 각자의 신념을 바탕으로 논박을 하기 때문에 조정도 어렵다. 부부 싸움을 달리 칼로 물 베기라 하겠나.
 
서로 다른 믿음을 갖게 된 부부는 돌아오지 못한 강을 건넌 것처럼 대립한다. 그 와중에 수진은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를 들고 와 계속해서 믿으라고 강요한다. 현수에게는 선택지가 없다. 믿지 못하면 남는 것은 파국일 뿐이다.
 
서로를 믿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필요한 것은 ‘믿어주는 것’이다. 사실 실제로 믿는지 안 믿는지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니다. 서로를 믿어 주기로 하는 것, 그리고 내가 믿고 있다고 배우자가 믿게끔 해주는 것이야말로 부부 사이에선 더 중요한 것인지 모른다.
 
내게 이 영화의 마무리는 그렇게 읽혔다. 서로를 믿기로 하자 둘은 다시 경계심 없는 단잠에 빠진다. "둘이 함께라면 극복 못할 문제는 없다"는 듯이.
Posted by the12th
만끽!2023. 9. 15. 22:29

영화 <오펜하이머>를 보았다.
 
 
알다시피 ‘원자폭탄의 아버지’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영화는 불친절하고 낯설다고 알려져 있다. 1940년대 역사적 실화를 담고 있지, 그 시대 과학자들이 무더기로 등장하지, 양자물리학과 같은 원자폭탄의 배경 이론들이 대사로 쏟아지지, 그런데다 러닝타임은 장장 세 시간에 달한다. 그런데도 재미가 있겠냐고?
 
결론부터 말하면, 재밌다. 그것도 무척이나. 하지만 이 영화의 재미를 느끼려면 미리 공부를 좀 하고 가야 할 거다. 공부라고 해서 무슨 핵물리학을 공부할 필요까진 없다. 그저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누구고 무슨 일을 했고 어떻게 성공과 좌절의 시간을 보냈는지 정도의 정보는 알아야 이야기를 쫓아갈 수 있다. 배경 지식 없이 봐야 재미있는 영화가 있는 반면, <오펜하이머>는 아는만큼 재미를 더 느낄 수 있는 영화다.
 
가장 큰 이유는 이 영화의 플롯 때문이다. 영화는 크게 오펜하이머의 이야기와 루이스 스트로스(오펜하이머를 정치적 파멸의 길로 내모는 미 원자력 위원장)의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두 파트는 ‘분열(Fission)’과 ‘융합(Fusion)’이라는 부제까지 부여되었으며 각각 컬러와 흑백으로 구분된다. 여기에다 ‘분열’ 파트는 또다시 오펜하이머가 원자폭탄 개발로 성공하는 이야기와 그가 모함에 빠져 몰락하는 서사로 나누어진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이렇게 서로 다른 세 개의 시계열에 놓인 이야기들을 마구 쪼개고 나눈 뒤 다시 이어붙이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정렬해 낸다. 서로 교차되는 지점이 많지 않은데도, 감독은 기가 막히게 그 지점들을 찾아내 능수능란하게 편집점들로 활용을 한다. 현란하게 이뤄지는 교차편집 때문에 ‘오펜하이머 이야기’에 대한 사전 정보가 없이 보았다가 관객은 미로에서 길을 잃은 미아가 되고 만다. 반대로 이 이야기를 대체로 알고 영화관에 들어선다면 스토리는 물론이고 풍성한 플롯까지 만끽하며 가슴이 폭발하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될 것이다. 달리 ‘플롯의 장인’이라 찬사 받는 게 아니다.
 
‘분열’과 ‘융합’은 각 파트의 부제이기도 하지만, 이 영화가 줄곧 담고 있는 테마이기도 하다. 과감한 플롯도 요약하자면, 각각의 이야기들을 ‘분열’시킨 뒤 ‘융합’해 낸 것일테니까. 오펜하이머가 개발한 원자폭탄은 핵분열을 토대로 만들어졌고, 이후 오펜하이머가 줄기차게 개발을 반대했던 수소폭탄은 행융합 이론을 통해 개발되는 것도 부제와 맞닿아 흥미로운 점이다.
 
무엇보다도 영화의 가장 큰 이야기 줄기인 오펜하이머의 삶이 그렇다. 오펜하이머는 분열적이고 모순적인 삶을 살아왔다. 케임브리지 유학 시절 지도교수와의 갈등 끝에 일으켰던 독사과 사건을 부러 영화 초반에 묘사한 것도 오펜하이머의 분열적 캐릭터를 묘사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연애사에서 있어서도 그는 자신의 청혼을 거절해 헤어진 진 태틀록을 유부남이 돼서도 끊임없이 갈구하며 가정에 정착하지 못하는 불안정한 모습을 보인다.
 
그의 분열적 삶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그의 업적(혹은 업보)인 원자폭탄일 것이다. 세계 평화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만들었지만, 정작 세계 평화에 가장 위협적인 존재가 되고 만 원자폭탄은 태생 자체가 분열과 모순덩어리다. 게다가 오펜하이머는 전례없이 강력한 무기를 세상에 선보이고는, 이내 군축을 비롯해 반핵주의자로서의 활동을 벌여 나간다. 원자폭탄을 자신의 손으로 만들었으면서 수소폭탄 개발은 지속적으로 반대한다. 원자폭탄은 되고 수소폭탄은 왜 안 되는지를 묻는 청문위원의 질문에, 그는 답하지 못한다. 분열적이고 모순된 그의 언행들은 원자폭탄 이후의 행보가 회한과 속죄를 위한 것이었는지, 책임회피와 자기변명을 향한 것이었는지조차 가늠하기 어렵게 한다.
 
오펜하이머만이 분열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가 속해 있던 환경, 원자폭탄 개발을 둘러싼 과학계의 분열이나 그 시절 정치사회적 분열 양상은 사실 오펜하이머 개인의 분열적 상황보다 더 심각한 일이었다. 특히 2차세계대전 이후 소련과의 체제 경쟁과 매카시즘으로 빨려들어가 자신들이 띄운 ‘2차 대전 종식의 영웅’조차 공산주의자로 몰락시킨 미국 사회의 자기분열적 모습은, 오펜하이머를 지극히 안정적이고 정상적인 사람으로 보이게 할만큼 광란 그 자체였다. 그러니 정말 분열적인 것은 누구란 말인가.
 
그래서 이 영화는 2023년 대한민국에서 더 각별한 의미를 갖게 된다. 1953년 오펜하이머가 겪었던 마녀사냥이 노골적으로 재연되고 있는 것부터가 그러하다. 윤석열 정부 출범 뒤 한반도 주변의 고조되는 군사적 긴장 상태로 인해 핵전쟁의 위기감이 실존적으로 느껴지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분열적이고 모순된 사회적 갈등이 이성과 합리성을 마비시키며 공동체를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다는 점도, 우리에게 이 영화가 담고 있는 이야기를 지나간 역사적 사실 이상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오펜하이머는 정말로 원자폭탄 개발한 것을 후회했을까? 원자폭탄 개발 전후로 그가 보였던 분열적이고 모순적인 행동들은 그가 원자폭탄 개발을 불가피한 숙명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미 핵분열이 발견된 마당에 당시에는 오펜하이머가 아니었어도 누군가 언제고 원자폭탄을 개발하고 말았을 상황이었다. 오펜하이머 역시 나치 독일이 먼저 핵무기를 개발하면 안 된다는 사명감으로 원자폭탄 개발에 뛰어든 것이었으니까. 누군가 개발해 내게 된다면, 그는 아마도 그것이 자신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정작 오펜하이머의 문제가 자신이 이후의 상황을 통제할 수 있으리라 자신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오펜하이머는 자신만이 원자폭탄을 관리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을 것이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투하 이후 보인 오펜하이머의 모순된 행동은, 어쩌면 사실 애초 그 자신이 계획한 대로 원폭 개발로 얻은 명성과 정치적 영향력을 원자폭탄을 질서있게 관리하는 데 행사하려 했던 것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 아닐까. 허나, 트루먼과의 독대에서 그것이 그만의 착각이란 점이 우습게 확인 됐듯, 오펜하이머는 그저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자신이 만든 원자폭탄이니 자신이 주체적으로 관리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은 그의 자기 과신에서 온 오판이었을 뿐이었다.
 
온갖 수모를 겪으며, 그럼에도 적극적으로 자기 변론을 하지 않으면서 그가 참회했던 것은, 자신의 오만과 착각이 아니었을까. 영화관을 나설때, 어쩌면 오펜하우스는 프로메테우스보다 이카로스에 더 가깝지 않은가 하는 데 생각이 이르자, 마음이 마구 어지러웠다.
Posted by the12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