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끽!'에 해당되는 글 49건

  1. 2024.12.26 두터운 얼음 밑에 숨긴 감정의 소용돌이 2
  2. 2024.12.26 공정한 게임을 위하여 5
  3. 2024.09.12 창작자들에 보내는 헌사
만끽!2024. 12. 26. 14:29

앞서 안중근 의사의 거사를 소재로 삼은 다른 영화와의 차별화를 위해서도 그랬겠으나, 스크린에 걸리는 영화로서 OTT 창작물들과 차별점을 확보하기 위함인 듯 이 영화는 우선 '비주얼'에서 승부를 보려는 것이 느껴진다. 큰 화면에 그려지는 장대한 로케이션의 풍광이 극의 웅장미와 더불어 꽤 보는 맛을 준다.
 
그런데다 주인공을 맡은 게 현빈이다. 야 안중근 역에 현빈이라니 이건 좀 반칙이 아니냐 했는데, 이게 웬걸, 이동욱도 나오고 정우성도 나온다. 조우진과 박정민까지 준수한 미모를 자랑하는 걸 생각해 보면, 비주얼만으로 단숨에 대한민국 만세가 외쳐진다. 아무것도 안 하고 토끼굴 같은 데서 단체로 담배만 뻐끔뻐끔 피워 대도 독립운동가들을 막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샘솟을 정도다.
 
\비주얼만으로 승부를 봤다고 하면 감독이 억울해 할지 모르겠다. 역사적 사실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허구의 캐릭터들을 적절히 집어넣어 극의 긴장도를 유지하는 한편, 단순히 안중근 의사의 거사를 재현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전체 독립운동가들이 보인 헌신의 역사를 상징적으로 담아내기도 한다. 영리한 구성이다.
 
뮤지컬 영화였던 <영웅>이 신파와 다소 어설픈 유머코드로 모두가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을 대중화해 보려는 시도를 했다면, <하얼빈>은 극도로 그런 장치들을 절제한다. 마치 꽝꽝 얼어붙은 두만강처럼, 감정의 소용돌이를 저 아래 묻어둔 채 냉정을 두텁게 유지하며 절정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간다. 관객들에게도 좀처럼 감정의 동요를 꺼낼 틈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함에도 거사가 치러지는 절정의 순간에는 부지불식간에 불쑥 울컥하는 감정이 올라오고 만다. 뛰어난 연출과 연기력 덕분이기도 하겠으나, 그보다도 그건 아마 역사적 사실의 위대함에 기댄 감정이 아니었을까 싶다.
 
처음부터 너무 무겁고 경직된 분위기 때문이었는지 중반까지는 연기들이 좀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영웅>이 뮤지컬 보는 느낌이었다면 <하얼빈>은 연극을 보는 느낌이 컸다. 그러나 중반 이후에는 극에 몰입할 수 있었기 때문인지 몰라도 배우들의 연기에 자연스럽게 수긍할 수 있었다. 특히 고뇌하고 번뇌하는 안중근 의사를 연기한 현빈이 반짝였다. 결혼 뒤 연기 커리어의 변화를 모색해야 했을 그에게 이번 안중근 의사 역할은 뚜렷한 분기점이 될 거라 생각한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신경의 한쪽 끝에 현실 상황을 염두에 두며 보게 되기도 했다. 선인들이 어떻게 싸우며 어떻게 되살리고 어떻게 지켜온 나라인데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나. 너희가 믿는 신령이 누군지 몰라도, 의사와 열사들 영혼의 힘만으로도 천벌을 받기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Posted by the12th
만끽!2024. 12. 26. 14:25

삶의 낙을 FC서울에 의탁하다 보니 유튜브 알고리즘도 온갖 축구 콘텐츠를 밀어 올려주는데, 덕분에 넷플릭스에 '프로축구의 태동기'를 다룬 드라마가 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됐다.
 
그리하여, 2020년에 공개됐던 넷플릭스 오리지널 6부작 <잉글리시 게임>을 뒤늦게 보았다.
 
유럽의 프로 축구를 보고 누군가 "수만명의 거지들이 22명의 백만장자가 뛰는 걸 보는 스포츠"라고 평했다던데, <잉글리시 게임>은 바로 그 '백만장자'들이 처음에 어떻게 시작됐는지를 그린 드라마이다. 19세기 축구가 막 인기 스포츠로 뿌리내리기 시작하던 시기, 실존인물들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정비되지 않은 전략 전술이나 다듬어지지 않은 규칙과 같은 초기 축구의 거친 형태를 보는 재미를 준다. 불법인 상황에서 전업 축구 선수를 몰래 스카웃한다거나 다시 경쟁팀에 빼앗긴다거나 그러다 이적료를 지불한다거나, 나아가 축구 경기 관람권을 돈받고 판다거나 하는 프로스포츠의 개념이 처음 등장하는 것을 보게 되는 것도 흥미롭다.
 
초기의 현대 축구는 규칙을 제정했던 엘리트 귀족들이 주도권을 행사한 '아마추어 스포츠'였다고 한다. 귀족들은 FA를 설립해 임원을 도맡아 하며 규칙을 제개정했고, 동시에 올드이토니언스라는 팀에 참여해 경기에 뛰면서 FA컵을 독식해 왔다. 축구의 인기가 높아지자 공장 자본가들은 자신의 노동자들로 팀을 꾸려 운영하기도 했는데, 성적을 더 높이고 싶었던 다웬의 방직공장주가 멀리 스코틀랜드에서 공 좀 차던 퍼거스 수터와 지미 러브에게 별도의 돈을 주고 다웬으로 데려오면서 축구판에 파란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축구의 순수성(!)을 주창하며 돈을 위해 뛰는 선수가 있어선 안 된다고 주장했던 FA의 귀족들은, 공정성을 저해한다며 프로축구 선수의 등장을 봉쇄하려 한다. 그러자 올드이토니언스의 주장이자 에이스인 아서 키네어드가 나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좋은 음식을 먹고 여유롭게 훈련도 하고 그래서 체격도 체력도 좋다. 그러나 저 노동자들은 수십시간씩 노동으로 지친 상태에서 훈련도 제대로 못하고 먹는 것도 열악하다. 그렇다면 이런 상태에서 우리가 저들과 경쟁하는 것은, 과연 공정한가?"
 
애초에 출발선이 다를진대 다름아닌 '공정'을 내세우며 기계적인 눈 앞의 조건만 맞추려는 것은 사실상 '불공정'에 다름 아니라는 얘기다.
 
아서 키네어드도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승부에 집착하던 초반부에 그는 자기 팀의 구성원들이 FA임원이라는 점을 활용해 규칙을 유리하게 적용하며 퍼거스 수터의 다웬FC를 꺾는다. 그런데 비겁한 자신의 모습에 실망하는 아내의 표정에 가책을 느끼게 되고, 아내를 통해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한다. 그리고 우연한 기회에 노동자들이 처한 현실을 직시하면서 마침내 균형감을 갖춘 사람이 된다.
 
축구를 소재로 했으나 사실은 공정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고 또한 두 계급 사이 축구 경기 이야기를 펼쳐내고 있지만, 보편적 공정성보다 계급간의 차이와 비례적 공정의 가치가 더 강조돼야 함을 힘주어 짚는다. 그걸 <잉글리시 게임>이라는 제목으로 둘러 축구 종주국으로서의 자부심을 슬며시 과시함과 동시에, 영국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라는 점도 분명히 한다. 영리하다.
 
어느 스포츠가 그러지 않으랴만, 축구는 공정함을 지향한다. 초기의 어설펐던 규칙들이 계속 개정돼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다듬어졌던 것도 조금 더 공정한 게임을 만들어 나가는 노력의 과정이었다. VAR도 처음엔 축구의 순수성을 운운하며 저항했던 자들이 있었지만, 오심이 선수들의 공정한 노력을 훼손해선 안 된다는 원칙적인 목소리가 더 컸기에 도입됐고 지금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축구의 일부가 되었다.
 
드라마에 나온 FA는 처음엔 플레이어이자 규칙 제정자의 모순된 위상을 지니며 불공정하고 탐욕스러운 주체로 비쳐지지만, 아서 키네어드와 같은 사람의 노력으로 이내 공정한 운영자로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그 결과 축구는 엘리트 귀족들의 전유물에서 벗어나, 만인의 사랑을 받는 스포츠로 발전해 나갈 수 있게 된다. 공정성은 축구가 사랑받을 수 있는 가장 절대적인 가치다. 공정성이 훼손된다면, 그런 축구는 의미가 없다. 세상에 누가 불공정한 경기를 보고 싶어 하겠는가.
 
그런데 고개를 돌려 보니, 우리의 축구협회는 19세기 FA보다 미개하구나... 공정성이 결여된 성취가 반가울 리 없다. 축구의 정신을 뿌리째 훼손하고 있는 자들 같으니.. 정몽규와 홍명보는, 이제 그만 나가라. 쫌!
Posted by the12th
만끽!2024. 9. 12. 18:08

 

공부를 매우 잘 하지도, 운동을 잘 하지도, 노래를 잘 부르거나 춤을 잘 추지도, 잘 생기지도, 그렇다고 애들을 잘 웃기지도 못했던 내가 학교에서 친구를 사귈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학기 초 어느날 쉬는 시간에 조용히 연습장을 펴고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애들이 등 뒤에 모여들며 말을 붙였다. 그림이 마음에 들면 달라는 애들도 있었고, 자기가 원하는 그림을 그려달라는 요청도 받았다. 학기 말 방학이 되기 전 발행되는 학교신문의 네컷 만화는 공모하는 족족 내 차지였다.

 

강호에는 원래 고수가 많은 법이어서, 학년이 바뀔 때마다 그림 깨나 그리는 애들은 새로운 반에 등장하는 경쟁자를 의식하게 된다. 그냥 서로 각자의 스타일이 다르고 잘 그리는 게 다를 뿐인데도 아이들은 누구 그림이 더 죽인다는 둥 누구 그림은 어째서 별로라는 둥 품평을 했고, 당사자들은 내색은 안 했지만 그런 평가에 적잖은 내상을 입곤 했다. 그래서 의도치 않게 라이벌리로 묶였던 애들하고는 묘한 긴장관계가 생기면서 결국 썩 친해지지는 못했었다. 

 

그런 소년시절을 보냈으니, <룩백>의 시놉시스를 보고 안 보고 지나칠 수가 있었겠나. 학교 신문에 네컷 만화를 연재하던 주인공, 만화로 인정욕구를 가득 충족해 왔지만, 어느날 학교 신문에 기가막힌 수준의 풍경화를 그린 히키코모리 경쟁자의 존재를 확인, 노오오오오오력을 통해 더 잘 그리려 해 보지만 그것은 노력이 아닌 재능의 영역임을 확인하고 좌절,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자신에게 열등감을 안겨줬던 경쟁자가 오히려 자기 만화의 왕팬이라는 사실을 고백하자 무너졌던 자존감이 일시에 회복되고 두 소녀는 둘도 없는 절친이 된다... 뭐 이 정도가 이 작품의 시놉시스다. 학창시절 그림 좀 그려봤던 애들에게는 아마 적잖이 있었을 그런 에피소드들이다. 

 

이야기는 두 소녀가 따로 또 같이, 성장하는 이야기로 이어진다. 그러다가 세상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던 한 사건을 모티브로 한 충격적인 사건이 절정을 이루고, 충격에 놀랐을 사람들의 마음을 만화만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위로하고 보듬는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므로 후반부 얘기는 여기까지만. 

 

이 애니메이션은 우리나라에선 <체인소 맨>으로 유명한 후지모토 타츠키의 자전적 단편만화를 영상화한 것이다. 처음엔 그림쟁이들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작품에서 두 소녀를 통해 만화라는 매체가 그림실력과 이야기 구성 능력으로 구분된다는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걸 생각해 보면 그림보다는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라고 보는 편이 맞는 것 같다. 만화가 됐든 애니메이션이 됐든 혹은 영화가 됐든 소설이 됐든, 수단이 다를 뿐 모든 이야기를 만드는 창작자들에 대한 헌사라고나 할까.

 

후지노는 쿄모토에게 "만화를 그리는 일이 하나도 안 즐겁고 귀찮기만 하고" "하루종일 그려도 완성되지 않고" "읽기만 하는 게 낫지 직접 그릴 게 못된다"고 부정적으로 말한다. 그러자 쿄모토가 묻는다. "그럼 넌 왜 만화를 그려?" 후지노의 대답은 끝내 나오지 않았지만, 아마도 분명히 자기가 만든 이야기를 보며 즐거워하고 감동을 받고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 아니겠나. 후지노에게 처음의 쿄모토가 그랬듯이.

 

제목인 <룩백>에는 다중적 의미가 내포돼 있다. 쿄모토가 친구가 된 후지노의 뒤를 따라 세상 밖으로 나설 때의 시선이기도 하고, 후지노가 회한 속에 과거를 되돌리고 싶어하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기도 하며, 쿄모토가 마지막에 그린 네컷 만화에서 유머러스하게 친 대사이기도 하지만, 실은 만화가-창작자들이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그 뒷모슴을 의미한 것이다. 한 시간이 채 되지 않는 러닝타임 내내 그 뒷모습을 반복했던 것까지 포함해, 작가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위해 고단함 속에서도 묵묵히 제 자리에서 만화를 그리는 창작자들의 뒷 모습을, 좀 봐달라고 말 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그러니, 세상 모든 창작자들에게 경의를 보낸다. 나도 만화 그리고 싶어졌다. 

 

★★★★

Posted by the12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