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1.03.28 [영화] 청춘에 바침 2
  2. 2011.03.23 [영화] 길 잃은 '이야기'
  3. 2007.03.12 [영화] 승자와 패자 12
만끽!2011. 3. 28. 19:21


 반려자가 보고 싶다길래 흔쾌한 척(!) 따라 나서긴 했지만, 속 마음으론 "웬 된장녀 영화?" 하며 썩 내키지는 않았다. 부족할 것 없는 상류 또는 중산층 여자 아이들이 허영과 사치에 빠져 인생을 소비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한 탓이다. 겉 보기에 영화의 배경이 그랬다. 된장녀 냄새가 풀풀 나는 네 명의 여자 주인공들은 외모, 학벌, 배경에서 그닥 꿇릴 것 없는 아이들이다. 명품 신상으로 자신을 치장하고, 나이트 죽순이에, 원 나잇 스탠드로 남자를 갈아타고, 배경 부족한 남자친구를 걷어차 버리고... 하지만 그렇게 산다고 해서 그들이라고 삶이 마냥 편하고 걱정이란 게 없겠나. 퀸카급 외모로 인생 쉽게 풀려 결국 친구의 질투를 받게 된 혜지가 던지는 말처럼 말이다. "네가 나로 살아봤어?"

 화려하고 쉬운 삶은 상대적인 것이다. 내 옆의 잘난 친구와 끊임없이 비교할 때 내 삶에 만족이란 있을 수 없다. 나아가 나의 창피한 어떤 조건은 또한 월등한 누군가의 옆에서는 더욱 비참해진다. 반면, 내가 만족하지 못하는 나의 삶은 어느 누군가에게 동경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인생이라는 영화에서 주목받는 주인공이 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에 누구나 좌절하곤 하지만, 인생이라는 영화는 장르가 다양하다. 꼭 화려한 로맨스의 주인공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영화 속 주인공들은 그걸 모른다. 누구나 자신의 인생만을 사는 법이기 때문이고, 민희의 대사처럼 "20대에는 시원한 일은 없는 법"이기 때문이다. 

 <마이 미니 블랙드레스>는 '허영에 빠진 된장녀들을 주인공으로 한 트렌디한 이야기', 혹은 '여성들의 우정도 단단하다는 것을 한 번 힘 써서 보여주는 이야기'일 것이라는 예상을 가뿐히 뛰어 넘는다. 겉보기에 화려해 보일 뿐, 이들의 삶도 사실은 치열한 투쟁의 장이고 도전과 응전의 과정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들도 역경 속에서 살고 그들도 좌절하고 그들도 불행에 빠지기도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니 그래서, 다른 세계에서 사는 된장녀들의 치기 어린 고난이라서, 그만 같잖아 보이지는 않겠냐고? 그 지점에서 영화는 빛을 발한다. 영화는 주인공들의 배경에서 느껴질 법한 이질감을 제거하고 보편화해 보이는 세련된 감각을 발휘한다. 그들의 삶도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것, 그들도 우리처럼 치열한 청춘을 보내고 있다는 점으로부터 관객 일반의 공감대를 이끌어내는 데 성공한다. 영화는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삶이 힘겨운 동시대의 청춘들을 위한 성장 이야기'로 스스로 성장해 나간다. 꿈꾸고 도전하고, 곧잘 좌절하지만 툭툭 털고 다시 일어서는 것이 특권인 이 세상 모든 청춘들에 바치는 헌사로 발전한다. 

 적절한 캐스팅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성인 배우가 고등학생 역을 손발이 오그라들지 않게 무난하게 소화한 사례를 난 이 영화의 윤은혜 이전에 일찌기 본 적이 없다. 그 부분을 포함해서, 윤은혜는 불안과 혼란, '된장'과 성숙 사이에서 성장통을 앓는 유민 역을 훌륭하게 소화해 낸다. 드라마 <궁> 캐스팅 당시 안티들의 십자포화를 얻어맞았던 초짜 배우는 어느새 한 영화를 책임지고 끌고 나가는 히로인이 되었다. 그간의 노력에 박수를. 

박수로 치면 '퀸카' 혜지 역의 박한별도 못지 않게 받을 자격이 있다. 영화 속에서 그녀가 배우로 나와 하는 '발연기'만큼은 아니지만, 솔직히 그간 그녀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배우'보다는 여전히 '얼짱'이라는 타이틀이 더 적합했던 게 사실이었다. 이번엔 배역을 제대로 만났다. 캐릭터 자체가 그녀 자신이 자연스럽게 스며들 수 있어서인지 몰라도, 기대 이상의 완숙한 연기력을 선보였다. 이제 '배우' 타이틀이 부끄럽지 않게 된 거다. 부잣집 딸 민희 역의 유인나 역시, 예의 그 귀여움이 과장된 연기는 여전하지만 배역과 최적의 싱크로율을 보이며 더 없이 잘 어울렸다. 시트콤만으로는 의문 부호가 붙었던 그녀의 연기에도 이제 신뢰를 줄 수 있을 것 같다. 수진 역의 차예련은 요즘 부쩍 눈에 띄는 배우다. 안정감 있고, 무엇보다도 뭔가 있어 보이는 그녀의 캐릭터는 앞으로의 작품에 더 기대감을 갖게 만든다.

 연출도 좋았지만, 난 이 영화의 높은 완성도는 원작과 각본에 크게 기대고 있다고 생각한다. 맛깔나는 대사와 캐릭터들에 대한 섬세한 묘사, 그리고 적절한 긴장감을 유지한 알찬 구성이 특히 좋았다. 이런 소재의 이런 종류의 한국 영화에서 민망함을 느끼지 않은 채 기분 좋게 영화관을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게 도대체 얼마만인지. 한국 영화가 이렇게나 자랐나, 하는 생각도 새삼 들었다.

★★★★

calvin.
Posted by the12th
만끽!2011. 3. 23. 17:01


 <빨간 망토 소녀> 이야기는 아주 잘 알려진 이야기다. 이 고전 동화는 심플하다. 소녀가 숲속 외딴 오두막에 살고 있는 병에 걸린 할머니에게 음식을 싸들고 병문안을 갔는데 이미 할머니를 잡아먹고 할머니 행세를 하는 늑대를 물리치고 할머니를 구해내게 된다는 이야기다. 가녀린 소녀와 노쇠한 할머니, 그리고 교활하고  포악한 늑대, 어둡고 위험한 숲속, 그 곳의 외딴 오두막 집... 극단적인 조건 속에서 해피엔드의 안도감을 주는 것이 동화의 역할이다. 이야기는 심플하지만 구조가 허술하다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그건 동화고, 메시지가 분명하니까. 하지만 아이들을 위한 동화가 아니라 성인을 위한 영화라면 어떨까? 이 단순한 이야기는 얼마나 정교해질 수 있을까?

 영화 <레드 라이딩 후드>는 <빨간 망토 소녀>이야기를 모티브 삼아 그럴듯하게 만든 스릴러 미스테리물이다. 처음에 영화는  깊은 숲 속 마을에서 사람을 공격해 사람들을 흉흉하게 만드는 늑대의 존재로부터 관객들의 몰입을 끌어 당긴다. 그리고 이내 흉폭한 늑대가 사실은 평소엔 사람 모습을 하고 있는 '늑대 인간'이라는 사실로 그 몰입도를 배가시킨다. 마을 사람 모두가 용의선상에 오르면서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는 상황을 만들어 놓고 관객들도 범인을 찾는 추리에 참여시킨다.

 괜찮은 시도다. 애초에 원작 동화가 주는 메시지도 "낯선 이를 믿지 말라"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 부분을 확장해 이야기의 긴장감을 증폭시킨 것은 영화를 대단히 흥미롭게 만든다. 개리 올드만의 등장과 광기 어린 연기는, 추리극으로서의 긴장도를 높이는 데 크게 작용한다.
 
 하지만 그 뿐이다. 영화는 믿음, 사랑, 관계, 가족, 선의 한 축과 의심, 증오, 배타성, 악의 한 축을 두고 더 치밀한 심리극으로 나갈 수 있는 좋은 토대를 마련해 놓고는, 그만 하나마나 한 뻔한 스토리로 서둘러 전개되고 만다. 다양한 인물과 캐릭터들 사이에서 "누가 늑대 인간인가"라는 질문을 두고 치열한 심리전이 벌어질 수 있었고 그랬다면 훨씬 더 치밀한 구성을 확보할 수 있었을텐데, 그럴 의지나 욕심이 사실 처음부터 없었던 모양이다. 

 대신 영화는 '반전'이라기 보다는 그저 관객의 뒷통수를 때리는 정도에 불과한 결론을 선택한다. 아주 말이 안 되지는 않지만, 정교하지 못하다. 추리극을 표방했다면 더더욱 그러하다. 더 맥이 빠지는 것은 그 뒤의 이야기다. 영화는 당초에 스스로 소비되는 쪽을 겨냥한 것으로 보인다.

 그도 그럴 만 한 게, <레드 라이딩 후드>는 곳곳에서 이야기 보다는 '눈요기'로서의 역할에 힘을 쏟는다. 시각에 선명한 인상을 남기는 영상들을 요소 요소에 배치해 빼어난 '영상 화보'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사실 아만다 사이프리드의 캐스팅 자체가 사실 그런 기능을 노렸다고 볼 수 있다. 하얀 피부와 붉은 입술, 거기에 빨간 망토를 걸친 '예쁜' 아만다는 이 영화의 처음과 끝, 그리고 사실 전부라 해도, 정말이지, 과언이 아니다.  

★★★

calvin. 
Posted by the12th
만끽!2007. 3. 12. 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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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인간이 있다. 승자와 패자. 언제나 그렇게 갈리게 마련이다. 하지만 어떤 것이 진정한 승리이고 어떤 것이 결국은 패배하는 것인지는 선명하지 않다. 그것을 가르는 기준이 절대적일 수 없기 때문이다. 언뜻 보면 패배자인 이가, 사실은 궁극적인 승리자일 수 있다.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기준에 따라, 그 가름은 크게 바뀐다. 

 여기, 콩가루도 정말 완전 제대로 콩가루인 가족이 있다.  할아버지 에드윈은 약쟁이에 욕쟁이에, 주책스럽게도 성 도착적인 경향마저 보인다. 윤리적이지 못할 뿐더러 교육적이지도 못하다. 아빠 리처드는 세속적 의미에서의 성공에만 눈이 멀어 있다. 그는 자기 과신과 자기 과시에 빠져 있지만, 사실 알고 보면 3류 이론을 설파하고 다니는 3류 강사일 뿐이다. 외삼촌 프랭크는 사랑하는 '남자'를 다른 남자에게 빼앗기고 그나마 가지고 있던 학문적 자부심마저 그 남자에게 밀리고 나자 비겁하게도 스스로 자신의 손목을 그었다. 아들 드웨인은 '묵언수행'을 핑계로 세상과 소통을 단절한다. 그는 자신 이외의 가족들을 모두 후지다고 여기며 대놓고 무시하지만, 찌질하기는 그도 매한가지다.  그나마 제일 말짱한 건 엄마고, 배가 볼록 튀어 나온 일곱살 난 막내 딸 올리브는 어린이 미인 대회 우승을 꿈꾸며 산다.

 한심함에도 시너지 효과라는 게 있는 모양이다. 따로따로 따져 봐도 후지기만 할 뿐인 이들이 심지어 '가족'으로 묶여 뭔가 해보려 한다니, 정말 말도 아니다. 막내딸 올리브가 언감생심 꿈꿔 오던 어린이 미인대회 본선 출전권을 우연한 기회에 얻게 되자, 이 가족들 떼거지로 함께, 고물 미니 버스를 타고, 캘리포니아로 향한다. 이름하여 '리틀 미스 선샤인' 대회에 당도하기까지의 여정은, 이 가족 생긴 모습 그대로, 참으로 험난하기 이를 데 없다.

 여정도 여정이지만, 이들이 맞딱뜨려야 할 고난의 '본선'은 '리틀 미스 선샤인' 대회에 있었다. 오로지 딸 아이의 꿈을 이뤄주겠다는 눈물겨운 가족애만 있었을 뿐, 이 대회가 어떤 것인지 몰랐던 순박한 가족들은 이 '어린이' 미인 대회에서 '아이들'의 것이 아닌 살벌한 진짜 배기 경쟁을 마주한다. 자칫 올리브가 상처를 입을 수도 있는 상황. 가족들은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딸 아이의 마음을 걱정한 끝에 결국 아이의 뜻대로 '도전'을 허락하고, 내친김에 자신들의 스타일대로 이 어처구니 없는 대회를 통쾌하게 정면 돌파해 버린다.

 리처드가 입버릇처럼 구분하는 세상의 두 부류 사람을 놓고 봤을 때, 이들은 의심할 바 없이 패배자들이다. 후지고 구리고 한심하기 이를 데 없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에선 그런 평가에 주저하게 된다. 아이들에게 순수함을 거세하고 잔뜩 겉멋만 들게 한 속물들은 그저 그럴 듯하게 생겨먹기만 했을 뿐이다. 올리브의 가족들은 드러내놓고 한심해 보이기는 하지만 무엇이 가장 지켜야 할 가치인지는 알고 있었다. 그들은 최소한 '승리자처럼 보이지만 패배자인' 이들보다는 훨씬 승리자에 가깝다.

 입만 열면 욕에 음담 패설을 쏟아내 아이 옆에 두기엔 아무래도 위험할 것 같은 할아버지도, 정작 올리브에게만큼은 '도전'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가장 교육적인 사람이었다. 그로 인해 올리브와 가족들은 속물들에게 한 방 먹일 수 있었다. 아, 물론, 미인대회 코치로는 역시나 적절치 않긴 했지만... ^^;;

calvin.

★★★★☆
Posted by the12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