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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4.19 'Ismail Ax'가 남긴 것 10
떠듦2007. 4. 19. 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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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지니아 테크의 총기 난사 소식을 처음 접하고 미국 언론이 "용의자는 아시아계"라고 떠드는 소릴 들었을 때, 난 소리를 빽 질러댔다. "이 바보들아, 중요한 건 용의자가 누구냐가 아니라 총기 소지 문제라고!". 잊혀질만하면 툭툭 터지는 이런 총기 난사 사건은 아무나 쉽게 총기를 소지하게 하지만 않았어도 벌어지지 않는 거 아니냔 말이다. 용의자가 어떤 인간인지, 왜 그랬는지는 지엽적인 문제에 불과하다고, 난 생각했다.

 근데, 생각해 보면, 그게 글쎄 그렇지가 않다. 총기 소지의 문제야말로 오히려 따지고 보면 지엽적인 문제다. 그것은 기껏해야 "무엇"으로 사람을 죽이느냐는 문제에 한정짓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총이 없었다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까? 물론 피해자의 숫자를 줄이거나 그렇게 '손 쉽게' 대량 학살을 저지르는 걸 막을 수는 있었겠지. 하지만 만일 총이 없었다면 조승희는 한 낮에 차를 끌고 캠퍼스 곳곳을 질주하며 닥치는대로 사람을 치어 죽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총은 말하자면, 그가 일을 저지르는 데 있어 하나의 수단에 불과한 것이었을 뿐이다.

 (오해는 마시길. 총기 규제는 물론 필요하다. 총은 앞서 말했다시피 사람을 살상하는 데 직접적이고도 가장 손쉬운 수단이다. 누구나 쉽게 사람을 죽일 수 있도록 하는 물건을 규제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특히 콜럼바인 고등학교에서의 사건에서처럼 나이 어린 아이들까지도 쉽게 총에 접근해 대량 살상을 하게 되는 경우에는 그 점이 더욱 강조돼야 한다. 총기 규제는 필요하다. 문제는 이 사건의 근본 원인을 아주 쉽게 총기 소지의 자유에만 떠넘기는 점이다.)

 비극이 벌어지면 그 원인을 진단하고 앞으로의 재발을 막는 데 나서야 한다. 용의자 조승희는 말 수도 없고 친구도 없는 외톨이였다. 그는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했고 혼자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는 일도 많았다. 좋아하는 이성에게 접근하는 법도 몰랐던 그는 스토킹의 형태로 상대에 관심을 내보이다 도리어 기겁을 하는 상대로부터 거절당하기 일쑤였다. 그러다 보니 그는 우울증도 앓았다. 이쯤되면 개인적인 문제를 원인으로 몰고갈 법도 하다. 하지만 그래서야 재발 방지는 요원한 일이다. 이 어마어마한 일을 한낱 한 사람의 정신병적 행동으로 결론내릴 수는 없다. 그 정신병조차 사회가 뿌리내린 것이니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듯 우리가 조승희의 국적에 화들짝 놀라는 것은 분명 호들갑이다. 그는 8살 때 이민을 가 영어를 모국어보다 더 편하게 여기는 '미국 영주권자'이다. 미국은 다인종 다민족 국가다. 그 나라는 애초부터 이민자의 나라였고 엄밀히 말해 원래부터 미국인이었던 사람은 원주민들 뿐이다. 그러니 어디계이니, 어느 나라 국적이니 하는 것을 따지는 건 우리만의 관심사다. 미국에 한국인으로서 미안하다느니 하는 소리를 지껄이는 건 완전 오바다.

 조승희가 한국에서 미국으로 간 이민자 가정의 아이라는 점은, 미국에게 이 문제의 원인을 짚는 하나의 배경이 되어줄 뿐이다. 이 사건으로 미국은 아마도 왜 조승희가 자신들의 용광로에 녹아 들어가지 못했는지에 대해 질문을 던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민자의 아이로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차별적 대우를 받았음을 암시하는 그의 '성명서'를 적극적으로 해석하고자 한다면, 앞으로 이민자 가정의 적응을 도울 수 있는 대안이 고민돼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문제가 오롯이 미국만의 것인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조승희는 '한국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 전에도 그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여기에서 미국으로 건너갔고,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떠나 미국을 건너갈 것이기 때문이다. 조승희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은, 미국에서야 거론될 가치도 없는 이야기이지만 최소한 한국에서는 거론될 필요가 있다. 그에게 내재된 분노가 여기에서 거기로 건너감으로 인해 비롯됐을 가능성이 농후하니 말이다.

 초등학교 8살 때 뜻하지 않게 부모의 손에 이끌려 낯선 나라로 가게 된 그를 상상해 보자. 외할아버지의 말에 의하면 그는 한국에서조차 똑똑한 제 누나에 비해 걱정을 안길 정도였다. 내성적이고 소극적이었던 아이가 말조차 통하지 않고 환경도 확연히 다른 미국에 뚝 떨어졌다면 극도의 고립감을 느끼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영어를 하지 못해 바보 취급을 받고는 구석에 쭈그리고 있던 그를 짓궂은 미국 아이들은 흔히 놀림감으로 삼거나 장난의 대상으로 여겼을 것이다. 세탁소 일로 바빠 아이들을 잘 돌보지 못하는 부모는 짧은 시간 안에 아이를 바로잡으려다 보니, 대부분의 한국인 부모들이 그러하듯, 엄하게만 대했을 것이다. 점점 더 활달해지지 못하고 안으로 숨어 들어가는 그를 부모는 답답해 하며 왜 좀 더 남자다워지지 못하냐고, 더러는 꾸짖기도 했을 것이다.  

 조승희를 만든 원인은 따라서 미국에만 있지 않다. 그 일부는 여기에도 남겨져 있다. 그의 부모는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고 했다. 유난스런 얘기가 아니다. 외려 너무나도 익숙한 이민 이유다. 같은 이유로 수많은 부모들이 이민을 가거나, 혹은 아이들을 미국으로 보내버린다. 그것이 아이의 장래를 위한 것이라고 그동안 우리 부모들은 철썩같이 믿어 왔지만, 조승희는 오히려 그것이 정 반대의 결과를 가지고 올 수도 있음을 가장 비극적인 방법으로 보여주고 말았다.

 너도 나도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혹은 경쟁에서 뒤쳐지지 않기 위해 미국으로 미국으로 아이들을 보내고 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결과만을 가지고 오는지, 결국은 조승희를 만들어내지도 않았느냐는 질문을,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calvin.
Posted by the12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