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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4.05 안녕, 하이드 씨 10
얄라리얄라2007. 4. 5.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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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 탓인가, 긴장감이 떨어졌나, 자제력이 부족해졌나 모르겠지만 (사실은 그 모든 것이 이유일것이다..;;) 최근 들어 술을 마시고 필름 끊기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 아침에 눈 뜬 자리는 분명 우리 집 내 방 침대 위인데 거기까지 어찌 무사히 들어오게 됐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거나, 술자리에서 오고갔던 이야기들이 드문드문 기억나지 않는다거나 하는 식이다. 내가 했던 행위와 내가 했던 말이 기억에 남아 있질 않으면 보통 난감하고 불안한 게 아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도 왜 했는지 알 수 없는 어떤 기괴한 행동들을 하지나 않았나, 쉬운 말로 '술자리 실수'를 한 게 아닌가 싶어서다. 아침에 출근하니 여직원이 따귀를 때린다거나, 지갑 속에서 카드명세표가 수두룩하게 쏟아진다거나 하는 어떤 숙취 해소용 음료 광고에서처럼 말이다.

 이전에는 술을 마시면 몸이 먼저 못 견뎌 하면서 꾸벅꾸벅 졸기부터 했는데, 이제 몸은 외려 펄펄 나는데 정신이 감당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몇 차례 술자리에서 정신을 놓고 나면 끊어진 기억의 줄을 잇기 위해, 듬성 듬성 빈 기억의 퍼즐을 꿰 맞추기 위해 애 쓴다. 그 노력의 지향점은 내가 실수를 했는지 안 했는지 여부다. 특히 성추행같은 파렴치한 짓을 했는지, 욕지거리 같은 폭력적인 짓을 했는지, 추태같은 면구스런 짓을 했는지 등이다. 한 마디로 사회적으로 매장당할만한 짓을 했는지를 살핀다.

 가령, 자못 정색을 하고 정말 자기 기억에는 없는 일이었노라고 '주장'하는 최연희 씨의 경우처럼 성추행과 같은 행동도 결국은 술에 취해 기억의 연속성이 끊어지면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시간이 흐르고 나이를 먹음에 따라 정신 세계에는 악성코드도 생기고 바이러스도 기생하기 시작하고, 자아는 수없이 분열된다. 또한 술버릇의 패턴은 비교적 일정한 편이기도 하지만, 어느 계기 어느 시점에서는 전환점을 갖기도 하고 변주하는 법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제까지 그러지 않았다고 해서 앞으로도 그러지 말라는 법은 절대(!) 없다. 자신의 평소 일관된 술버릇은 과신하지 않는 편이 좋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그런 짓을 하지 않은 것 같다. 술이 깬 다음 날 사람들이 나를 슬금슬금 회피하지 않는 것을 보면 말이다. 또 몇 차례, 전날 상황을 복기해본 결과 오히려 난 술에 취하지 않은냥 말짱한 척을 하며 주변 사람들을 챙기고 더러는 집에 가는 차를 잡아 태워 보내는 '초인적인' 짓까지 서슴지 않았던 모양이다. 전날 상황을 물으면 오히려 "너 취했었어?"라고 되묻는 사람도 있어주니, 정말정말 다행스러운 일이다.

 재밌는 점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듯, 이성의 끈을 놓았다 해서 무의식이 무방비로 표출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마음 속에 아무도 모르게 꽁꽁 숨겨놓은 이야기를, 술에 취했다 해서 늘어놓지는 않는 모양이다. 술에 취해 내가 했다는 말을 전해(!) 들어보면, 어떤 얘기들은 외려 깊숙한 곳의 나와는 너무 맞지 않아서 당황스러울 때가 있다. 내가 숨기고 있는 나는 사실 겉으로 치장한 것과 달리 굉장히 지저분한 인간이고, 의식이 없는 가운데 행여 그게 드러날까 싶어 필름 끊기는 일을 두려워 하는 것인데, 술에 취한 나는 그렇게 숨겨진 내가 드러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마치 하이드 씨가 튀어나오는 것 처럼 말이다. 술에 취해 이성을 잃을 때의 나는 숨겨진 자아의 일부가 아니라, 나도 모르는 전혀 별개의 자아인 듯 하다. 그는 속물이 되어 버린 나와는 달리 이상을 이야기하고 지향점을 추스르고 강한 주장을 편다. 꽁하고 안으로 숨어 기어들어가고 싶어하는 나와 달리 활달하고 적극적이고 사람들을 좋아한다. 술에 정신을 잃을 때마다 나타나 주는 나의 하이드 씨는, 내 걱정과는 전혀 달리 사실은 꽤 괜찮은 사람인 것 같다.

 하이드 씨는 내가 되고 싶어했던 나, 내가 아직 다다르지 못한 나인지 모른다. 이성을 잠시 내려놓는 일로 무의식을 알아챌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아직도 나는 꿈을 꾸고 싶은 모양이다.

calvin.
Posted by the12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