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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브리파크가 다카하타 이사오를 너무 소홀히 다룬 거 아니냐는 아쉬움을 가지던 차에, 세종문화회관에서 그의 전시회가 열린다 하여 냉큼 가 보고 왔다.
사실 나는 지브리 애니메이션에서도 다카하타 이사오의 작품들을 더 좋아했다. <반딧불의 묘> <헤이세이 너구리 대작전 폼포코> <추억은 방울방울> <이웃집 야마다군> <가구야공주 이야기> 등 그의 연출작은 미야자키 하야오 작품들처럼 엣지 있는 매력이 있진 않았어도, 두고두고 곱씹게 되는 묵직한 여운이 배어 있는 걸작들이다.
이번 전시에서 다카하타 이사오가 어린 시절 프랑스 애니메이션 <왕과 새>를 보고 애니메이션이 '사상'을 담을 수 있다는 점에 충격을 받아 애니메이션계에 뛰어들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실제로 그의 작품들에는 묵직한 '사상'적 경향이 그러나 결코 과하지 않게 잘 녹아들어 있다. 우리나라 일각에선 일본을 전쟁 피해국으로 그렸다는 반감을 사기도 했던 <반딧불의 묘>도 사실은 지배계급이 벌인 전쟁으로 희생하게 되는 것은 노동자 서민 계급이라는 점을 지적한 작품이고, 친환경주의를 주제로 삼은 것 처럼 보인 <헤이세이 너구리대작전 폼포코>도 실은 좌절하고 만 적군파 혁명을 우화적으로 풀어낸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개인적으로는 한참 애니메이션 만드는 것을 진로로 생각할 때 봤던 <추억은 방울방울>에서, 극단적으로 사실적인 묘사에 충격받은 적이 있었다. 자동차 문을 여닫을 때 유리에 비춘 외부 풍경까지 그림으로 묘사한 것을 보며, 아니 뭐 애니메이션인데 이렇게까지 그려넣냐, 하며 질려 했었던 것이다. 스토리 전개에 큰 영향을 주는 장면도 아닌데 영화를 찍듯 묘사한 이 장면에서 혀를 내두르며 여러번 영상을 돌려봤던 기억이 난다.
이번 전시에서도 <추억은 방울방울> 파트에서 다카하타 이사오의 완벽주의에 대한 설명이 있다. '추억' 시절과 '현재'의 캐릭터들을 달리 그려넣으며 현대 일본인의 얼굴을 반영하고자 캐릭터 디자인 연구를 했다는 부분도 매우 흥미로운 내용이었다. 이 나이 쯤 되니 이제는 그저 경이로움을 넘어 그 과정에서 애니메이터들이 숱하게 갈려나갔었겠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하기사 콘도 요시후미가 요절한 것도 그런 이유였겠지.
다카하타 이사오를 이야기 하자면 지브리 이전 TV애니메이션 시절도 빼놓을 수 없다. <프란다스의 개><엄마 찾아 삼만리><빨강머리 앤>과 같은 어린 시절 보았던 명작 애니메이션들 말이다. 최근 넷플릭스에 <빨강머리 앤>과 <플란다스의 개>가 새로이 업로드 돼 <빨강머리 앤>을 다시금 보고 있는데, 돈과 시간이 제한된 TV애니메이션 제작 환경에서 효율적이면서도 필요한 묘사를 놓치지 않고 해내는 장면 장면들에서 탄복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다카하타 이사오는 작품에만 자신의 사회주의적 사상을 담으려 한 게 아니었다. 미야자키 하야오와 스튜디오지브리를 만들면서 새로운 애니메이션 제작 환경을 조성하고자 했던 것도 기존의 작품 제작 과정에서 발생하던 일방적 주종관계의 부당함을 혁파하고 여러 구성원들과 '함께' 만들어나가는 공동체적 제작 시스템을 세우기 위해서였다. 전체 제작 구성원들이 스스로 자기 역할 속에서 제작 주체가 될 수 있도록 정보를 공유하고 유기적인 시스템을 구축했던 이야기도 이번 전시에서 만나볼 수 있다.
얼마 전 보았던 김민기 다큐의 잔상 때문이었는지, 다카하타 이사오도 김민기와 비슷한 사람으로 보였다. 사람들의 '선의'와 그것이 모일 때 발생하는 힘을 믿었고, 그를 바탕으로 기존 제작 시스템의 불합리를 혁파한 제작 환경을 구축하였으며, 자기 자신보다는 조합과 같은 그 공동체를 앞세웠던 면이 그래 보였다. 자신의 사상을 다른 이들에게 강요하는 대신, 조용히 자신의 삶에서 구현해 보려고 했달까?
그리고 또 한 가지. 두 사람 모두 미디어가 미래 세대에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에 집중했다. 김민기가 아동극에 천착했던 이유는, 다카하타 이사오가 애니메이션이라는 매체에 뼈를 묻었던 이유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꿈 꾸는 새로운 세상, 더 좋은 세상은 사실은 미래 세대에 의해 비로소 현실화 될 것이므로.
전시는 8월 3일까지. 어린 시절 즐겨 보았던 '만화영화'들의 콘티를 만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추억이 방울 방울(!)해질 것이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