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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4.06.14 보이지 않는다. 보려 하지 않는다.
  2. 2024.06.14 다카하타 이사오의 꿈 2
  3. 2024.06.14 아름다운 그 이름, 사람이어라 1
만끽!2024. 6. 14. 18:20

 
 
 회스 중령 부인의 친정 어머니가 회스 저택을 방문했던 날, 딸의 안내를 받으며 집을 둘러보다 예쁘게 가꿔진 정원에 이르러 그녀는 탄복을 한다. "낙원이 따로 없구나!" 하지만 며칠 지내는 동안 집 바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눈치를 챈 그녀는 딸에게 고작 쪽지 한 장 남긴채 황급히 야반도주를 하고 만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소장이었던 루돌프 회스의 가족이 수용소 담장 너머에 마련한 사택에서 지내는 모습을 담담히(!) 담은 영화다. 당시 아우슈비츠와 그 일대를 일컬었던 이름을 영화 제목으로 가져다 썼다고 한다.
 
 영어 제목을 한국말로 그대로 가져다 쓰면 종종 발생하는 일인데, 난 처음엔 이게 'John of interest'인 줄 알았다. 이 정도로 헷갈릴 정도면 적당히 '관심 구역' 같은 한국말 제목으로 번역했어도 됐을텐데, 아마도 그러지 않은 이유는 'the zone of interest'의 의미를 정확히 옮기기 어려웠기 때문일테다. interest를 어떻게 번역하느냐에 따라 영화의 제목도 중의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회스 부인의 어머니가 "낙원"이라고 감탄했듯, 회스 가족의 사택은 더할나위 없이 완벽하다. 일곱 식구가 살기에 적당히 크고 깔끔한 집, 여러가지 꽃과 나무로 잘 가꾸어진 정원, 아이들이 놀기 좋은 수영장도 있고, 가까운 곳에는 소풍 나가기 좋은 숲과 강도 있다. 거기에 시중을 드는 하인들까지 있으니 낙원이 따로 없을 수밖에. 날씨까지 눈부시게 좋아서 관객들 입장에서도, 시각적으로 보는 즐거움이 있다. 낙천적 감성이 물씬대는 멋진 그림을 보는 것도 같다. 그야말로 누구나 꿈꿔봤을 완벽한 거주 환경이다. 소음만 없다면.
 
 그렇다. 소음이 문제다. 영화에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풍경과는 이질적인 소음이 지속적으로 나온다. 그래서 눈은 평화롭고 평온한 회스 가족의 일상을 따라가고 있는데, 귀에 들리는 소리로 인해 신경은 자꾸만 그 소음의 정체를 쫓게 된다. 소음이 신경 쓰이다 괴롭고 슬퍼지다 이내 우울해진다. 눈에 보이는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서 더욱 더.
 
 이 영화에서는 끔찍한 장면은 단 한차례도 나오지 않는다. 집 저편에 높은 담벼락으로 가려져 있어 회스 가족들이 그렇듯, 관객들은 저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을 볼 수 없다. 다만 지속적인 소음이 관객의 역사적 상식과 상상력을 거치며 보는 것 이상의 끔찍한 경험을 준다. 이 영화는 아마도 시청각종합예술인 영화라는 매체의 장점을 가장 잘 활용한 작품으로 영화사에 기록될 것이다.
 
 이 영화의 플롯에 비밀이 있는 건 아니다. 루돌프 회스라는 실존인물을 다뤘듯, 이미 우리가 다 알고 있는 역사의 이야기니까. 소음의 정체는 누구나 처음부터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은 우리보다 그것을 더 잘 알고 있다. 다만 보려하지 않을 뿐이다.
 
 끔찍한 것은 회스의 어린 아이들도 모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아이들이 알고 있다는 것을, 회스 부부는 알고 있었을까?
 
 그리고 가장 끔찍했던 것은, 회스 부인의 어머니가 줄행랑 쳤을만큼 최악의 환경인데도, 회스 부부가 이 사택에 집착한다는 점이다. 죄없는 사람들을 학살함으로써 만들어진 행복임을 알면서도, 자신의 이익, 자신의 편익, 자신의 안온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 그걸 지켜내고자 한다. 자신들만 행복하면 타인의 불행과 고통은 외면할 수 있다는 듯이.
 
 그래서 어느 순간, 이 영화는 홀로코스트라는 역사적 사실을 되뇌이는 것이라기 보다, 우리의 오늘을 되짚어 보게 만드는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나의 행복을 위해 어쩌면 알고 있을 저 너머의 불행한 진실을 애써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지. 누가 어떤 고통과 괴로움을 겪는다 해도, 그것을 통해 나와 내 가족만 행복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러하다면, 그런 우리는 저 소름끼치는 회스 부부와 무엇이 다른지 말이다.
 
 그리고 영화를 보면서 두 나라가 떠올랐다. <오펜하이머>에조차 발작적 반응을 보였던 일본과, 피해자였던 시절을 잊고 절멸의 가해자가 되고 있는 이스라엘. 우리의 반성과 다른 결에서, 그들도 이 영화를 보며 반성 좀 하길.■
 
Posted by the12th
얄라리얄라2024. 6. 14. 13:52

 

브리파크가 다카하타 이사오를 너무 소홀히 다룬 거 아니냐는 아쉬움을 가지던 차에, 세종문화회관에서 그의 전시회가 열린다 하여 냉큼 가 보고 왔다.

 

사실 나는 지브리 애니메이션에서도 다카하타 이사오의 작품들을 더 좋아했다. <반딧불의 묘> <헤이세이 너구리 대작전 폼포코> <추억은 방울방울> <이웃집 야마다군> <가구야공주 이야기> 등 그의 연출작은 미야자키 하야오 작품들처럼 엣지 있는 매력이 있진 않았어도, 두고두고 곱씹게 되는 묵직한 여운이 배어 있는 걸작들이다.

 

이번 전시에서 다카하타 이사오가 어린 시절 프랑스 애니메이션 <왕과 새>를 보고 애니메이션이 '사상'을 담을 수 있다는 점에 충격을 받아 애니메이션계에 뛰어들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실제로 그의 작품들에는 묵직한 '사상'적 경향이 그러나 결코 과하지 않게 잘 녹아들어 있다. 우리나라 일각에선 일본을 전쟁 피해국으로 그렸다는 반감을 사기도 했던 <반딧불의 묘>도 사실은 지배계급이 벌인 전쟁으로 희생하게 되는 것은 노동자 서민 계급이라는 점을 지적한 작품이고, 친환경주의를 주제로 삼은 것 처럼 보인 <헤이세이 너구리대작전 폼포코>도 실은 좌절하고 만 적군파 혁명을 우화적으로 풀어낸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개인적으로는 한참 애니메이션 만드는 것을 진로로 생각할 때 봤던 <추억은 방울방울>에서, 극단적으로 사실적인 묘사에 충격받은 적이 있었다. 자동차 문을 여닫을 때 유리에 비춘 외부 풍경까지 그림으로 묘사한 것을 보며, 아니 뭐 애니메이션인데 이렇게까지 그려넣냐, 하며 질려 했었던 것이다. 스토리 전개에 큰 영향을 주는 장면도 아닌데 영화를 찍듯 묘사한 이 장면에서 혀를 내두르며 여러번 영상을 돌려봤던 기억이 난다.

 

이번 전시에서도 <추억은 방울방울> 파트에서 다카하타 이사오의 완벽주의에 대한 설명이 있다. '추억' 시절과 '현재'의 캐릭터들을 달리 그려넣으며 현대 일본인의 얼굴을 반영하고자 캐릭터 디자인 연구를 했다는 부분도 매우 흥미로운 내용이었다. 이 나이 쯤 되니 이제는 그저 경이로움을 넘어 그 과정에서 애니메이터들이 숱하게 갈려나갔었겠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하기사 콘도 요시후미가 요절한 것도 그런 이유였겠지.

 

다카하타 이사오를 이야기 하자면 지브리 이전 TV애니메이션 시절도 빼놓을 수 없다. <프란다스의 개><엄마 찾아 삼만리><빨강머리 앤>과 같은 어린 시절 보았던 명작 애니메이션들 말이다. 최근 넷플릭스에 <빨강머리 앤>과 <플란다스의 개>가 새로이 업로드 돼 <빨강머리 앤>을 다시금 보고 있는데, 돈과 시간이 제한된 TV애니메이션 제작 환경에서 효율적이면서도 필요한 묘사를 놓치지 않고 해내는 장면 장면들에서 탄복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다카하타 이사오는 작품에만 자신의 사회주의적 사상을 담으려 한 게 아니었다. 미야자키 하야오와 스튜디오지브리를 만들면서 새로운 애니메이션 제작 환경을 조성하고자 했던 것도 기존의 작품 제작 과정에서 발생하던 일방적 주종관계의 부당함을 혁파하고 여러 구성원들과 '함께' 만들어나가는 공동체적 제작 시스템을 세우기 위해서였다. 전체 제작 구성원들이 스스로 자기 역할 속에서 제작 주체가 될 수 있도록 정보를 공유하고 유기적인 시스템을 구축했던 이야기도 이번 전시에서 만나볼 수 있다.

 

얼마 전 보았던 김민기 다큐의 잔상 때문이었는지, 다카하타 이사오도 김민기와 비슷한 사람으로 보였다. 사람들의 '선의'와 그것이 모일 때 발생하는 힘을 믿었고, 그를 바탕으로 기존 제작 시스템의 불합리를 혁파한 제작 환경을 구축하였으며, 자기 자신보다는 조합과 같은 그 공동체를 앞세웠던 면이 그래 보였다. 자신의 사상을 다른 이들에게 강요하는 대신, 조용히 자신의 삶에서 구현해 보려고 했달까?

 

그리고 또 한 가지. 두 사람 모두 미디어가 미래 세대에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에 집중했다. 김민기가 아동극에 천착했던 이유는, 다카하타 이사오가 애니메이션이라는 매체에 뼈를 묻었던 이유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꿈 꾸는 새로운 세상, 더 좋은 세상은 사실은 미래 세대에 의해 비로소 현실화 될 것이므로.

 

전시는 8월 3일까지. 어린 시절 즐겨 보았던 '만화영화'들의 콘티를 만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추억이 방울 방울(!)해질 것이다. ㅎ

Posted by the12th
만끽!2024. 6. 14. 13:48

여러 사람들이 극찬을 한 다큐멘터리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를 뒤늦게 보았다.
 
 김민기와 동세대가 아니었던 내가 그를 알게 된 것은 또래들보다 조금 이른 고 1때였다. 고작 한 살 위였지만 상당히 조숙했던 한 학년 선배들로부터 '작은 연못'이라는 노래를 배우면서 부터다. 학생회+동아리 직속 선배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떴던 그 해 가을 어느 날, 장례식장에서 그 선배들이 모여 나직이 불렀던 '친구'도 기억에 새겨져 있다. 고 3때였던가 서울음반에서 나왓던 그의 앨범 네 장을 한꺼번에 사서 한 장 씩 돌려 가며 거실 전축에 돌렸던 일요일 오후 의 풍경도 기억난다. 내가 사서 들었던 앨범들에 별 관심을 두지 않으셨던 부모님도 '가을편지'나 '늙은 군인의 노래' 같은 노래가 흘러 나올 땐 같이 흥얼거리시던 것도 잊지 못할 추억이다.
 
 하지만 학전 이후 김민기에 대해서는 별다른 기억이 없다. 아마도 내가 뮤지컬이나 연극 류에 별 관심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크게 흥행했다는 '지하철 1호선'도 존재를 인지는 했으나 단 한 번도 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으니 말이다.
 
 김민기가 아닌 학전에 대한 나의 기억은 김광석 콘서트로 남아 있다. 1000회 공연을 기념하는 시즌의 공연에 한 번 어렵사리 티켓을 구해 그 좁고 아늑한 소극장에 들어갔었는데, 그 즈음 좋아하는 노래 공연을 곧잘 찾아 다녔지만 비교가 되지 않을만큼 좋았던 경험에 감복을 하고, 다음 공연 시즌에도 꼭 와서 들어야지, 라고 다짐을 했었지만 이듬해 겨울 그가 불귀의 객이 되면서 다시금 학전을 찾을 일은 없어지고 말았다
 
 학전과 학전 시절의 김민기에 대한 기억이 그랬으니, 학전이 문을 닫는다는 소식도 내겐 무덤덤한 일이었다. 그저 영원불멸한 것은 없는 법이니 시절이 흘러 효용이 사라진 것들이 하나씩 없어지는 일이야 으레 있는 거 아니냐는 관점으로나 바라보고 있었다.
 
 다큐를 통해 그 생각이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하지만 내 관심 밖이었던 '학전 시절 김민기'를 정리해 줌으로써 자칫하면 모르고 지나갔을 그 시기 김민기라는 사람의 의미를 알게 된 것은 큰 소득이었다. 어렴풋하게나마 그가 노래를 떠나 노래극으로 이동한 것의 의미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노래를 만들어 부르는 일은 오롯이 그 자신이 개인으로 할 수 있는 일이고 스포트라이트도 그 자신이 받는 일이지만, 노래극을 만드는 일은 공동체와 함께 할 수 있는 일이며 그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빛낼 수 있는 일이라는 점에서 그를 사로잡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노래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을 보였지만, 그는 거창하지만 막연하고 손에 잡히지 않을 변화보다 오히려 자그마할지언정 실질적이고 구체적이며 그로 인해 궁극적일 변화를 모색하려 한 게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다큐를 통해 만난 김민기는 묘하게 역시 감동적인 다큐로 알게 된 김장하 선생을 떠올리게 했는데, 두 사람 모두 나서지 않고, 묵묵히 뒤에서 사람들을 도우며, 극도로 낮은 자세를 견지하는 모습이 꽤 닮았다. 괜한 겸양이나 위선이 아니라, 실제로 본인이 드러나는 것에 극단적으로 거부감을 가질 정도인 점도 똑같다. 순도 높은 자기객관화가 이루어지면 사람이 저렇게 되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현실세계에 성인(聖人)이 있다면, 아마도 이런 사람들이지 않을까.
 
 아무래도 방송물이라는 속성 때문에 어떤 부분은 좀 과하게 건너뛴다거나 이야기가 되게끔 끼워맞춘다거나 하는 바람에 정확한 사실관계와 맞지 않는 부분도 더러 있긴 하지만, 모처럼 마음을 울리는 좋은 다큐멘터리였다. 장르를 불문하고 좋은 콘텐츠란 거대한 자본이 들어간다거나 대단한 깨우침을 주는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남겨주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공장에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다큐멘터리를 내놓은 게 언제였나 싶기도 하다. 여러모로 나 자신과 주변을 돌아보게 만드는 수작이었다. 경의를 보낸다.
Posted by the12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