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개월 여의 기다림 끝에, 지브리파크를 다녀 왔다.
지브리파크는 스튜디오지브리의 작품들 속에 들어가 보는 판타지를 제공해 준다. 어트랙션이라곤 회전목마 뿐인데(BGM마저 '인생의 회전목마') 그 조차도 지브리 애니메이션 속 탈 것들을 체험케 해준다는 의미가 강하다. 가오나시 옆 기차 자리에 앉아 볼 수도 있고, 포르코와 주먹다짐을 해볼 수 있으며, 아리에티처럼 소인이 될 수도 있다. 너구리들의 작전회의에 동참해 볼 수 있고, 포뇨와 물고기 파도를 타 볼 수 있으며, 고양이 버스를 타 볼 수 있는가 하면, 지로가 먹던 시베리아 카스테라를 사 먹어 볼 수도 있다. 유바바의 사무실이나 고양이 탐정사무소도 구경할 수 있다. 하울의 성 안에 들어가 휘저어 돌아다녀볼 수 있고, 키키와 아야의 집을 방문할 수 있으며, '지구옥'에 들러서 발코니 바람을 쐬거나 괘종시계의 실제 퍼포먼스를 볼 수도 있다.
상당수의 공간들이 사진 촬영 금지 구역이다. 너무너무 사진을 찍고 싶게 만들어놓고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한다니, 고약한 변태 취향이라 여겨질 정도다. 하지만 덕분에, 사진을 찍었더라면 어쩌면 쉽게 지나쳤을 것들을 하나하나 꾹꾹 눌러 눈에 담을 수 있게 되기도 한다. 소중한 풍경들을 눈에 담으려다 보니 숨어있는 장치들도 발견하게 되고 작은 소품들도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사진을 못 찍게 하는 건 그런 의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뭐, 인간의 기억력이 제한적이란 점을 이용해 재방문을 유도하려는 전략일 수도 있겠지만. ㅋ
사진을 찍을 수 없는 대신 맘껏 만져볼 수 있다. 각종 소품들을 손대 볼 수 있고 가구의 서랍이며 냉장고 문을 열어볼 수 있다. 그 안에조차 깨알같은 소품들로 채워져 있다. 열어보고 만져보고 건드려보면서 시각적 재미 못지 않은 촉각의 즐거움이 생긴다. 공간의 체험을 제공해준다는 점이 훌륭해 보였다.
세앙이는 특히 마법의 공간들에 오래 머물렀다. 너저분하지만 환상적인 하울의 방에서 각종 마법 소품들을 넋을 잃고 봤고, 아야네 집에서도 기괴하고 역겨우면서도 재미있는 것들이 가득한 마녀 작업실에 빠져들었다.
개인적으로는 '마녀의 계곡' 내에서 키키가 일했던 빵집에서부터 시작하는 동선이 마음에 들었다. 빵집 뒷마당으로 나가 계단을 올라가면 키키가 거주하던 방이 나오는데, 그 방을 구경하고 나와 옆 복도로 쭉 걸어 나오면 마법 책만 취급하는 서점이 나오고 그 서점을 나와서 계단을 내려 오면 소피가 살던 동네의 풍광과 함께 소피의 모자 상점이 나타난다. 모자 상점에서는 물론, 작품에 나온 화려한 모자들을 팔기도 한다.
하루에 모든 구역을 돌아볼 것이라던 계획은 애저녁에 불가능한 미션이었다. 물리적 거리가 멀기도 했지만, 공간이며 소품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다 보니 7시간으로는 턱도 없었다. 줄 서서 기다리는 시간도 만만치 않았고. 모노노케 마을은 애초에 제끼기로 했었지만, 지브리파크 개장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꼭 가보겠다고 다짐하게 만들었던 가장 큰 요소인 사츠키와 메이의 집을 보지 못한 것은 너무너무 안타까웠다. (아마도) 지브리파크 측의 의도대로, 재방문을 계획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지브리파크는 스튜디오지브리의 후계자로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던 미야자키 고로의 쓸모를 발견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생각보다도 훨씬 잘 만들어내었다. 다만, 사실상 망작이었던 <게드전기>나 <아야와 마녀> 같이 자신의 연출작은 충실히 반영했으면서, 정작 스튜디오의 양대 축이었던 다카하타 이사오의 주옥같은 작품들은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뤄진 것 같아 그 점이 못내 아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