얄라리얄라2012. 1. 3. 09:52


쓰나미가 인도네시아 푸켓을 할퀴고 지나갔던 2004년 말, 난 사회팀에서 까라면 까는막내 기자 노릇을 하고 있었다. 나라 밖에서 벌어진 일이었던 까닭에 사회팀에선 그다지 바쁠 일이 없었는데, 생존자들이 돌아오게 되면서 나도 분주해졌다. 생존자들의 귀국은 그들의 근황과 안녕을 전하는 일이기도 했지만, 쓰나미가 덮쳐오던 실감나는 상황을 전해들을 수 있는 기회이자, 그들이 디지털카메라나 캠코더로 찍은 생생한 그림을 확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돌아오는 날, 난 다른 여러 동료들과 함께 인천 공항에 전진 배치되었다.


공항은 아예 기자들에 의해
점령돼 있었다. 하지만 기자로 인산인해를 이뤄도 상관없는 공항 로비와 달리, 검색대 너머 공항 CIQ는 출입이 제한돼 있었다. 그 많은 기자들이 그 많은 장비를 이끌고 공간이 넉넉지 못한 CIQ를 점령할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기자단은 풀(pool)을 꾸리기로 했다. 한 팀이 촬영한 그림과 인터뷰를 모든 방송사가 같이 나눠 갖는 식이다. 공항 출입기자들끼리 인력 조정을 논의한 끝에 다른 회사의 촬영기자 선배와 함께, 내가 CIQ에 들어가기로 결정이 됐다.
 

우리의 임무는 푸켓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돌아온 부상자의 촬영과 인터뷰였다. 푸켓발 비행기가 도착하고, 우리는 비행기 트랩 바로 앞에 진을 치며 부상자를 기다렸다. 비행기 문이 열리자,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한 여성 승객이 기내 담요를 뒤집어 쓴 채 침대에 실려 나왔다. 상태가 많이 좋지 못했던지, 그녀는 그대로 구급차를 타고 병원으로 보내질 계획이었다.


물벼락의 지옥 속에서 사투를 벌인 끝에 살아돌아온 그녀에게
, 촬영기자는 일단 카메라를 들이밀었다. 담요로 얼굴을 가리고 있으니 찍는 걸 알 수도 없을테고, 더욱이 초상권 운운할 일도 없으니 사전 양해를 구하는 일은 가볍게 생략되고 말았다. 그림이 어느정도 확보되자 내가 제 역할을 할 차례였다. 난 마이크를 바짝 갖다대고 묻기 시작했다.


쓰나미 당시 상황이 어땠죠?”
……
뭘 보셨어요?”
……
기억나시는 거 있으면 얘기 좀 해주세요.”
……
정신이 드셨을 때 어떤 상황이었나요?”


방송사들 대표로 취재하고 있었으니 책임감이 더 컸던 것인지도 모른다
. 난 이렇게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이 여인이 인터뷰에 응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고 느꼈음에도, 자못 매몰차게 그녀를 몰아부쳤다. 수차례 몰인정한 질문 끝에, 결국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으니까 제발 그만 좀 물어보세요


동시에 그만 펑펑 터져 버린 그녀의 울음소리
. 난 순간 마치 뭔가에 뒷통수를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나서야 생각했다. ‘내가 대관절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 하고.


이런 종류의 경험은 나 혼자만에 국한되지 않는다
. 어떤 후배는 경찰의 안내로 어떤 사건의 피의자 집 앞까지 찾아갔다가, 피의자의 아무 죄 없는 딸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고는 영혼이 조금씩 깎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노라고 고백한 적이 있다. 또 다른 후배는 성범죄를 당하고 무참히 살해당한 한 소녀의 집에 찾아가 초인종을 누르며 부모에게 인터뷰를 청했다가 모진 꼴을 당하기도 했다.


방송 기자들에게
인간에 대한 예의취재 능력을 인정받고 싶은 유혹사이에서 갈등하는 일은 드문 일이 아니다. 입사 초기 방송은 그림이고 방송은 살아있는 녹취라고 교육받으면서, 취재 대상에 대한 배려보다 생생한 취재의 결과물에 집착하게 되는 까닭이다. 사실, 어느 정도 연차가 쌓이고 나면 인간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좋은 취재력을 보일 수 있다는 점을 알게 되지만, 매일 결과물에 의해 깨지고 혼나는 수습 시절에 그런 걸 알려주는 이는 별로 없다.


갈등의 끝에서 스스로를 다독이는 전가의 보도는
국민의 알 권리이다. 내가 하는 일이 결국엔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한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취재 과정에서의 일부 부도덕한 일은 용서받을 수 있는 일이라고 자위하는 것이다.


이번 천안함 침몰 사고에서도
, 난 불편한 화면을 마주한다. 비통함 속에서도 찍지 말라는 뜻으로 카메라를 향해 손사래를 치는 실종자 가족들의 모습까지 고스란히 방송되고 있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과연 어떤 시청자가 이런 장면까지 보고 싶어하는 것일까. 우리는 사실 실체도 없는 시청자들의 알 권리를 핑계 삼아 자신들의 직업의식을 채우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만에 하나, 그것을 요구하는 시청자가 있다손 치더라도, 방송에 의해 훼손당하는 이들의 인권에 비하면 그것은 도리어 알량한 알 권리여야 하는 게 아닐까.


언론중재위원회NEWS <언론 사람> 2010. 4

Posted by the12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