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끽!2018. 5. 27. 21:54


최근 화제작인 <레디 플레이어 원>을 어제 저녁에 봤는데, 공교롭게도 그에 앞서 낮에는 다큐멘터리 <미야자키하야오의 끝나지 않은 이야기>를 보게 됐다.


- 회사 엘리베이터를 탔다가 거기 디스플레이에 온에어 되고 있는 <세상의 모든 다큐>에서 방영되는 걸 흘깃 보고는 "미야자키 선생 다큐가 다 있네?" 하고 나중에 챙겨봐야겠다 생각했는데 저작권 문제로 다시보기 서비스는 하질 않았다. 알고 보니 NHK가 제작한 <끝나지 않는 사람 미야자키 하야오>를 번역해 내보낸 다큐였던 모양이더라. 인터넷을 검색하니 무려 NHK 버전을 자막까지 입힌 풀버전이 뜨길래 그걸로 봤다.


- 다큐는 2013년 (두 번째) 은퇴선언 이후 미야자키 하야오를 쫓아가는 이야기다. 제작진은 분명, 장편 애니메이션 제작에 체력적 한계를 느끼고 스튜디오 지브리를 정리한 이 거장이 여생을 어찌 보내려나, 하는 호기심에 팔로우업을 시작했을거다. 그런데 돌연 이 양반이 단편애니메이션을, 그것도 CG로 만들고자 하면서 이야기는 의외성을 확보하게 된다. 우리가 이미 알다시피, 결국 미야자키 선생은 또(!!!) 은퇴를 번복하고 장편애니메이션을 만들기로 결심하면서, 다큐는 애초 의도와 달리 '스펙터클'하게 전개된다.


- CG애니메이션이 대세가 된 이후에도 미야자키 선생은 고집스럽게 손그림 애니메이션을 제작해온 '옛날사람'이다. 그런데 스스로 체력적 문제를 느낀 터라, 여생의 소일거리 정도로 시작한 <털벌레 보로>를 CG의 도움을 받아 만들어볼 생각을 한다. 그렇게 참여하게 된 CG 애니메이터들은 기술을 신봉하고 매우 의욕적이며 자신감이 넘친다. 무엇보다도 젊다. 무수히 많은 털의 움직임도 바람의 저항값을 근거로 자연스럽게 움직이도록 '계산'되어 표현되기 때문에 CG 애니메이션은 일일이 그리는 것보다 훨씬 과학적이고 화려하다. 미야자키 선생이 고집한 전통이나 옛스러움은 그 자신의 '늙음'과 더불어 젊은 기술 앞에서 초라하게 보일 것만 같았다.


- 그런데 아니었다. 컴퓨터 그래픽의 완성도 높은 기술이 담아내지 못하는 것, 그러니까 계산되지 않는 '생명' 그 자체가 오히려 본질이었다. 보로가 알에서 처음 태어났을 때 보이는 움직임은, 갓 태어나 어딘지 모르게 낯설고 두려운 움직임이어야 한다. 왼쪽 한 번 보고 오른 쪽 한 번 보는 건 '어른의 움직임'이라고 미야자키 선생은 지적한다. 아무리 완성도 높은 기술이라도 짚어내지 못하는 것을, 이 노회한 거장 애니메이터는 정확히 포착해 낸다. 마치 그게 바로 '통찰력'이라는 듯.


- AI를 활용한 애니메이션 제작을 연구하는 기술진에게 미야자키 선생이 일갈하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애니메이션에는 기술 뿐 아니라 인본주의와 생명 중심의 '철학'이 바탕이 돼야 한다는 말씀. 결국 중요한 건 사람이 하는 거다. 그 지적의 울림이 상당히 마음에 깊이 새겨진다.


- CG와 경쟁을 하듯 원화를 그려대던 미야자키 선생은, 다큐 끝 무렵에 이 작업을 아예 장편으로 확대하기로 결정한다. 체력적 문제는? 그리다 죽어도 할 수 없는 거라고 한다. 그렇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그러나, 또한 그렇기 때문에 작업에 특별한 가치가 부여되는 것이기도 하지. 인간의 유한함은, 기술에 비해 열등한 것이라기 보다, 도리어 기술보다 특별한 존재로 만들어주는 가치가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고 나니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다.


- 미야자키 선생은 정말 큰 스승이시다. 오래 오래 건필하시길. 좋은 작품 많이 많이 만들어주시길. 좋은 생각 많이 많이 전해 주시길....


calvin.

Posted by the12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