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끽!2018. 5. 27. 21:57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을 봤다. 무료로 볼 수 있는 쿠폰이 있어서 2D로 보려다가 누군가 이건 꼭 아이맥스 3D로 봐야 한다고 그래서, 용산 가서 봤다. 


- 시간적 배경은 2049년, VR 기술을 통한 고도화된 환상적인 가상현실 게임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한 최첨단-미래 지향-유토피아적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더니, 이거 완전 1960-70년대 생 '오타쿠 아재'들을 위한 영화잖아. 애들은 가라, 이거 우리 영화다. ㅋㅋ


- 1980~90년대 비디오게임과 헐리웃과 저패니메이션과 팝송에 통달한 오타쿠일 수록 영화의 잔재미를 느끼기 좋게 만들어 놨다. 난 그 흔한 아타리 게임에 빠진 적도 없고 그닥 오타쿠적인 "그런 삶을 살아 오지 않았"지만, 그런 나조차도 반가운 미소를 머금고 재미를 느끼는 장면들이 넘쳤다. 가령 가네다 바이크나 빽투더퓨처의 드로리안같은 탈것이 나올 때나, 에이리언이나 터미네이터2의 장면들이 패러디될 때, 처키나 건담같은 익숙하고 친숙한 캐릭터들이 나올 때, 나도 흥얼거리는 비지스의 노래가 흘러나올 때, 아, 그리고 <샤이닝>...! 그 호텔과 쌍둥이 자매와 욕조 속의 여성과 도끼질, 도끼질, 도끼질!!!


- 그만큼 자라면서 꼭 오타쿠가 아니더라도 아재들은 자연스럽게 팝컬쳐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던거다. 전후 풍요의 시대 속에서 태어나 그야말로 쏟아지는 대중문화의 비를 맞으면서 자란 세대였으니 말이다. 그 속에서 성장스토리를 썼고 그 자신이 하나의 시대적 상징이 되었던 스티븐 스필버그가 이런 이야기를 담은 원작소설에 매료될 수밖에 없었던 것 역시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고.


- 스필버그는 첨단 기술을 소재로 화려한 그래픽을 앞세운 이 영화를 통해 미래를 그리는 게 아니라, 아이러니하게도 추억을 더듬는다. 핼러데이가 자신의 추억 여행으로 설계한 이스터에그 찾기 게임부터가 그러하다. 스티브잡스가 아이폰이라는 첨단 기술의 집약체를 내놓으면서 아날로그적 감수성을 잔뜩 품은 스큐어모피즘을 강조했던 것을 닮았다. 마치 지금의 세대에게 "너네가 지금 뻑 가는 새로운 기술들 있지? 그거 다 옛날 우리 시절에 이런 게 있었기에 가능한 거야"라고 뻐기는 것도 같다.


- 게다가 이 영화의 플롯을 보라. 80년대에 스필버그 자신이 만들어 왔던 각종 모험담의 뻔한 플롯을 고답적으로 반복하고 있다. 그건 흔한 비디오 게임 플롯같기도 하다. 주인공이 있고, 이뤄야 할 목표가 있으며, 방해하는 악인이 있고 마지막엔 뻔하디 뻔한 교훈도 남긴다. 오아시스는 혼자 독점하면 안 된다고?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 게임을 만들었지만, 사실 진짜 삶은 진짜 현실 속에 있다고? 하나마나한 소릴 교훈이랍시며 제시하는 것도, 스필버그 옹 답다. 한결같아 반가웠다. ㅎ


- 영화에 앞서 CG 애니메이션 시대에 고군분투하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다큐를 봤어서 그런지, 과거를 주워 섬기는 이 영화의 노력이 더욱 눈에 밟힌 것 같다. 말하자면, 옛것의 소중함을 잊지 말라. 온고지신. oldies but goodies 와 같은 이야기. 자꾸 추억에 잠기고 과거를 되짚는 것에 공감하게 되는 걸 보니, 영락없는 꼰대가 다 되었나 보다. 아놔. ㅋㅋㅋ


- "콘텐츠의 미래는 게임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을 적이 있다. 내가 주인공이 되어 스토리를 만들어나가는 것만한 몰입도 높은 콘텐츠는 없다는 얘기다. 이 영화가 딱 그렇다. 스토리를 쫓아 주인공과 함께 추억을 되짚어가며 핼러데이가 남긴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는 재미도 있지만, 결정적인 건 영화 스토리와 관련없는 데 있다. 바로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숨겨진 8-90년대 캐릭터들과 각종 팝컬쳐 레퍼런스들을 찾아내는 것, 이거야말로 오아시스와 마찬가지로, 영화 속에서 수많은 '이스터에그'를 찾아나가는 한 편의 게임이다.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은 관객들로 하여금 게임을 하게 만들었다는 것일테다. 훌륭하다.


calvin.

Posted by the12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