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끽!2023. 9. 18. 17:07

모처럼 반려자랑 영화관에 가서 영화 <잠>을 보았다.
(최대한 피하려고 했으나 스포가 있을 수도 있겠다)
 
생각해 보니 나도 내 수면중 무호흡이 고약하다는 사실을 결혼 뒤 반려자를 통해 알게 됐었다. 청소년기 때부터 잠을 혼자 자게 됐기 때문에 내 잠버릇을 알게 되는 게 불가능했으니, 옆에서 누군가 잠자리에 함께 하고 나서야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러니 잠에 빠져 코도 골고 이도 갈고 침도 질질 흘리는 나의 가장 원초적인 못볼 꼴을 죄다 보게 되는 배우자는, 내게 얼마나 가까운 사람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배우자는 엄밀히 말하자면 남이다. 가족 구성원 가운데 유일하게 나와 DNA로 얽히지 않은, 생물학적으로 타인이다. 닮은 구석도 없고 성격이며 MBTI도 다르고, (사람마다 지속 기간의 차이가 있기야 하겠지만) 한 때 사랑했던 마음으로 결혼이라는 제도에 묶이는 바람에 가족이 되었을 뿐이다. 어찌 보면 이런 남에게 나의 가장 무방비 상태인 잠에 빠진 모습을 그대로 노출하는 셈이니 그 자체로 배우자는 나의 목숨줄을 내맡기게 되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니 피 한방울 안 섞인 타인이지만 가장 가까운 사이다 못해 나의 안전을 온전히 맡겨야 하는 상대인 배우자에게 가장 중요한 조건은 무엇이 되겠나? 신뢰다. 신뢰가 없으면 부부 관계가 유지될 수 없다. 신뢰가 없는 부부 살이는 온갖 의심이 도화선이 돼 악몽에 공포 호러물이 따로 없게 될 것이다.
 
<잠>은 몽유병에 걸린 배우자가 이상행동을 보이며 완전한 타인이 되어 나와 가족의 안전을 위협할 때 어떻게 할 것인가,로부터 상상력을 확장해 부부간 신뢰의 문제를 곱씹어 보게 만들어주는 수작이다. 짧은 시간, 제한된 공간, 그리고 단조로운 소재를 가지고도 매우 풍성한 이야기거리를 만들어 냈다.
 
사실 남편 현수(이선균)가 보이는 이상행동의 원인은 수면클리닉에서 명쾌하게(!) 진단했 듯 단순하다. 몽유병이다. 적절한 진단과 처방을 받고 치료하면 된다. 그런데 아내 수진(정유미)의 믿음에 이내 균열이 생긴다. 수면 중 이상행동이 생각보다도 지나치다 보니 남편을 밤새 감시해야 했던 아내가 이번엔 스스로 불면증에 빠지면서 정신이 혼미해진 거다. 정신이 흔들리며 남편과 과학(의학)을 향한 믿음에 균열이 발생하자 그 틈을 무속 신앙이 파고 들면서, 부부 간의 신뢰는 무너지고 서로 다른 것을 믿는 양상으로 치닫는다.
 
서로를 믿지 못하게 될 때 부부 사이의 갈등은 해결하기 쉽지 않다. 서로 다른 가정, 서로 다른 교육, 서로 다른 문화적 환경에서 성인이 될 때까지 성장한 두 사람이 사회적 제도에 의해 부부가 됐다 하여 매사에 같은 사고와 감정을 공유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게다가 부부는 동급이라 수평적 위치에서 각자의 신념을 바탕으로 논박을 하기 때문에 조정도 어렵다. 부부 싸움을 달리 칼로 물 베기라 하겠나.
 
서로 다른 믿음을 갖게 된 부부는 돌아오지 못한 강을 건넌 것처럼 대립한다. 그 와중에 수진은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를 들고 와 계속해서 믿으라고 강요한다. 현수에게는 선택지가 없다. 믿지 못하면 남는 것은 파국일 뿐이다.
 
서로를 믿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필요한 것은 ‘믿어주는 것’이다. 사실 실제로 믿는지 안 믿는지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니다. 서로를 믿어 주기로 하는 것, 그리고 내가 믿고 있다고 배우자가 믿게끔 해주는 것이야말로 부부 사이에선 더 중요한 것인지 모른다.
 
내게 이 영화의 마무리는 그렇게 읽혔다. 서로를 믿기로 하자 둘은 다시 경계심 없는 단잠에 빠진다. "둘이 함께라면 극복 못할 문제는 없다"는 듯이.
Posted by the12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