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끽!2023. 10. 27. 08:39

미야자키 하야오 선생의 은퇴번복작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보았다.

미야자키 선생의 영화이니 반드시 보긴 보았겠으나, 아마도 제목이 영어 제목처럼 <소년과 왜가리> 이런 식으로 나왔었다면 개봉 당일부터 부랴부랴 찾아가 보지는 않았을 거 같다. 그만큼 내게는 이 제목이 강렬했다. 요즘 부쩍 꽂혀있는 화두라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미야자키 선생이 혼란한 내 마음에 영감 한 방울 떨궈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나의 발걸음을 평일 퇴근길에 영화관에까지 이르게 하였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 제목은 일본의 학자 요시노 겐자부로의 동명 소설(혹은 청소년 인생지침서?!)에서 가져온 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 본인이 소년 시절 어머님의 권유로 읽고 큰 감명과 영감을 받은 책이라고 하는데, 그렇다고 이 책이 영화의 원작인 것은 또 아니다. 제목과 미야자키 본인이 받은 영감, 그리고 이 책을 만났던 본인 이야기를 모티브로 삼아 만든 미야자키 선생의 오리지널 스토리인 건데, 책과의 연결성이 가깝다고도 또 멀다고도 할 수 없다. 책이 준 영감이 작품 제작의 단초가 되었다고 하니 아마도 요시노 겐자부로의 책을 읽으면 보다 더 영화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기는 할 것이다.

책도 책이지만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좀 더 잘 보려면 미야자키 하야오가 만들어온 그간의 작품들을 다 섭렵해 두는 편이 더 필요하다. 이 영화는 '미야자키 유니버스'를 집대성했다 할만큼, 그간 미야자키 하야오가 만들어온 작품들의 흔적들이 아주 두텁게 칠해져 있는 작품이다. 어디선가 본 듯한 장면, 어디선가 만난 듯한 풍경이 눈에 자꾸 밟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가령 파도가 넘실대는 장면은 <벼랑 끝의 포뇨>를, 하늘에 떠 있는 돌은 <천공의 성 라퓨타>를, 귀여운 와라와라는 여지없이 마쿠로구로스케나 코다마를 연상시킨다. 주인공 마히토는 <바람이 분다>의 지로를, 그가 모험에 돌입하는 과정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꼭 닮았다. 마히토와 히미가 함께 위기를 헤쳐나가는 장면들은 <미래소년코난>과 <천공의성 라퓨타> 등에서 숱하게 보였던 소년소녀 모험물이고 마히토가 큰할아버지를 만나는 정원은 다름아닌 <붉은돼지>에서 지나의 정원이다. 그 밖에도 미야자키 선생은 영화 곳곳에 전작의 상징적 장면들과 은유를 덧대고 또 덧댄다. 때문에 미야자키 하야오 세계를 아는만큼 이 영화를 더 풍족하게 즐길 수 있다.

이 영화가 난해하다는 인상을 받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싶다. 혹은 미야자키 하야오가 거장이 되고 국제 영화제에서 작품성을 인정받으면서, 이해되지 않는 장면마다에 무언가 의미를 심어놓았다는 의심(?)을 받게 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미야자키 유니버스'는 원래부터, 현실 세계의 눈으로는 개연성이 없으나 풍부한 상상력만 있다면 환상적인 이야기들이 가득찬 곳이었다. 뜯어보고 따지기보다 그냥 선생이 펼쳐놓은 무한한 상상의 세계에 몸을 내맡기면 그것만큼 재미있는 게 없는 곳이다.

그렇게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미야자키 하야오 자신이 만들어 온 세계를 정리하고 종합하고 또한 극대화한 작품이다. 여전히 신나는 모험이 있고 여지없이 환상적이고 몽환적이면서도, 그 이면에는 여실히 실사와 컴퓨터그래픽이 닿을 수 없는 고집스러움과 치열함도 엿보인다. 이 정도라면 나이 여든이 넘은 노애니메이터가 은퇴를 번복할 만 한 이유가 충분하다.

영화의 말미에 마히토는 선택의 기로에 선다. 막강한 권한을 가질 수 있는 저 세계에 머무를지, 혼란하고 악의가 가득한 이 세계로 돌아갈지. 마히토는 후자를 선택한다. 그가 선택하는 이유가 성장하는 소년 답다. 그 숱한 어려움들을 혼자 힘으로 이겨내지 못하면 친구들과 함께 이겨내겠단다. 요시노 겐자부로의 책에서 주요한 내용 중 하나가 친구들과의 다툼을 어떻게 극복할지에 대해 서술한 부분이라고 하는데, 영화 초중반부에 마히토가 학교 친구들과 갈등을 빚었던 장면들을 되짚어보면, 마지막에 그가 직접 목소리를 내는 '친구론'이 이 영화가 거의 유일하게 직접 드러내는 주제 의식이라 할 수 있다.

혼탁하고 어지럽고 앞이 잘 가늠되지 않는 세상이지만, 그러함에도 극복하고 이겨내야 한다, 혼자 하려 하지 말고, 주변의 여러 친구들과 함께, 그러니까 말하자면 '연대의 힘'으로 헤쳐나가야 한다는 말씀 되시겠다. 나도 그렇게 살 것이라 마음 먹는다.

역시, 미야자키 선생을 서둘러 알현하길 잘 했다.

Posted by the12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