얄라리얄라2007. 11. 3. 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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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은 England의 발음인 [잉글랜드]를 자기네 말로 표현하기 힘들었던 중국인들이 제 방식으로 만든 이름이다. 강세가 찍힌 '잉' 발음에 가장 가까운 중국어인 英과 나라를 뜻하는 國을 합쳐 조합한 것이었고 같은 한자 문화권인 우리가 그대로 가져와 입때껏 사용하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영국'이라 일컫는 나라는 사실 애초 그 이름이 한정하고 있는 '잉글랜드'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잉글랜드를 비롯해 네 지역이 포함된 연방 국가인 이 나라의 공식 국호는 the United Kingdom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라고 한다니, 우리 식대로 바꿔 부르자면 '대 브리튼과 북 아일랜드 연합 왕국'쯤이 될 것이다. 가장 일반적으로 쓰이는 약칭 United Kingdom으로 불러 준다 하더라도 '연합 왕국'이 이 나라를 일컫는 가장 정확한 국호가 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이 나라는 우리가 쓰는 '영국'이라는 이름만으로는 좀체 그려지지 않는 나라다. 영국은 '영국'이라고 부르기에는, 그 지명이 가리키는 범주 면에서나 지나온 역사 면에서 훨씬 더 큰 나라이기 때문이다. 억지로 갖다 붙여진 "꽃부리 나라"라는 의미 역시, 미국을 "아름다운 나라"로 뜻 삼는 것만큼이나 부적합하다.
 
 영국으로 여행을 떠나면서 난, " 영국에 간다"는 말이 담는 그릇이 너무나도 비좁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나를 비롯해 대한민국의 모든 학생들에게 살아남기 위한 필수적 조건으로서의 언어를 가장 먼저 사용한 나라, 오늘날 전 지구를 가혹한 정글의 법칙으로 내몬 자본주의 체제를 태동해 발전시키고 확립시킨 나라, 제국주의를 앞세워 식민지 쟁탈전을 유행시키고 그로 인해 세계에서 가장 많은 식민지를 거느리며 힘없는 나라들을 수탈했던 나라, 아직도 왕이 군림하고 심지어 한 때 공화제 혁명을 성공시키고도 공화정을 포기하고 다시 왕을 불러 들여 떠받든 나라, 두 번의 세계 대전에서 승리하면서 세계 체제의 헤게모니를 계속해서 쥐고 있는 나라, 제국주의가 공식적으로 폐기된 뒤에는 더벅머리 네 청년들의 음악으로 세계를 평정하고 이제는 오각과 육각 모양의 천을 기워 만든 공으로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나라...  이런 나라를 어떻게 '영국'이라는 가벼운 이름으로 단박에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일찌기 홍세화 씨는 "세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럼 런던의 템즈강은 무엇을 가를까? 영국은 어떤 곳이고 영국인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이 나라는 무엇으로부터 움직이나? 무엇이 이 작은 섬 나라가 감히 세계를 뒤흔들 수 있도록 만들었을까?

 여행을 하는 동안 내내 내 머릿 속에 맴돌던 질문은 그런 것이었다. 비록 짧은 1주일동안 고작 세 개의 도시를 돌아보는 일정이었기에 많은 답을 구할 수는 없었지만, 책상 머리에 앉아서 영국에 대해 쓴 책들을 읽어대는 것보다는 훨씬 더 그 나라를 알아 나가는 데 도움이 되는 기회였다.
 
 프리미어 리그와 비틀즈, 오아시스로 대변되는 '친근함'과 억압-수탈 그리고 제국의 역사가 주는 '거부감'을 동시에 주는 이 나라에서 7일 동안 살면서, 난 템즈강이 신분을 가른다고 생각했다. 왕과 귀족 평민을 가르고, 자본가와 노동자를 나누고, 빈부 차이를 뚜렷이 하며, 영국인과 외국인을 구분한다고 봤다. 런던에서 신세를 졌던 완기 형 역시 5년간의 영국 생활 속에서 일상 속의 제국주의가 여전함을 체감하고 있다고 귀띔해 주었다.

 템즈강은 또한 아주 느리게 흐르고 있었다. 왕을 유지시키고 신분의 구분을 여전히 안고 있는 데서도 드러나듯이 이 나라는 역동적인 변화를 추구하지 않은 채 지나온 것들을 지키는 데 힘을 쏟고 있었다. 그것은 내게 전통을 귀하게 여기는 것임과 동시에 영광스러웠던 과거에 집착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산업혁명 시기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이었던 나라가 다름아닌 영국이었음을 생각해 보면, 오늘날의 모습은 흡사 화려했던 지난 시절을 그리워하며 골동품을 애지중지 껴안고 사는 노인네의 품새다.

 음악과 축구로 대변되는 영국의 문화는 체제를 공고히 해주는 기제이기도 하다. 노동 계급 소년의 dream comes true 스토리를 다룬 뮤지컬에서조차 자본의 뛰어난 먹성은 또렷이 확인됐다. 주말에 축구 경기 하나에 목을 매며 1주일 동안의 스트레스와 근심걱정을 날리는 남녀노소를 막론한 영국 사람들을 보면서 스포츠가 우민화 정책의 하나라는 점을 재확인할 수도 있었다.  7일 동안만으로도 온몸으로 충분히 체험할 수 있었던 '살인 물가'는, 이 나라가 가혹하게 편제한 질서 속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삶이 버거운 나라임을 느끼게 해주었다.

 영국은 큰 나라였다. 역사가 찬란했던만큼 볼 것도 많았고 즐길 것도 많았다. 입이 떡 벌어지게 오래되고 웅장한 건물들과 동상들, 세계 최고의 축구 리그는 즐겁고 또 부러웠으며, 비틀즈의 과거를 되짚어 볼 수 있는 경험도 영광스러웠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난 우리 나라가 영국과 같지 않아서 좋았다. 작은 보폭이나마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해 왔고 또 지향해 나가고 있다는 점이 다행스러웠다. 옛것을 무지막지하게 폐기처분해 온 것은 영국과 견주어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것은 또한 그만큼 부단한 변화의 욕구가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돌아와서 바라본 한강은 템즈강보다 훨씬 컸다. 물이 더 깨끗한지 경관이 더 좋은지는 모르겠지만, 크기 차이가 나는만큼 최소한 더 빠르게 흐르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calvin.
Posted by the12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