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일담'에 해당되는 글 6건

  1. 2013.07.30 납량 특집-손전등만 비춰지던 학교 그 복도
  2. 2013.07.16 위험의 도급 관계
  3. 2009.11.06 작별인사 2
후일담2013. 7. 30. 15:51




 시간제 근로자의 열악한 처우를 취재하다 사례로 학교 당직 기사를 취재하게 됐다. 야간에 학교에 남아서 경비서는 사람들이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밤, 취재를 시작했다. 사연을 듣고 인터뷰 하고 일하는 모습을 촬영하기 위해 컴컴해진 복도를 손전등 하나 들고 지나갈 때였다. 웬 여자아이 두세명이 재잘재잘 수다를 떠는 소리가 잠깐 들리다 만다. 촬영기자가 당직기사 어르신께 물었다. "아직 교실에 남아있는 학생들이 있는가 봐요?" 어르신이 말씀하신다. "그럴리가 없는데... 방금 복도 출입구 자물쇠를 열고 들어오지 않았소.." 헉... 우리는 순간 얼어붙었다. 그 여자아이들 소리는, 그 복도를 처음 지나간 나와, 촬영기자와, 오디오맨만 들었다. 어르신은 듣지 못했다 하신다. 분명, 그 복도 교실은 모두 어두컴컴하고 누가 있을 거 같지 않았는데 말이다. 학교에는, 정말, 실제로, 진실로, 리얼리, 솔까, 귀신이 있는 걸까.............????


학교 야간 당직기사는 교사들을 대신해 학교를 지키는 일이다. 교사들의 숙직 업무만 도맡아 한다고 보면 된다. 교사들이 숙직을 꺼려 하고 여교사가 많아지면서 더 꺼려하고, 교사들의 숙직 수당이 높다 보니 만들어낸 직종이다. 모두가 학교를 떠나는 오후 6시부터 다음날 9시까지 오롯이 홀로 학교를 지킨다. 그런데 근무 시간은 6시간만 인정받는단다. 학교에 있다고 하여 그 시간동안 내내 경비를 서는 것이 아니고 잠도 자고 쉬기도 하니 그 시간은 빼고 6시간의 근로에 대해서만 시간당 임금을 지급한단다. 


 나도 회사에서 야근을 서 보지만, 야근하는 동안 항상 일만 하지는 않는다. 텔레비전도 보고, 정 힘들면 잠시 엎어져 눈도 붙인다. 하지만 그 시간까지 포함해 모두가 근무 시간이다. 쉬는 시간과 일 하는 시간을 계량적으로 구분 지을 수도 없거니와, 구분짓겠다는 시도 역시 어처구니 없는 짓이다. 야간 뿐이랴. 주간 근무 때에도 쉬며 일하며 한다. 그렇지만 그 시간을 모두 일 하는 시간으로 포함해 돈을 받는다. 회사에 있기 때문이다. 자고로 직장 내에서 온전한 휴식이란 있을 수 없는 거 아닌가.


 학교 야간 당직기사들은 교사와 학생들이 없는 모든 시간에는 학교를 지켜야 한다. 가령 금요일 저녁부터 놀토와 일요일까지 지나 월요일 아침까지는 꼼짝 없이 학교에서 시간을 보내야 하는거다. 골 때리는 건 연휴 기간이다. 명절 연휴 때 역시 마찬가지로 학교에서 보내야 한다. 명절은 가족들이 모이는 때인데, 이 분들에겐 아무도 없는 학교에 홀로 묶여 연금생활을 해야 하는 시간이다. 월급이라도 많이 받으면 보상이라도 되지. 이 분들이 받는 월급은 78만 원이 고작이다.


 이런 일도 하겠다고 줄을 섰기 때문에 이런 배짱을 부리는 것일테다. 하지만 이건 노동의 수요와 공급의 차원으로 바라볼 일이 아니다. 노동의 최소한의 존엄성, 이런 건 이른바 문명 사회라면 지켜주어야 하는 게 아니냐. 학교의 귀신보다도 더 무서운 건, 가난하고 힘없고 늙은 노동자들을 학교 지키는 바둑이 정도로 취급하는 우리 사회가 아닌가 싶더라. 오싹하다.


calv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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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일담2013. 7. 16. 16:27



 서울시가 마련한 노량진 수몰 참사 현장 브리핑 장소는 이미 아수라장이었다. 한쪽에서는 구조작업이 한창이었고, 저쪽 편에서는 현장 취재를 하는 사회부 기자들이 분주히 움직이는가 하면, 머리 위로는 구조 헬기가 선회하고 있어 여간 소란스러운 게 아니었다.컨테이너 건물 안이 더 위험할 수 있다며 현장 마당에서 엉거주춤 브리핑이 시작되었다.


 브리핑 장소에는 서울시상수도사업본부 책임자와 시공사 현장소장, 그리고 감리사 관계자 세명이 나와 있었다. 먼저 발주처인 서울시상수도사업본부 관계자는 이미 준비해온 원고를 읽어내려가듯 사고 개요와 사망자 및 실종자 가족에 대한 유감 표명의 멘트를 쳤다. 이미 알려진 팩트를 나열하는 가운데, 자기네는 시공사에 이미 안전 점검을 지시한 바 있다고 강조하며 은근슬쩍 책임을 면해보려는 뉘앙스를 흘렸다. 준비된 멘트가 끝나자 기자들의 질의응답이 이어졌는데, 첫 질문부터 서울시 상수도사업본부 관계자는 현장 소장에게 마이크를 넘기고 뒤로 빠졌다.


 기자들의 날선 질문들은 현장소장을 몰아부쳤다. 현장소장이 첫 질문을 받으며 "잘못을 시인한 바 없다"고 부러 강조한 것이 기자들을 자극했다. 이 자리에서 기필코 그로부터 "제 잘못입니다"라는 자백을 받아내기라도 할 듯이 기자들은 야멸차게 그를 추궁하고 들었다. 사실 관계 확인부터 윤리적 책임까지 현행범을 붙잡고 여론재판을 벌이는 듯한 분위기였다. 일부 기자들은 정말 한줌의 자비심도 없이 코너로 코너로 그를 몰았다.


 그건 어쩌면 기자라는 직업의 속성이다. 사실의 냉정한 전달자이기도 하지만, 일반 국민을 대신해 이 자리에 나온 것인만큼, 국민들의 격앙된 여론을 대신한다 할 수도 있을 터였다. 혹은 다소 오지랖이 넓기도 할테지만, '제 4부'라는 권위를 이용해 유가족을 대신해 그들로부터 진정어린 사과와 책임있는 모습을 이끌어내려는 의도일 수도 있을 거였다.


 그런데 의도치 않은 일은 그렇게 기자들이 국민과 유가족 또는 실종자가족을 대신해 현장소장을 넉다운 직전까지 몰아부치고 있을 때 벌어졌다. 옆에서 브리핑을 듣던 유가족들이 격분하기 시작한 거였다. 그들은 그동안 기자들의 수고로움(?)이 무색해지게도 "아침 일찍부터 와 있던 우리한테는 어떻게 된 건지 한 마디 설명도 안 하더니 기자들 앞에서 브리핑을 하고 앉아 있냐? 기자들이 그렇게 대단하냐? 마이크 치워라! 우리한테 먼저 브리핑을 해야 하는 거아니냐?"며 항변하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브리핑은 그 상태로 끝나고 말았다.


 시청 출입을 겸하고 있어 참석한 브리핑이었지만, 내 눈에 밟힌 것은 먹이사슬 관계였다. 발주처는 책임에서 쏙 빠지고 현장소장에게 기자들의 공격을 넘긴다. 현장소장은 두루뭉술 답변을 하면서 은연중에 자기는 작업 중단 지시를 내렸는데 아래로 전달이 되지 않은 거 같다며 또 발을 뺀다. 그 자리에는 없었지만 전해듣자하니 하청업체는 또한 자기네는 그런 지시 들은 바가 없다고 했다고 한다. 그러니 그런 작업중단 지시가 있었다 한들 이 다단계 먹이사슬 구조의 가장 아래에 있는 현장 일용직 노동자들에게까지 전달됐을리 만무하다.


 아니, 그 말의 전달 사고가 꼭히 아니더라도, 위험을 예방하기 위한 프로세스는 최대한 간결한게 우선이다. 공사가 하청에 하청에 하청을 주는 구조라면 애저녁에 그 구조 스스로 위험을 예방하는 기능을 잃었다고 보는 게 옳다. 복잡하고 여러 단계를 거치는 조치는 더 이상 신속한 조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올해 유난히 잦았던 산업재해들의 또다른 데자뷰를 보는 거 같았다.


calvin.

Posted by the12th
후일담2009. 11. 6. 12:26


 장례식이 치러졌던 5월 29일에, 난 사회팀으로 파견됐다. 국민장 특집 뉴스에 사회팀 일손이 많이 필요했던데다, 반면 이런 특집 뉴스의 경우 경제팀에선 딱히 할 일이란 게 없기 때문이다. 난 이례적으로 차출을 반겼다. 경제팀 농식품 부문을 맡은 까닭에, 노짱 서거 정국에서 기자로서 별다른 기능을 하지 못했던 것이 내심 마음에 걸려있던 참이었다. 개인적으로야 그의 삶을 마음에 새기고 그의 죽음이 지닌 뜻을 기렸지만, 기자된 입장에서도 무언가 자취를 남기고 싶었다. 국민장 특집 뉴스에서의 사회팀 파견은, 나로선 직업적으로 그를 추억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내게 할당된 아이템은 '시민 분향소 7일의 정리'였다. 굳이 촬영하러 나갈 일도 없었다. 국민장 기간동안 덕수궁 앞에서 찍어온 무수한 테이프들이 이미 있었기 때문이다. 그 자료들을 꼼꼼이 새겨 보고 녹취를 정리하고 잘 구성하고 편집하면 될 일이었다. 난 한 박스 되는 테이프들을 순서대로 챙겨서 편집실에 틀어박혀 부지런히 그림들을 스캐닝했다.

 테이프에는 말로만 듣던 시민들의 취재 거부 현장도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카메라를 내려놓은채 마이크를 켜 놓아 현장을 담아낸 그 촬영본에선, 차분한 어조로 왜 취재거부를 할 수밖에 없는지 설명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남아 있었다. 그들은 흥분하지 않았고 이성을 잃지도 않았다. 오히려 지나치게 이성적으로 취재를 거부하고 있었다. 그쯤 되면, 도저히 그들의 의사를 거스른채 취재하는 게 불가능한 일이다. 현장의 기자가 느꼈을 곤혹스러움과 자괴감은, 그 장면을 뒤늦게 바라보는 내게도 고스란히 전달됐다. 

 시민 분향소의 7일을 함축적으로, 그러면서도 의미있게 담아내는 것이 내 목적이었다. 의미있는 녹취를 추리고 영상을 구성했다. 첫 문장이었던 "낮에는 국화가, 밤에는 촛불이"는, 시민분향소에 있던 시민들이 썼던 그 문구였다. 그 외에 그 현장을 함축적으로 표현할 길은 없었다. 그리고 노짱의 삶과 죽음이 살아남은 자들에게 남긴 의미를 담아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나서 서로를 돕는 모습은 고인이 꿈꾸던 세상을 닮았습니다"라고 시민분향소를 평가했다. 말 그대로의 "깨어있는 시민의 자발적 참여"에 고인은 지하에서라도 바라보고 흐뭇해 했을지 모를 일이다.

 사실 나 역시 덕수궁 앞 분향소를 다녀와 봐 느껴봤지만, 현장의 감정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분노'였다. 미안함이나 안타까움은 그 다음이었다. 덕수궁 돌담길 주변을 가득 메운 사람들의 격문에는 분노의 감정이 압도적으로 표출돼 있었다. 난 그걸 외면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해서, 내가 애초에 썼던 원고는 "슬픔과 안타까움, 자책감, 그리움, 먹먹함, 그리고 정부에 대한 분노... 시민 분향소에는 시민들의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났습니다."였다. 데스크는 "정부에 대한 분노"를 거론하는 것이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최종 원고에서 그 부분이 빠진 것은 그 때문이었다. 클로징 멘트 역시 원래 내가 썼던 원고는 "지난 7일 동안은 사방이 막힌 서울 광장보다 차라리 이곳이 시민들의 광장이었습니다" 였다. 이 부분 역시 데스크 과정에서 한결 다듬어진 언어로 바뀌었다.

 나는 여전히 방송이 '있는 그대로의 민심'을 실어 전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방송의 파급 효과 때문에 그것이 '정제'될 필요가 있다는 주장에 그렇지 않다고 적극적으로 반박하지는 못한다. 데스크와 짧은 커뮤니케이션 뒤에 난 데스크의 판단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렇게 난 노짱을 향해 기자로서의 작별 인사를 건넸다. 1주일 내내 마음을 짓누르던 먹먹함, 상실감, 미안함도 그제서야 조금 걷어낼 수 있었다. 리포트 BGM에 사용한 음악의 제목처럼, 그렇게 벚꽃이 지는 것과 함께, 그 봄날은 끝이 났다.

calvin.

Posted by the12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