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일담'에 해당되는 글 6건

  1. 2007.04.11 여덟 자 미학 8
  2. 2007.04.08 Out of the pitch 4
  3. 2007.04.07 거침없이 하이총 4
후일담2007. 4. 11.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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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TV 제작팀 그러니까 편집 부서는 남이 만든 뉴스 꼭지들을 가져다 방송으로 내보내는 일을 하는 곳이다. 뉴스 진행도 있지만 그 밖에도 기사들을 모아 하나의 뉴스로 내 보내기 위한 각종 일감들이 있다. 새 팀에서 내가 받은 첫 번째 롤은 '어깨걸이', 이른바 '이펙트'다. 신문 용어로는 '미다시' 즉 기사의 제목을 뽑는 일이다. 앵커의 어깨에 얹어지는 그림에 붙을 제목을 만드는 것이다.

 신문도 단수에 따라 글자 수에 제약을 받겠지만, 방송 뉴스의 경우엔 어깨걸이가 늘 같은 사이즈이다 보니 글자 수가 아예 정해져 있다. 그러니깐, '8자를 넘기지 말라',고 한다. 어깨걸이 좌우 길이의 일정함 때문에 글자 수가 8자를 넘어가면 글자 모양이 위아래로 길어지는 현상이 일어나고 혹은 글자가 빽빽하게 들어차 모양이 안 좋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람이 한 눈에 읽기 좋은 글자 수가 8자 정도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결국 이펙트 작업의 핵심은 8글자 안에 기사의 내용을 녹여내는 일이다. 기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나 메시지를 간파해 한 눈에 알 수 있게 전달하는 역할인 것이다.

 근데 이게 말처럼 쉽지가 않다. 기사의 주제를 간파하는 일이야 평균적인 독해 능력만 있으면 가능한 일이지만, 그걸 8글자 안에 우겨 넣는 것이 쉽지 않다. 아니다. 8글자 안에 우겨 넣는 것 자체도 그닥 어려운 일은 아니다. 딱딱하게 기계적으로 기사를 요약해 이펙트를 만들면 되는 일이긴 하다.

 하지만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길을 찾는다거나 다른 어깨걸이들과 차별화 되고 재밌기까지 한 이펙트, 더 나아가 거기에 이펙트를 만드는 사람의 '숨은 의도'를 담아내려 든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전달효과, 차별화, 그리고 메시지 전달 등을 오로지 8글자 안에서 이뤄내야 한다는 것이니 단순한 듯 보이지만, 이건 말하자면 사실, 고도의 창의력을 요구하는 두뇌 노동인 셈이다.

 쉽지 않은만큼 이게 또 썩 매력적이다. 뭐 솔직히 말해, 기계적으로 관성에 빠져 대충대충 적당히 할 수도 있다. 8자 안에서 노는 이펙트라는 게 실은 거기서 거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 무게감을 주기 위해선 튀지 않는 건조한 이펙트가 적합하기도 하다. 하지만 내게는 반짝 반짝거리는 이펙트를 만들어내는 재미가 적잖이 쏠쏠하다. 원고에 기대지 않는 독창적인 이펙트, 짧지만 강한 인상을 주는 이펙트, 그리고 시청자들에게 기사의 방향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주는 이펙트 말이다. 그런 게 부지불식간에 툭 튀어나오는 순간엔, 짧은 희열마저 느끼게 된다.

 당연한 얘기지만 머리를 많이 굴릴수록 좋은 이펙트가 나온다. 난 딱딱하게 굳어있는 내 머리를 다시금 조금씩 말랑말랑하게 만들어 나가고 있는 중이다.

calvin.
Posted by the12th
후일담2007. 4. 8. 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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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경찰서를 떠나며 기자실에 남겨놓은 인삿말


 사회팀에서 간절히 벗어나고 싶었던 것은 지쳤기 때문이었다. 몸도 지치고 마음도 지치고, 정신적으로 버티는 것도 한계에 이른 듯 했다. 1년차 때 악을 쓰듯 1년동안 굴러댔고, 지역에서도 여유롭게나마 결국은 같은 일을 했던데다, 다시 돌아와 13개월을 역시 꼭두새벽부터 경찰서에 드나드는 일로 묶여 있었으니 별스러울 일도 아니다. 단독이고 나발이고, 나에겐 '여유'가 필요하다 느꼈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생각해보면, 그동안 난 겁이 났다. 세상을 너무 몰랐고, 내 설익은 관념을 훨씬 뛰어 넘어 돌아가고 굴러가는 사회가 도무지 감당이 되질 않았다. 나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할 얘기들을 공중파를 통해 불특정 다수에게 떠들어야 했던 상황이며, 누군가를 지탄 여론의 대상으로 만들어 조지고 까발려야 하는 상황이며, 사람을 이용하고 사람에 이용당하는 상황이며, 온갖 종류의 이권 다툼에 휘둘려야 하는 상황이 두렵고 괴로웠다. 쳇바퀴 돌듯 그런 상황에 얽혀 들어가는 것이 싫었다.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만 싶었다.

 해보고 싶었던 것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순수한 욕심에 취재하고 접근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조차도 총체적인 진실을 그려내는 데 내 능력의 한계를 보고 말았고 좌절했다. 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보여줄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도망을 계획했다.

 겁을 먹은채 꽁꽁 숨어 그렇게 시간을 보낸 뒤, 난 한숨을 돌리겠답시고 서둘러 필드를 빠져 나왔다. 앞으로 꼬박 1년동안은 그 잘나빠진 볼펜과 마이크를 내려 놓게 됐다. 악다구니 넘치는 취재 현장으로부터 한 발 뗀 곳에서 다시금 내 자신과 내가 하는 일을 돌아볼 기회를 구했다.

  딱 1년이다. 이 1년은 그래서 너무나도 소중하다. 이것이 다시 비겁하게 숨어 들어가게 되는 공간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그래서 1년 뒤엔 당당해지기 위해서라도 난 이 시간을 아껴 써야 한다. 그때까지만 잠시만, 아주 잠시만 필드에서 벗어난다. 필드 바깥에서, 다시 돌아갈 때 달라질 내 모습을 만들어 나가야겠다.

calvin.
Posted by the12th
후일담2007. 4. 7. 10:39



 

  시트콤이 허구에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때때로 어딘가에 카메라를 박아놓은냥, 우리 삶은 한 편의 잘 짜여진 시트콤이 되곤 한다.

 아침 보고를 마치고 신문을 들척거리며 적당히 여유를 찾을 무렵, 캡에게서 전화가 왔다. 법조 파트에서 사이비 기 치료사에게 사기 혐의로 억대 배상 판결이 났다는 내용으로 리포트를 하는 모양인데, 우리가 그걸 받치는 꼭지를 맡아야 한다는 거였다. 기 치료가 무엇인지, 어디까지가 허용 범위인지, 실태가 어떤지 등등에 대한 리포트를 준비하라신다.

 시간을 보니 얼추 아침 편집회의 직후 쯤이다. 대략 어떤 시츄에이션인지 상황이 그려졌다. 꼰대들, 법조 파트의 아이템 개요를 보고 한 마디씩들 했겠지.

"아니 그럼 대관절 기 치료는 어떤거래?"
"어디까지가 사기라는 거야?"
"시청자들이 이런 걸 궁금해 하지 않겠어?"

뭐 이런 말이 오간 끝에,

"그럼 뒤에 하나 더 받치지, 뭐",

... 이랬을 것이다. 요즘 유행하는 팀장발 총은 대부분 그런 모양새로 발사되곤 한다. 이번 총알받이는 최근 몇일 좀 놀았던 내가 된 것일테고.

 일 할 때가 되었으니 주어진 총을 튕길 힘은 없다. 그렇지만 기 치료에 대해 백지상태인 사람에게 하루 안에 뚝딱 심층성 리포트를 만들어 내라는 고약한 요구가 어디 있나? 내 기가 다 막힐 지경이었다. 부담감에 짓눌려 난감해 하고 있던 차에 이 총의 빌미가 됐던 리포트의 주자인 법조 L선배가, 뒤에 받치는 리포트가 생겼다는 사실을 알고는 전화를 걸어 왔다.

"그 리포트는 뭐하자는 거에요?"
 아이구, 제가 드리고 싶은 질문.

"아침에 판결문 챙기면서 단신 용이겠거니 하고 올렸더니 법조 반장이 리포트 거리로 만들어 올렸더라고... 기 치료하고 별 상관 없는 사이비 교주라고 설명을 해도 듣지를 않아요."
 그럼 저는 어째요... ㅠ.ㅠ

"여하튼 내가 점심 때까지는 판결문을 반장 코앞에 들이대서라도 킬 시켜 볼테니까 그렇게 알아요."
 전 선배만 믿을 따름입니다... 아멘.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니 일단 오전 중에 속성으로라도 공부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라인 안에 있는 수습 두 명까지 동원해 여기 저기 전화를 돌려대고 나니, 얼추 이야기의 얼개는 마련이 됐다. 기 치료라는 게 사실은 기 치유의 잘못된 표현이라는 것, 기 치유는 라이센스도 없고 정통성도 딱이 없어 제각각이라는 것, 의료행위로 구분되지 않기 때문에 보건복지부는 전혀 관리를 하지 않고 있다는 것, 의학계에서는 일종의 보완 의료 행위로서 기 치유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있으며 실제 미국에서는 에너지 힐링이라 해서 치료에 적용되고 있다는 것...

 문제는 '그림'이었는데, 기 치유를 하는 상황이 섭외되지 않았다. 게다가 대부분의 기 치유소는 검증받지 못해 일정정도 사이비 성격을 띠고 있는지라 노출되는 것을 부담스러워 했다. 그렇다고 마냥 주저 앉아 있을 수는 없는 터여서, 일단 인터뷰가 가능하다고 한 어느 기 치유 수련원으로 향했다.

 그 사람들이 홍보 효과를 노리고 부러 설정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우리가 도착했을 때 마침 기 치유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래서 서둘러 인터뷰를 하고, 그림을 '만들어' 댔다. 기 치유하는 장면도 찍고, 명상을 하는 상황도 부탁해서 마구 마구 '만들어' 댔다.

 열심히 그림을 '만들어' 대고 있는데 법조 L선배가 다시 전화를 해왔다. 오호, 희소식을 전해 주시려나? 한껏 부푼 마음으로 다소곳이 전화를 받았다.

"아 미안해서 어쩌죠? 킬 시켜 보려고 했는데 죽어도 만들래."
 OTL....

 "반장의 마지막 얘기가, 네 얘기는 충분히 수긍이 된다만 우리 리포트 때문에 사건 파트가 총까지 맞았는데 만들어야 하지 않겠냐는 거에요.."
 아놔... 고양이의 쥐 생각... 주객의 전도... ㅡ,.ㅡ^

 이쯤 되면 그림도 '만들어' 대고 있겠다, 결국 하는 수밖에 없다. 급하게 인터뷰 해 줄 의사를 섭외하곤 또 냅다 뛰어 댕겼다. 그나마 다행으로 이 의사 양반이 비교적 영양가 있는 얘길 많이 해 주었다. 이로써 리포트는 겨우 구색을 갖출 수 있게 됐고. 대략 1분 20초 정도의 제작은 가능한 분량. 휴, 빵구내는 일은 어쨌든 막을 수 있겠다는 작은 안도감이 들 무렵, 캡이 전화를 걸어 오셨다.

 "어떻게, 잘 되겠나? 편집팀에서 아주 큰 관심을 보이고 있던데... 1분 50초 잡혔다니까 잘 만들어 보소."
 반나절 시간 주고 심층성 총을 쏘더니 "큰 관심"을 보이다 못해 1분 50초나 할애해 주셨단다. 된장, 하나 마나한 소리일텐데 그 긴 시간동안 도대체 무슨 소릴 지껄여야 된담?

 1분 50초씩이나 잡혔다면 제작 시간이 넉넉한 것만도 아니어서 서둘러 회사로 돌아왔다. 들어와서 9시 뉴스 가편집안을 봤는데, 어절씨구? 이날 기막힘의 하이라이트가 거기 준비돼 있었다. 내가 맞은 총의 원인을 제공했던 L선배의 법조 리포트가 그만 단신 처리되는 것으로 결정난 것이었다. 그야말로 배 보다 큰 배꼽. 아놔... 난 대체 뭐가 된거니...?

 결국 난 시의성 없는 리포트를 또다시 감놔라 배놔라 하며 읊어대는 모양새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까지 시간에 헐떡대며, 또 테이프를 들고 뛴 것은 물론이고 말이다.

 시트콤이 허구에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시트콤이 현실에서 펼쳐질 때, 지켜보는 이들에게야 '코메디'인 어처구니 없는 시츄에이션들이 정작 거기에 닥친 캐릭터에게는 눈물 없이 극복할 수 없는 '비극'이라는 점 또한 분명해진다.

calvin.

Posted by the12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