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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9.12 [영화] 엄마라는 사람 14
만끽!2009. 9. 12. 15:28


 기대작에는 따라붙는 숱한 '말'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난 <마더>를 보기 전부터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이 영화에 대한 얘기들에 최대한 귀를 닫으려 애를 써야만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정적 스포일링을 제외한 얘기들은 어쩔 수 없이 내 귀에 와 닿았다. 이를테면, "아름다운 모성애 이야기를 기대하지 말라"는 얘기, 그리고 "엄마가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알게 될 것"이라는 얘기, 또는 "상당히 불편한 이야기"라거나 "마지막에 반전이 있는 이야기"라는 얘기 따위들이다. 그런 얘기들로부터 난, 그만 이 영화가 엄청나게 기괴한 이야기일 것이라고 짐작하고 말았다. 이를테면, 범인이 알고보니 엄마였다거나, 혜자와 도준이 사실은 모자 사이가 아니라 연인 사이라거나. ;;;

 지나치게 기괴한 짐작은 오히려 이 영화에 대한 이러저러한 얘기들에 노출된 나를 비로소 영화에 온전히 몰입할 수 있는 상태로 만들어 주었다. 완전히 엇나간 선입견으로부터 영화를 마주하기 시작했으니, 백지 상태에서 본 것보다 영화에 대한 이해도를 더 높이는 효과를 거둔 셈이다. 결론적으로 내가 본 <마더>는 다행히 내 지나치게 기괴한 짐작과는 달리 지극히 정상적인(!) 엄마의 이야기였다. "극도의 아름다운 모성애 이야기"였고 "엄마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알게 됐으며, 너무나도 감동스럽고 가슴 아팠다.

 엄마의 사랑과 엄마의 헌신이 어떻게 그저 좋을 때에만, 마냥 좋은 모습으로만 나타날 수 있겠나. '엄마'라는 존재는 (특히 대한민국에서는)원체 "진 자리 마른 자리" 가리지 않는 법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이, 나 역시 <마더>를 보는 내내 우리 엄마를 연상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우리 엄마도 그런 분이셨다. 아들에게는 '데모질'이 몹쓸짓이라고 누누이 강조하시면서도, 그게 아들을 위한 일이라고 한다면 도리어 앞장서 데모에 나서는 분이셨다. 아들이 어릴 땐 옳은 것 그른 것을 가르치셨지만, 다 큰 아들이 옳은 것 그른 것을 가려 말씀드리면 그게 그저 옳은 것이고 그른 것이라고 받아들이셨다. 엄마의 사랑은 맹목적이고 조건이 없다. 이유가 없고 이성적으로 따질 게 아니다. 그저 자식이 목적이고 이유고 유일한 조건이다. 수단은 무엇이 되든 상관 없다.

 <마더>에서 엄마의 사랑과 헌신이 끝간 데까지 가서 그렇지, 따지고 보면 이 세상 엄마의 사랑은 모두 같은 모양이다. 자식 인생을 좌우하는 교육권에서 과도하게 치맛바람을 날리시는 대치동 엄마들이나, 열사가 된 아들로 인해 남은 인생을 투사로 살고 계시는 엄마나, 풍진 세상 홀로 남겨져 괴로운 인생 살게 할 수 없다며 철부지 자식에게 동반 자살을 강요하는 엄마나... 각기 지닌 사연과 드러나는 모습이 다를 뿐 부피와 출발점은 같다. '헌신적인 모성애'나 '비정한 모정'조차 실은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하나같은 자식에 대한 엄마의 고유 정서다.

 마지막 장면, 관광 버스를 광란의 도가니로 만드는 그 아줌마들도 실은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가 사랑하는 엄마들이다. 한없이 좋은 모습을 보이다가도 한없이 창피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 너무나도 정상적인 엄마들이다. '대한민국 아줌마'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더러 눈쌀을 찌푸리게 만들지라도, 결코 미워해선 안될, 내겐 하나 뿐인 엄마들이다. 

 도준 역을 맡은 원빈의 가장 큰 단점은, '너무 잘 생긴 얼굴'이다. 연기자 원빈 본인으로선 억울해할 만한 일일텐데, 띨빵한 도준의 캐릭터에 원빈의 눈부신 얼굴은 관객의 감정 이입을 방해하기 충분했다. 나무랄데 없었던 연기력에도 불구하고, 차라리 원빈이 아니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쉬울 것 없을 것만 같았던 원빈에게 너무 잘 생긴 얼굴이 도리어 걸림돌이 될 줄 누가 알았겠냐만, 연기자로서 발전해 나가려면 배역 결정에 있어 본인 욕심을 좀 덜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한민국 대표 엄마' 김혜자의 연기는 이제 별로 놀랄만한 일도 아니다. 딱 기대치만큼 해주었는데, 사실 그 기대치는 이미 최고치였다. 그걸 가뿐히 해내다니, 대표배우는 역시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부분에서 도준이 침통을 챙겨줬을 때 그걸 받아 들고 황망히 자리를 피하는 롱테이크 장면에서의 표정 연기는 정말 압권이다. 짧은 순간 이루 말할 수 없을만큼 다양한 표정이 스쳐 지나가는데, 그 장면에서만큼은 그동안 충무로에서 난다긴다 하는 배우 누구를 갖다 대놔도 김혜자를 대신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표정은 또한, 초인적이기까지 한 엄마도 자식 앞에서 자식에게만큼은 알리고 싶지 않은 일을 들켰을 때 와르르 무너지게 되는, 세상에서 가장 약해지는 순간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엄마라는 사람은 자식을 위해 강해지고 자식 앞에서 약해지는, 그런 사람이란 얘기다. 

 봉준호 감독의 '썰 푸는 능력'은 한국 영화판에선 이미 최고다. 단순한 이야기를 재미나게 전개시키는 이야기꾼으로서의 그의 재능은 이번 영화에서도 여지없이 빛났다. 어찌보면 밋밋한 시놉시스를 가지고 2시간이 넘도록 관객의 호흡을 농락하며 관객의 시선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고 가는 봉 감독의 연출력은, 앞으로도 최소 몇 년동안은 그의 작품을 주목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calvin.
Posted by the12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