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끽!2024. 9. 12. 18:08

 

공부를 매우 잘 하지도, 운동을 잘 하지도, 노래를 잘 부르거나 춤을 잘 추지도, 잘 생기지도, 그렇다고 애들을 잘 웃기지도 못했던 내가 학교에서 친구를 사귈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학기 초 어느날 쉬는 시간에 조용히 연습장을 펴고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애들이 등 뒤에 모여들며 말을 붙였다. 그림이 마음에 들면 달라는 애들도 있었고, 자기가 원하는 그림을 그려달라는 요청도 받았다. 학기 말 방학이 되기 전 발행되는 학교신문의 네컷 만화는 공모하는 족족 내 차지였다.

 

강호에는 원래 고수가 많은 법이어서, 학년이 바뀔 때마다 그림 깨나 그리는 애들은 새로운 반에 등장하는 경쟁자를 의식하게 된다. 그냥 서로 각자의 스타일이 다르고 잘 그리는 게 다를 뿐인데도 아이들은 누구 그림이 더 죽인다는 둥 누구 그림은 어째서 별로라는 둥 품평을 했고, 당사자들은 내색은 안 했지만 그런 평가에 적잖은 내상을 입곤 했다. 그래서 의도치 않게 라이벌리로 묶였던 애들하고는 묘한 긴장관계가 생기면서 결국 썩 친해지지는 못했었다. 

 

그런 소년시절을 보냈으니, <룩백>의 시놉시스를 보고 안 보고 지나칠 수가 있었겠나. 학교 신문에 네컷 만화를 연재하던 주인공, 만화로 인정욕구를 가득 충족해 왔지만, 어느날 학교 신문에 기가막힌 수준의 풍경화를 그린 히키코모리 경쟁자의 존재를 확인, 노오오오오오력을 통해 더 잘 그리려 해 보지만 그것은 노력이 아닌 재능의 영역임을 확인하고 좌절,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자신에게 열등감을 안겨줬던 경쟁자가 오히려 자기 만화의 왕팬이라는 사실을 고백하자 무너졌던 자존감이 일시에 회복되고 두 소녀는 둘도 없는 절친이 된다... 뭐 이 정도가 이 작품의 시놉시스다. 학창시절 그림 좀 그려봤던 애들에게는 아마 적잖이 있었을 그런 에피소드들이다. 

 

이야기는 두 소녀가 따로 또 같이, 성장하는 이야기로 이어진다. 그러다가 세상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던 한 사건을 모티브로 한 충격적인 사건이 절정을 이루고, 충격에 놀랐을 사람들의 마음을 만화만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위로하고 보듬는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므로 후반부 얘기는 여기까지만. 

 

이 애니메이션은 우리나라에선 <체인소 맨>으로 유명한 후지모토 타츠키의 자전적 단편만화를 영상화한 것이다. 처음엔 그림쟁이들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작품에서 두 소녀를 통해 만화라는 매체가 그림실력과 이야기 구성 능력으로 구분된다는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걸 생각해 보면 그림보다는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라고 보는 편이 맞는 것 같다. 만화가 됐든 애니메이션이 됐든 혹은 영화가 됐든 소설이 됐든, 수단이 다를 뿐 모든 이야기를 만드는 창작자들에 대한 헌사라고나 할까.

 

후지노는 쿄모토에게 "만화를 그리는 일이 하나도 안 즐겁고 귀찮기만 하고" "하루종일 그려도 완성되지 않고" "읽기만 하는 게 낫지 직접 그릴 게 못된다"고 부정적으로 말한다. 그러자 쿄모토가 묻는다. "그럼 넌 왜 만화를 그려?" 후지노의 대답은 끝내 나오지 않았지만, 아마도 분명히 자기가 만든 이야기를 보며 즐거워하고 감동을 받고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 아니겠나. 후지노에게 처음의 쿄모토가 그랬듯이.

 

제목인 <룩백>에는 다중적 의미가 내포돼 있다. 쿄모토가 친구가 된 후지노의 뒤를 따라 세상 밖으로 나설 때의 시선이기도 하고, 후지노가 회한 속에 과거를 되돌리고 싶어하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기도 하며, 쿄모토가 마지막에 그린 네컷 만화에서 유머러스하게 친 대사이기도 하지만, 실은 만화가-창작자들이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그 뒷모슴을 의미한 것이다. 한 시간이 채 되지 않는 러닝타임 내내 그 뒷모습을 반복했던 것까지 포함해, 작가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위해 고단함 속에서도 묵묵히 제 자리에서 만화를 그리는 창작자들의 뒷 모습을, 좀 봐달라고 말 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그러니, 세상 모든 창작자들에게 경의를 보낸다. 나도 만화 그리고 싶어졌다. 

 

★★★★

Posted by the12th
만끽!2024. 6. 14. 18:20

 
 
 회스 중령 부인의 친정 어머니가 회스 저택을 방문했던 날, 딸의 안내를 받으며 집을 둘러보다 예쁘게 가꿔진 정원에 이르러 그녀는 탄복을 한다. "낙원이 따로 없구나!" 하지만 며칠 지내는 동안 집 바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눈치를 챈 그녀는 딸에게 고작 쪽지 한 장 남긴채 황급히 야반도주를 하고 만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소장이었던 루돌프 회스의 가족이 수용소 담장 너머에 마련한 사택에서 지내는 모습을 담담히(!) 담은 영화다. 당시 아우슈비츠와 그 일대를 일컬었던 이름을 영화 제목으로 가져다 썼다고 한다.
 
 영어 제목을 한국말로 그대로 가져다 쓰면 종종 발생하는 일인데, 난 처음엔 이게 'John of interest'인 줄 알았다. 이 정도로 헷갈릴 정도면 적당히 '관심 구역' 같은 한국말 제목으로 번역했어도 됐을텐데, 아마도 그러지 않은 이유는 'the zone of interest'의 의미를 정확히 옮기기 어려웠기 때문일테다. interest를 어떻게 번역하느냐에 따라 영화의 제목도 중의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회스 부인의 어머니가 "낙원"이라고 감탄했듯, 회스 가족의 사택은 더할나위 없이 완벽하다. 일곱 식구가 살기에 적당히 크고 깔끔한 집, 여러가지 꽃과 나무로 잘 가꾸어진 정원, 아이들이 놀기 좋은 수영장도 있고, 가까운 곳에는 소풍 나가기 좋은 숲과 강도 있다. 거기에 시중을 드는 하인들까지 있으니 낙원이 따로 없을 수밖에. 날씨까지 눈부시게 좋아서 관객들 입장에서도, 시각적으로 보는 즐거움이 있다. 낙천적 감성이 물씬대는 멋진 그림을 보는 것도 같다. 그야말로 누구나 꿈꿔봤을 완벽한 거주 환경이다. 소음만 없다면.
 
 그렇다. 소음이 문제다. 영화에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풍경과는 이질적인 소음이 지속적으로 나온다. 그래서 눈은 평화롭고 평온한 회스 가족의 일상을 따라가고 있는데, 귀에 들리는 소리로 인해 신경은 자꾸만 그 소음의 정체를 쫓게 된다. 소음이 신경 쓰이다 괴롭고 슬퍼지다 이내 우울해진다. 눈에 보이는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서 더욱 더.
 
 이 영화에서는 끔찍한 장면은 단 한차례도 나오지 않는다. 집 저편에 높은 담벼락으로 가려져 있어 회스 가족들이 그렇듯, 관객들은 저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을 볼 수 없다. 다만 지속적인 소음이 관객의 역사적 상식과 상상력을 거치며 보는 것 이상의 끔찍한 경험을 준다. 이 영화는 아마도 시청각종합예술인 영화라는 매체의 장점을 가장 잘 활용한 작품으로 영화사에 기록될 것이다.
 
 이 영화의 플롯에 비밀이 있는 건 아니다. 루돌프 회스라는 실존인물을 다뤘듯, 이미 우리가 다 알고 있는 역사의 이야기니까. 소음의 정체는 누구나 처음부터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은 우리보다 그것을 더 잘 알고 있다. 다만 보려하지 않을 뿐이다.
 
 끔찍한 것은 회스의 어린 아이들도 모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아이들이 알고 있다는 것을, 회스 부부는 알고 있었을까?
 
 그리고 가장 끔찍했던 것은, 회스 부인의 어머니가 줄행랑 쳤을만큼 최악의 환경인데도, 회스 부부가 이 사택에 집착한다는 점이다. 죄없는 사람들을 학살함으로써 만들어진 행복임을 알면서도, 자신의 이익, 자신의 편익, 자신의 안온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 그걸 지켜내고자 한다. 자신들만 행복하면 타인의 불행과 고통은 외면할 수 있다는 듯이.
 
 그래서 어느 순간, 이 영화는 홀로코스트라는 역사적 사실을 되뇌이는 것이라기 보다, 우리의 오늘을 되짚어 보게 만드는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나의 행복을 위해 어쩌면 알고 있을 저 너머의 불행한 진실을 애써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지. 누가 어떤 고통과 괴로움을 겪는다 해도, 그것을 통해 나와 내 가족만 행복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러하다면, 그런 우리는 저 소름끼치는 회스 부부와 무엇이 다른지 말이다.
 
 그리고 영화를 보면서 두 나라가 떠올랐다. <오펜하이머>에조차 발작적 반응을 보였던 일본과, 피해자였던 시절을 잊고 절멸의 가해자가 되고 있는 이스라엘. 우리의 반성과 다른 결에서, 그들도 이 영화를 보며 반성 좀 하길.■
 
★☆
Posted by the12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