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 블랙 미니드레스'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11.03.28 [영화] 청춘에 바침 2
만끽!2011. 3. 28. 19:21


 반려자가 보고 싶다길래 흔쾌한 척(!) 따라 나서긴 했지만, 속 마음으론 "웬 된장녀 영화?" 하며 썩 내키지는 않았다. 부족할 것 없는 상류 또는 중산층 여자 아이들이 허영과 사치에 빠져 인생을 소비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한 탓이다. 겉 보기에 영화의 배경이 그랬다. 된장녀 냄새가 풀풀 나는 네 명의 여자 주인공들은 외모, 학벌, 배경에서 그닥 꿇릴 것 없는 아이들이다. 명품 신상으로 자신을 치장하고, 나이트 죽순이에, 원 나잇 스탠드로 남자를 갈아타고, 배경 부족한 남자친구를 걷어차 버리고... 하지만 그렇게 산다고 해서 그들이라고 삶이 마냥 편하고 걱정이란 게 없겠나. 퀸카급 외모로 인생 쉽게 풀려 결국 친구의 질투를 받게 된 혜지가 던지는 말처럼 말이다. "네가 나로 살아봤어?"

 화려하고 쉬운 삶은 상대적인 것이다. 내 옆의 잘난 친구와 끊임없이 비교할 때 내 삶에 만족이란 있을 수 없다. 나아가 나의 창피한 어떤 조건은 또한 월등한 누군가의 옆에서는 더욱 비참해진다. 반면, 내가 만족하지 못하는 나의 삶은 어느 누군가에게 동경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인생이라는 영화에서 주목받는 주인공이 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에 누구나 좌절하곤 하지만, 인생이라는 영화는 장르가 다양하다. 꼭 화려한 로맨스의 주인공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영화 속 주인공들은 그걸 모른다. 누구나 자신의 인생만을 사는 법이기 때문이고, 민희의 대사처럼 "20대에는 시원한 일은 없는 법"이기 때문이다. 

 <마이 미니 블랙드레스>는 '허영에 빠진 된장녀들을 주인공으로 한 트렌디한 이야기', 혹은 '여성들의 우정도 단단하다는 것을 한 번 힘 써서 보여주는 이야기'일 것이라는 예상을 가뿐히 뛰어 넘는다. 겉보기에 화려해 보일 뿐, 이들의 삶도 사실은 치열한 투쟁의 장이고 도전과 응전의 과정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들도 역경 속에서 살고 그들도 좌절하고 그들도 불행에 빠지기도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니 그래서, 다른 세계에서 사는 된장녀들의 치기 어린 고난이라서, 그만 같잖아 보이지는 않겠냐고? 그 지점에서 영화는 빛을 발한다. 영화는 주인공들의 배경에서 느껴질 법한 이질감을 제거하고 보편화해 보이는 세련된 감각을 발휘한다. 그들의 삶도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것, 그들도 우리처럼 치열한 청춘을 보내고 있다는 점으로부터 관객 일반의 공감대를 이끌어내는 데 성공한다. 영화는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삶이 힘겨운 동시대의 청춘들을 위한 성장 이야기'로 스스로 성장해 나간다. 꿈꾸고 도전하고, 곧잘 좌절하지만 툭툭 털고 다시 일어서는 것이 특권인 이 세상 모든 청춘들에 바치는 헌사로 발전한다. 

 적절한 캐스팅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성인 배우가 고등학생 역을 손발이 오그라들지 않게 무난하게 소화한 사례를 난 이 영화의 윤은혜 이전에 일찌기 본 적이 없다. 그 부분을 포함해서, 윤은혜는 불안과 혼란, '된장'과 성숙 사이에서 성장통을 앓는 유민 역을 훌륭하게 소화해 낸다. 드라마 <궁> 캐스팅 당시 안티들의 십자포화를 얻어맞았던 초짜 배우는 어느새 한 영화를 책임지고 끌고 나가는 히로인이 되었다. 그간의 노력에 박수를. 

박수로 치면 '퀸카' 혜지 역의 박한별도 못지 않게 받을 자격이 있다. 영화 속에서 그녀가 배우로 나와 하는 '발연기'만큼은 아니지만, 솔직히 그간 그녀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배우'보다는 여전히 '얼짱'이라는 타이틀이 더 적합했던 게 사실이었다. 이번엔 배역을 제대로 만났다. 캐릭터 자체가 그녀 자신이 자연스럽게 스며들 수 있어서인지 몰라도, 기대 이상의 완숙한 연기력을 선보였다. 이제 '배우' 타이틀이 부끄럽지 않게 된 거다. 부잣집 딸 민희 역의 유인나 역시, 예의 그 귀여움이 과장된 연기는 여전하지만 배역과 최적의 싱크로율을 보이며 더 없이 잘 어울렸다. 시트콤만으로는 의문 부호가 붙었던 그녀의 연기에도 이제 신뢰를 줄 수 있을 것 같다. 수진 역의 차예련은 요즘 부쩍 눈에 띄는 배우다. 안정감 있고, 무엇보다도 뭔가 있어 보이는 그녀의 캐릭터는 앞으로의 작품에 더 기대감을 갖게 만든다.

 연출도 좋았지만, 난 이 영화의 높은 완성도는 원작과 각본에 크게 기대고 있다고 생각한다. 맛깔나는 대사와 캐릭터들에 대한 섬세한 묘사, 그리고 적절한 긴장감을 유지한 알찬 구성이 특히 좋았다. 이런 소재의 이런 종류의 한국 영화에서 민망함을 느끼지 않은 채 기분 좋게 영화관을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게 도대체 얼마만인지. 한국 영화가 이렇게나 자랐나, 하는 생각도 새삼 들었다.

★★★★

calvin.
Posted by the12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