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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2.10 '정조 독살설'은 죽지 않았다 6
떠듦2009. 2. 10. 11:53

 감춰진 역사를 엿보는 것은 언제나 흥미진진한 일이다. 만일 타임머신이 만들어진다면, 난 미래보다는 과거 여행을 택하겠다. 역사 속 인물들이 정말 초상화나 영정에 나오는 것처럼 그렇게 생겼는지 보고싶고, 기록으로 남지 않아 '의혹'으로 남아있는 일들이 정말 있었던 일들이었는지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어서다.

 정조가 '공식적으로는' 정치적 반대파 수장으로 알려진 심환지에게 보냈다는 비밀편지들이 공개됐다. 이 편지를 공개한 쪽과 이를 받아 전한 언론들은 이 편지 내용을 근거로 정조 독살설이 더 이상 근거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고 강조하고 있다. 정조가 자신의 정치적 반대자로 알려졌지만 편지 내용을 보면 정조가 그와 정치적으로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고 있기 때문이란다. 더욱이 정조가 심환지에게 극비 사항인 자신의 악화하는 병세를 자세히 설명한 것을 보면, 그 병세로 숨졌을 가능성이 더 높아지고 심환지가 정조를 독살했을 가능성은 더더욱 없을 거라는 얘기다.

 하지만 우리는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만을 봤을 뿐이다. 그건 정조가 심환지에게만 편지를 보냈다는 의미가 아니다.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비밀 편지가 여러 장 발견됐다는 사실에서는, 도리어 정조가 심환지 이외의 인물들에게 보낸 편지들은 남아 있지 않다는 데 강조점이 찍혀야 한다. 정조가 사도세자를 죽게 하는 데 기여한 벽파의 수장에게까지 편지를 보냈다면 다른 신하들에게도 '비밀'을 전제로 한 편지를 다수 보냈을 가능성이 농후해지기 때문이다.

 조선 뿐 아니라 모든 왕조는 왕과 신하 사이의 팽팽한 권력 긴장 관계 속에서 정치가 이루어진다. 더욱이 정조는 어린 시절 자신의 아버지가 뒤주에 갇혀 억울한 죽임을 당하는 과정을 지켜봐야 했던 사람이다. 그가 왕이 되는 과정 속에서, 사도세자의 죽임에 간여했던 신하들이 위기감을 가지고 극심하게 견제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정조 역시 그 견제와 도전 속에서 왕위를 보전해야 했던 것을 생각해 보면, 당시 정세는 현대 사회 사람들이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치열한 정치 싸움이 일상화됐을 것이다. 

 정조가 편지에서 심환지에게 각종 '지령'을 내려가며 '막후 정치'를 도모하고 정략적 모습을 보이는 것도 군신간 역학관계 속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탕평책도 그러한 방편이었을테지만, '당적'이 없는 임금이 당파를 만들어 왕권을 수시로 위협하는 신하들을 장악하려면 다양한 정치적 기술 또한 불가피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군신간 벼랑 끝 긴장이 지속되던 가운데서 정조가 심환지에게 편지를 보냈다면 그 편지는 목적이 있는 비밀편지로 보는 편이 옳다. 편지의 형식이 '비밀'이라는 데 매몰되어선 안 된다. 오히려 편지를 받는 대상이 분명한 편지라는 점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은밀히 보냈다 하여, 정조가 자신의 에누리 없는 속내를 모두 드러내 보였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이지 순진한 생각이다.
 
 가령 정조가 자신의 최측근인 노론계 서영보를 일컬어 "호로자식"이라 했다거나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학자 김매순에 대해 "입에서 젖비린내 나고 미처 사람 꼴을 갖추지 못한 놈"이라고 막말을 섞어 가며 비방한 것은, 심환지를 대상으로 한 고도의 정치적 언사일 가능성이 높다. 심환지가 견제하는 정치 세력에 대해 부러 극단적인 표현으로 비방함으로써, 정조는 심환지로 하여금 왕의 의중이 그에게 있다는 착각을 심어주려 했을 것이다.

 따라서 편지 속 정조가 보인 다혈적 성품과 비속어로 그가 '학자 군주'의 이미지를 벗었다고 하는 해석도 틀린 말이다. 정조가 학식과 예술에 능했다는 사실과 다혈질이라는 성품이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것 역시 아니기도 하지만, 그건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여주고 싶어했던 자신의 이미지였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측근들로 평가되는 신하들에 대해 부러 막말을 하고 부러 다혈질로 보여 심환지와 벽파로 하여금 자신에 대한 날선 견제를 다소 풀게 하려는 의도로 읽히는 측면이 있다.

 자신의 병세 악화 과정을 심환지에게 구구절절 얘기하는 것 역시 그러하다. 정순왕후와 가까운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라는 특수성에서 비추어 보면 정조는 자신의 병세를 부러 과장해 그들을 안심시키려 했을 수도 있다. 또는 자신에 대한 암살 기도 정보를 파악하고 병세가 회복할 수 없을만큼 나빠지고 있다고 연막을 쳐 그들의 암살 기도를 피하려 했을 수도 있다. 하다 못해 그 병세 설명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심환지가 이런 정보를 바탕으로 정조를 독살했을 가능성이 거두어지는 것은 아니다. (독살설의 내용은 왕에게 독약을 탔다는 게 아니라 심환지 등이 일부러 왕의 병세가 더 나빠지도록 탕약을 조제했다는 것이다) 독살설을 입증할 명확한 증거는 아직 없지만, 요컨대 심환지가 받은 편지에 적힌 정조의 병세 설명으로 독살설이 폐기되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정조는 여러 면에서 노무현과 비교되기도 한다. 비대한 정치적 반대 세력과 끊임없는 긴장 관계를 가져야 했던 지도자라는 면에서 특히 그러하다. 이번에 공개된 편지에서 정조가 '막말'을 하고 '다혈질' 면모를 보였다는 점에서 난 더 그렇게 느꼈다. 노무현의 막말도 대부분은 계산된 막말이었다. 노무현은 극단적으로 대립해 온 한나라당에 '대연정'을 제안했던 바 있다. 심환지에게 보낸 정조의 비밀 편지도 그런 맥락에서 해석돼야 하는 게 아닐까?

 심환지는 비밀 편지를 폐기 처분하라는 정조의 명령을 어기고 심지어 받은 날짜와 장소까지 기록해 가며 이 편지를 남겼다. 그가 '충신'이었다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심환지가 지금 재해석되듯 정조와 인간적으로 막역한 사이는 아니라는 뜻이다. 편지를 받은 그 역시 정조의 편지를 정치적으로 해석하고 정치적으로 반응했다. 이 점 또한 정조의 비밀 편지를 여는 한 열쇠가 될 것이다.

calvin.
Posted by the12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