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9.06.02 盧公移山 4
  2. 2009.02.04 무죄추정의 원칙과 피의자의 신상공개 (레지나)
떠듦2009. 6. 2. 22:06

 그가 선택한 죽음은 그의 삶과 같았다. 마지막 순간 바위 위에 자신의 몸을 내던졌던 그가 일생동안 살아왔던 삶 역시, 한결같이 "계란으로 바위 치는 일"이었다. 지역 할거 주의에, 보스 정치에, 자본에, 언론 권력에, 문벌 주의에, 권위와 폭압에, 세상 모든 종류의 차별과 불평등에 그는 우직하게 맞서 싸웠다. 여와 야, 주류와 비주류를 막론하고 공고하게 포진해 있던 '앙시엥 레짐'에 대한 그의 도전은 사실 무모해 보였다. 그는 포기하지 않았고, 마침내 자신의 진심을 '직접' 소통할 수 있었던 인터넷을 만났다. 무모했고 어리석었고 불가능해 보였던 일이 일어났고, 그는 기어이 계란으로 바위에 얼마간의 균열을 내고야 말았다. 그건 '작은 혁명'이었다.

 거대한 바람에 잠시 어안이 벙벙했던 기득권 세력은 이내 정신을 차렸다. 그들은 인정할 수 없었다. 별볼 일 없는 빈농 가문에, 학번으로 얽을 수 없는 상고 출신. 하고 싶은 말을 거침 없이 하고, 조금도 굽실대지 않는 자. 비루하고 힘 없는 이들을 대변하려 들고, 기득권을 떼어 내 놓으라고 요구하는 자를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야말로 "어디서 굴러 들어온 놈"을 권력의 최상층부에 '모실' 수 없었다. 서둘러 끌어 내려야 했다.
 
 탄핵은 그런 조바심이 빚은 가장 노골적인 첫번 째 시도였다. 지역주의를 자극해 정치하지 말자는 그의 적극적인 움직임이 민주당 분당 사태를 빚게 되자, 지역주의 정치로 나름대로 입지를 굳혔던 민주당 잔당 세력은 독이 바짝 오른 나머지 한나라당과 함께 그를 끌어내린다. 그렇지만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 '의회 쿠데타'는 국민과 헌법재판소의 저지로 처참하게 실패하고 만다. 상대를 너무 얕잡아 봤음을 깨달은 그들은 장기전을 모색했다.

 그의 임기 내내 마치 와신상담이라도 하듯 집요하고 치밀하고 악랄하게 그의 지지 기반을 갉아 먹고 들어간 것은 언론 권력이었다. <조선일보>로 대표되는 수구 언론은 그의 말과 행동 정책을 하나같이 악의적으로 몰아갔다. 그들에 의해 그의 구상은 '꼼수'가 되고, 그의 솔직한 언변은 '막말'이 됐다. 여러 해에 걸쳐 집요하게 반복되는 그들의 흑색선전은  점점 큰 효과를 발휘했다. 처음에 '설마' 하던 사람들도 그들이 불어대는 나팔 소리에 현혹돼 마치 기득권 세력이 그러듯, 그를 경멸해 나가기 시작했다. 저잣거리에선 모든 잘못을 그에게 돌리는 말이 유행처럼 번졌다. 

 지지자들마저 등을 돌리고 그의 인기가 떨어지자, 그의 가치를 좇아 열린우리당으로 모였던 이들마저도 그에게 손가락질하며 다시 손쉬운 지역주의에 기댔다. 국민들이 그로부터 멀어지게 된 것을 기다리기라도 하듯, 기득권 세력은 다시 구체제를 공고히 만들었다.

 오랜 노력으로 국민들의 눈과 귀를 멀게 한 뒤 그들은 권력을 다시 탈취해 냈다. 그는 조용하고 담대히 고향으로 내려가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갔다. 평범하게 농삿일을 시작했다. 기득권 세력은 마지막에 인기가 없었던 그를 뒤에서 조롱하고 비웃었다. 그를 실패자로 만듦으로써 그가 꿈 꾸었던 세상을 헛된 이상으로 내몰고, 그로 인해 자신들이 기득권을 천년만년 유지할 수 있는 체제가 더욱 강화될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그는 가장 낮은 모습으로, 가장 폄범하게 낙향했을 뿐이었는데, 그를 찾는 사람들이 늘어만 갔다. 작은 시골 마을에 사람들이 수백명 씩 몰려가 그를 연호하고 그를 바라보며 즐거워했다. 퇴임 직전 인기가 바닥을 기던 대통령이라고는 누구도 생각할 수 없을만큼, 그에 대한 관심과 인기는 뜨거워져만 갔다.

 그들은 초조해졌다. 그에게 쏠리는 사람들의 관심, 그의 이상에 고개를 돌리는 사람들의 눈길이 부담스러워졌다. 어떻게 되찾은 권력인데, 다시 그가 정치를 하려 들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국민들과 있는 그대로 소통하는 그의 힘이 두려웠다. 

 그들은 다시 그를 흠집 내기로 했다. 자신의 재임 기간 기록물을 갖고 있다는 것을 두고 '불법' 운운 하며 그를 범법자로 만들려 들었다. 그 법을 만든 이가 바로 그 자신인데 말이다. 그가 인터넷 토론 사이트를 개설하려는 것을 두고도 수구 언론은 그가 '인터넷 대통령'을 참칭하려는 것이라고 갖은 흑색선전을 일삼았다. 전직 대통령의 사회에 대한 작은 발언조차 용납하려 들지 않았다. 두려웠기 때문이다.

 결국 그와의 이른바 '검사와의 대화' 끝에 국민들로부터 망신을 사고는 벼르고 별렀던 검찰을 앞세웠다. 검찰은 그의 도덕성에 흠집을 내 정치적 재기의 싹을 잘라버리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그의 주변을 샅샅이 뒤졌다. 결국 뚜렷한 증거는 없지만 여론 재판하기 좋은 건수를 하나 물게 되자, 그들은 언론 권력과 함께 그에 대한 마녀재판을 벌였다. 그는 항변하고 싶었고, 해명하고 싶었고, 법리 다툼을 벌이고 싶었지만, 이미 그들이 짜 놓은 프레임 안에서는 어떠한 해명도 국민들에게 온전히 닿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남아 있지 않았다.

 바위 위에서 결국 몸이 으스러진 그의 실험은, 그로써 좌절하고 만 것일까? 그가 품었던 이상, 그가 했던 도전, 그가 벌인 싸움, 그가 이루고자 했던 세상은 그의 육신이 사라짐으로 해서 동시에 먼지처럼 사라지고 만 것일까?

 인터넷에서 그가 자신을 이르던 이름은 '노공이산'이었다. '우공이산'이라는 고사에서 빌어온, 그에게 썩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모두가 불가능하다며 비웃는데도 뚜벅 뚜벅 산을 옮기려 했던 노공은, 끝내 미처 산을 다 옮기지 못한 채 영면에 들었다. 그래서 그의 노력이 헛되이 된 것일까?
 
 고사에서 우공은 말한다. "나는 늙었지만 나에게는 자식도 있고 손자도 있다. 그 손자는 또 자식을 낳아 자자손손 한없이 대를 잇겠지만 산은 더 불어나는 일이 없지 않은가. 그러니 언젠가는 평평하게 될 날이 오겠지."

 그 산을 옮기는 일은, 이제 남아있는 그의 '아들들'의 일이 되었다.

calvin.
Posted by the12th
삽질2009. 2. 4. 21:20

피의자의 얼굴이 공개돼서 얻는 것: 국민들의 호기심 해소. 희생자 가족들의 아주 약간의 분풀이. 이렇게 온순하게 잘 생긴 사람도 흉악범일 수 있다는 경각심. 알려지지 않은 남은 죄에 피해 본 사람들의 추가 신고....
피의자의 얼굴이 공개돼서 잃는 것: 헌법상 무죄 추정의 원칙. 피의자의 죄 없는 가족들이 받는 고통. 사건의 특정 개인 책임화. 사건 본질 희석과 황색화....

둘 가운데 어느 쪽이 더 클까? 충분한 고민과 숙의 없이 일부 신문이 공개하자 조르르 좇아간 공장의 수준이 더없이 쪽 팔리다. '공영'이 무엇인지, 냉정한 언론의 소임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사람들이 그리도 없나?

한 때 함께 수습 생활을 했었고, 지금도 언론계에 발을 담그고 있는 법조인 친구의 뼈아픈 글이다.

calv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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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본부 사회 2부 수습시절의 일이다.

당시 내 일과는, 새벽 3시에 일어나 관할 경찰서 4개를 뺑뺑이 돌며 사건 사고를 취합. 야근자 및 2진 선배에게 보고. 추가취재 명령을 받으면 추가취재를, 그렇지 않으면 계속 경찰서 뺑뺑이를 돌다가 밤 12시에 다시 2진 선배에게 보고를 해야 하루 일과가 마감되는 그런 나날들이었는데...

어느날  모 경찰서에서 수사중인 사안에 대해 섣불리 보고를 했다가, 아직 수사가 끝나지 않은 피의자의 신원 및 혐의에 대해 추가취재 명령을 받았고 대체 아직 수사가 끝나지 않은 사안에 대해 어떤 방법으로 취재를 할 것인지. 무슨 근거로 담당 형사의 입을 열게 할 것인지 머리 빠지도록 고민을 하고 있던 그때.

같이 수습을 하던 여기자가 나를 무척 답답하다는 듯 보며 말했다

“언니. 뭘 그렇게 고민하는지 난 정말 이해가 안되네. 있잖아요. KBS 기자 정도 되면 검사랑 동급이에요. 뭐가 무서워서 경찰한테 못 물어봐요? 언니 밑에 있는 사람인데? 가서 족쳐요 그냥. 안불면 확 나중에 기사로 조져버리고...”


도대체, 국가에서 주관하는 시험을 거쳐 자격이 주어지며, 법률에 의해 신분이 보장되고, 법률에 의해 수사권이 주어진 검사와 “일개 회사원” 인 내가 어떻게 동급일까. 대체 이 아이는 무슨 근거로 자신있게 “기자는 검사와 동급” 이라고 주장하는 것일까. 내가 아는 검사들은 이 이야기를 들으면 뭐라고 할까. 아니, 이 새파란 수습에게 이런 어이없는 관념을 심어준 선배는 대체 누구일까.

참으로 많은 생각이 꼬리를 물고 물었지만, 그 시절의 나는 생각하는 것을 입밖에 내지 않기로 단단히 결심했던지라 ... 그런 그녀를 멍~하니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며칠 후 .

법원을 담당하던 수습기자 하나가 분을 못이겨 씩씩대며 회사로 들어오더니 법조인 대관을 열심히 찾는다.

대체 무슨 일이냐고 물어봤더니... 판결문에 대해 질문할 게 있어서 고등법원 부장 판사실을 찾아갔단다.

부속실 여직원이 없길래 그냥 판사실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판사가 당황하면서, 절차를 거친 다음에 들어오시라고 하더란다.

때맞춰 등장한 부속실 여직원은 콩튀듯 팥튀듯 펄펄 뛰면서, 마음대로 들어가면 어떡하냐며 기자를 나무랐다는 이야기다.

대체 기자가 왜 부장판사 실을 마음대로 못들어가는 거냐. 내가 부장판사 보다 하급이라는거냐. 심지어 부속실 여직원은 지가 뭔데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느냐. 판사가 그렇게 대단하냐. 면서

그 판사에게 기사로 복수하겠다며 열심히 법조인 대관을 넘기고 있더라.

고등법원 부장판사면 차관급이다. 아니, 급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고등 부장까지 올라갈 정도면 연세가 적어도 쉰은 넘기신다.

그리고 그 곳은 <관> 이다. <관> 에는 그들 나름대로 꼭 지켜야 하는 질서가 있는 법이며,  관을 방문하는 자는 그 질서를 존중해주는 것이 최소한의 예의다. 제자인 나도 설령 사적인 일로 놀러 갔다 하더라도 절대 부속실을 거치지 않고는 방문하지 않으며, 하물며 가족이라도 마음대로 불쑥 판사실에 들어가진 않는다.

그러니 20대 중반의 새파란 수습기자가 머리 허연 고등부장실에, 아무 연락도 없이 찾아가 문을 불쑥 열고 들어간다는 건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고, 그건 누가 누구보다 못함이 아닌 예의와 상식의 문제이건만

그는 <대체 내가 판사보다 못한게 뭔데> <니가 나보다 잘난게 뭐가 있어서>라는 이상한 논리로 접근하면서 분을 삭이지 못하고 있었다.



기자는 기자의 영역이, 판검사는 판검사의 영역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직역에 대한 존중과 예의없이 <내가 너보다 못한게 뭐야?> <감히 니가 뭔데>식으로  반응하는 그들에게 참 많이 놀랐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K 본부의 기자들이 유난한건가...?? 생각했었으나 청와대 부대변인이 된  M본부 여기자 출신 앵커의 책에 "카메라 앞에서 입을 다물고 있는 피의자들 에게 호통을 쳤다"고 자랑스럽게 진술한 것을 보니 비단 K본부만의 문제는 아닌 듯 하다.

기자들이 모두 파렴치하며 예의를 모르는 족속이라는 말을 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 세계에 발을 담그면서, 정말 양심적이고 이 사회의 낮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전하고자 애쓰는 올곧은 기자들을 많이 보았다. 내가 아주 좋아하고 존경까지 하는 친구 녀석도 현직 기자이며, 만약 세상 사람들을 인격 순으로 줄을 세운다면 적어도 상위 10%내에 들 수 있는 많은 기자들을 나는 알고 있다.

다만. <언론> 이나 <기자>가 법을 무시하고 자신들이 법을 <초월한> 존재라고 믿는 그 이상한 현상들을 지적하고 싶어서, 법을 무시해야 법을 견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논리의 모순에 대해, 그리고 그게 얼마나 위험 천만한 사고방식인지 말하고 싶어서 고래적 경험까지 쓰고 있는 것이다.

예전 일이라고, 요즘 기자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싶지만, 아니라는건 내가 제일 잘 안다. 법조인으로서 언론 유관 기관에 근무하는 지금. 언론사 기자들을 상대로 <보도 윤리와 법적 한계> 에 대해 종종 강의를 하곤 하는데

2번에 한번 꼴은 꼭 <아니 그런걸 다 지키고 대체 어떻게 취재를 하느냐> 심하면 <일개 변호사인 당신이 뭔데 기자에게 이러지 말아라 저러지 말아라 라고 훈시하느냐> 는 황당한 공격을 받게 되니 말이다.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의심되는 용의자가 검거되었다. 각 언론에서는 그의 범행 수법과 동기를 보도하는데 총력을 쏟고 있다. 그리고

 유수의 일간지 1면에 그의 사진과 실명이 공개된 것을 시작으로, 기다렸다는 듯 모든 언론사가 앞다투어 그의 신상을 공개하고 있다.

 피의자만 인권이 있느냐. 피해자도 보호해야 한다. 니 부모형제가 연쇄살인의 피해자라고 생각해봐라. 그렇게 택택한 소리 할 수 있겠느냐. 인간이기를 포기한 인간에게 무슨 인권이냐. 이런 감정적인 말들은 나중에 하고 법 이론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일단 이 문제에 대해서 검토해봐야 할 것은 헌법상 “무죄추정의 원칙” 을 포기하고 용의자의 신상을 공개할 만큼, 이 사회가 얻을 수 있는 필요불가결한 <공익> 이 있는지 여부와

 만약 공익이 존재한다면, 과연 언론사가 공익적 필요에 의해 마음대로 헌법적 가치를 무시하고 “용단” 을 내릴 "권한“ 이 있는가 하는 점이다.

 법적으로 말한다면 지금 피의자는 “무죄” 이다. 유죄일지 무죄일지 불명확한 상태도 아니고 아주 확고부동하게 무죄로 추정된다. 이건 내가 특별히 관대한 사람이라 그렇게 생각하는게 아니고 헌법 제 27조에 의해 보장되는 모든 국민의 권리이다.

피의자가 자백을 했더라도 유력한 물증이 나왔더라도 모든 피의자는 무죄로 추정되며, 피의자가 유죄로 되는 순간은 오로지 법원에서 판결로 그가 유죄임을 선고, 확정되었을 때 뿐이다. 바로 이 무죄추정의 원칙 때문에 피의자를 불법으로 구금하거나, 고문. 협박으로 수사하면 안되는 등등의 모든 형사소송법상의 원칙이 파생되는 것이다. (기자 교육때 여기까지 얘기하면 이런 기자들 꼭 나온다 "아니 기자가 판사보다 못하다는 말인가요?" 누가 누구보다 못한지 나은지 전혀 관심없다. 법에서 정한 각자의 영역이 있다는 말이다. 제발 좀 알아먹어라)

어색하다고? 체포, 구속 단계에서 이미 죄인 취급 당하는 사람들을 너무 많이 보아왔다고? 그건 무죄추정의 원칙을 간과하고 당연히 죄인 취급하여 보도했던 언론사의 탓이지 우리들의 잘못이거나 헌법이 문제가 아니다.

무죄 추정의 원칙의 보호를 받는 피의자이기 때문에 그의 혐의가 유죄로 확정되기 이전에는 신원을 공개해서는 안된다. 국민의 알 권리는 범죄 사실에 미치는 것이지 범인이 누구인지를 알 것에까지는 미치지 않으며, 일단 피의자의 신원을 공개하면 여론에 의해, 대중에 의해 <인민재판> 이 되어버릴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예외는 있다. 헌법에서도 “국가 안전보장, 사회질서, 공공 복리를 위한 때에는 법률에 의해 국민의 권리가 제한될 수 있음” 을 천명하고 있다. 특별히 국가적 차원에서 공공의 선을 추구하기 위해 피의자의 신상 공개가 필요하다면 공개해야 한다. 예를 들어 아직 검거되지 않은 흉악한 범죄의 용의자를 현상수배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될 수 있겠다.  

조선일보와 중앙일보는 <국민의 알권리>와 <공익> 을 위해서 보도했다고 한다. 국민의 한 사람인 나는 피의자의 신상과 얼굴에 대해, 하늘에 맹세코 조금도 궁금하지 않았지만 나 말고 다른 국민들은 궁금했을 수 있으니 뭐 그렇다 치자.

그렇다며 국민이 궁금해 하면 다 알려주는게 언론의 할 일인가?

궁금하기로 말하면야 유명인의 사생활. 내 이웃의 치부. 흔히 공인이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의 은밀한 모습 등등 한도 끝도 없다. 국민이 궁금해한다고 그거 다 알려줄텐가? 당신들이 무슨 3류 타블로이드도 아니고 자칭 1등 언론이라는 자들이 말이다.

선진국은 다들 공개한다고? 당신들이 말하는 선진국이 대체 어디인가? 내 알기로 영.미 법계의 국가들은 흉악범죄의 경우에 피의자의 신원을 공개하지만 반대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게 높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독일을 비롯한 대륙법계 국가들은 피의자 신원을 공개하지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독일과 같은 대륙법 국가다)

그래. 세계화에 발맞추어, 조선. 중앙이 그토록 좋아하는 미국에서 하는 일이니까 따라한다 치자. 혹시 아는가? 그렇게 좋아하는 미국에서는 절대로 피의자를 <범인취급> 하는 장면을 내보내지 않는다는 걸. 연장 쫙 깔아놓고 그 앞에서 수갑 차고 고개 숙이고 있는 모습이나 점퍼 뒤집어쓰고 형사의 책상에 머리를 박고 있는 모습이나, 현장 검증하는 모습 등등은 무죄추정의 원칙 때문에 절대 내보내지 않는다는 걸. 심지어 <좋은 그림> 을 위해서 유치장에 있는 피의자를 잡아 끌어다가 연출까지 시키는 행동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인권침해라는 걸.

아니, 이건 비단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 뿐만 아니라 세계 어느나라에도 볼 수 없는 해괴한 그림이며, 당신들 덕에 외국의 언론에서는 <한국의 국민들이 유독 그런 그림을 좋아하는구나>라고 생각한다는거 아느냔 말이다.

피해자는 공개하는데 피의자는 왜 공개를 못하냐고? 장난하나? 이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가? 피해자를 공개하시는 당신들이 문제다. 당연히 공개하지 말아야 한다. 공개하지 말아야 하는 사람을 마음대로 공개해놓고는 쟤도 했으니 너도 해야지. 이 무슨 김태균 도루왕 하고 있는 소리냔 말이다.

인간이기를 포기했기 때문에 인권이 없다라...나 이 얘기 듣고 정말 진심으로 무섭고 겁났다. 이 얼마나 위험 천만한 논리인가?

과장 좀 하자. 나 원래 오버 잘하는 인간이다.

아는가? 히틀러가 유태인들을 학살할 때의 명분이 바로 그런 논리였다는 것을?

서슬 퍼런 유신시절. 남산으로 무고한 사람들을 잡아가 없는 죄도 만들어 주던 그들의 논리가 바로 당신들의 논리라는 것을...??

물론. 피의자의 신원이 공개됨으로 인해서 얻어지는 이익도 있겠다.

피해자들은 어쩌면 분이 좀 풀렸을지도 모르겠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피해자라고 봤을 때 그의 신원이 공개된다 한 들 분이 풀릴 것 같지는 않다만. 경험해보지 않고는 모르니까)

여죄 수사에 조금 더 도움을 줄지 모르며, 그가 출소하여 사회에 복귀했을 때 다시 피해자가 생기는 것을 막을 수 있겠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얼굴이 공개되는 것이 두려워 범죄를 저지르지 않을 수도 있을테니 범죄 억제 효과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이익이, 헌법에 보장된 무죄추정의 원칙을 포기할 만큼 큰가... 아무리 생각해도 난 정말 의문이다.

여죄 수사에 얼마나 도움을 줄까. 그가 출소했을 때 그의 얼굴을 기억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동안 언론에서 공개했던 지존파. 박한상등의 얼굴. 난 지금 도저히 기억이 안난다). 신원 공개가 두려워 범죄를 저지르지 않으면 그게 멀쩡한 사람이지 사이코 패스인가?

하지만 그의 얼굴이 공개됨으로 인해 그의 가족이 겪게 될 괴로움과 사회적인 낙인은 어쩔 것인가. 당신들이 그토록 좋아하는 선진국에서는 하도 땅덩어리가 넓고 인종이 다양하고 남일에 관심이 없어 범죄자의 가족이 낙인찍히는 경우가 거의 없겠지만, 대한민국은 그렇지 않다는거... 당신들 정말 모르겠는가? 악플로 인한 인격침해에 그토록 격분하며 사이버 모욕죄 도입에 앞장서고 있는 당신들이 말이다.

좋다. 공개로 인해 얻는 공익적 필요보다 헌법적 가치가 무너짐으로 인해 발생하는 피해가 더 크다는 건 내 사견이다. 어쩌면 국민 대다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개로 인해 얻는 공익이 더 크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게 잘못되었다는게 아니다.

그렇다면

국민의 의견을 수렴해서 법률을 제정하는게 우선 할 일이다. 헌법에 <법률에 의해서만 > 국민의 인권을 제한할 수 있다고 명시되어 있으니까. 원칙에 대한 예외는 아주 제한적으로 인정되어야 하니까. 그리고 의견을 수렴하기 위해 언론이 나서야 한다. 그 전에는 언론이 마음대로 피의자의 신원을 공개해서는 안된다. 왜냐고? 헌법에 무죄추정의 원칙이 보장되어 있으니까. 그리고 우리나라는 법치주의니까.

만일 <아동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 3인 이상을 살해한 자, 상습 강력범의 경우에는 신상을 공개할 수 있다> 라는 법이 제정된다면 그건 대 찬성이라는 뜻이다.

기자가 검사와 동급이라서. 판사보다 못한게 없어서. 그런거 저런거 다 지키면 취재를 못한다는 이유로, 법을 무시하고, 자신들을 초법적 존재라고 믿는 당신들에게

<공익적 필요성>여부를 판단해서 헌법적 가치를 파괴할 수 있는 권한을 주는 건 위험 천만하지 않은가. 미안하지만 난 그 정도로 언론을 신뢰하지 않으며 그 세계에 발 담근 이후로는 더더욱 신뢰하지 않으니 말이다.

과연 이런 경우에 피의자의 신원을 공개하는 것이 옳은가 옳지 않은가. 국민의 의견을 수렴하고, 아니 그러기 위해서 이런 저런 법 제도와 이론을 소개하고 이익과 부작용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그러는 과정에서 여론을 형성하는 것이 당신들의 할 일이다. 피의자의 출소 후 또다른 범죄가 염려된다면, 지나치게 양형의 기준을 낮게 잡고 있는 사법부의 관행과, 아무도 모르게 가석방을 해서 위험한 자를 다시 사회로 복귀시키는 교정 당국의 안일한 태도를 꼬집어야 한다. 당신들 마음대로 판단해서 피의자의 신상을 공개한 다음에, 누구도 괜찮다고 한다는 둥 선진국은 다 이런 다는 둥. 핑계 늘어놓지 말고 말이다.

왜 이렇게 구구절절 당신들에게 반대하냐고. 그것 좀 공개하면 어떠냐고.

현 정국이 진심으로 무섭고 화가 나는 건. 나라의 근간인 법치주의를 망가뜨리기 때문이다. 인터넷에 글 좀 올렸다고 법전에 있는 줄도 몰랐던, 이미 사문화된 <전기통신 기본법> 을 끌어들여 구속을 하지 않나. 자신들의 입맛에 딱 맞는 해괴한 악법들을 만들고자 동분서주하는 등의 작태를. 바로 그걸 지적해야 할 당신들마저 법치주의를 망가뜨리고 있기 때문에 화가 나는거다. 막말로 오늘 당장 정부에서 언론사 통폐합 조치를 발표한다면, 이미 법치주의를 무시하고 초법적 존재가 된 당신들이 무슨 근거로 이 막가는 정부를 비판하겠는가?

흉악범이니까. 공익을 위해 필요하니까 공개해도 좋다고. 그걸 당신들이 판단하겠다고. 대관절 누가 당신들에게 그런 권한을 주었단 말인가? 당신들이 툭하면 뱉는 말을 이젠 내가 하고 싶어진다. <도대체 니가 뭔데 감히?>

만약 당신네 회사에 해악을 끼치는 범죄를 저지른 용의자가 있다고 했을 때. 별로 대수롭지 않은 범죄이고 일반 국민들은 관심도 없는 그 용의자의 신상을 당신들 마음대로 공개하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할 것인가?

아니, 만약 내가 당신들 신문사에 반대하는 논지의 글을 어디엔가 발표해서 당신들 심기를 건드린 다음. 내가 대수롭지도 않은 죄로 입건된다면 ... 1면 톱 기사에, 일개 힘없는 변호사인 내 전신사진을 실어 주리라는데... 내 옷장에 있는 옷 전부 다 걸수 있다

상식이 있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미안하다. 모 언론사가 1면 탑에 신정아씨의 누드 사진을 떡~ 하니 게재한 그 순간. 내가 언론에 대해 갖고 있던 아주 조그마한 상식과 기대도 무너져 버렸다. 그리고 당신들이 어떻게 생각하건, 그건 절대로 내 잘못이 아니라고 난 자신한다.

언론은 법과 제도와 권력을 견제하는 것이 사명이다

제발 당신들이 나서서 법과 제도와 권력인 척 하지 말아라. 부탁이다.

출처: 그깟 공놀이 (레지나 블로그)  http://blog.naver.com/esteelauder/120062710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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