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에 해당되는 글 7건

  1. 2024.06.14 고로의 쓸모
  2. 2024.06.14 'K남자'라는 판타지 2
  3. 2024.06.14 우리도 그들처럼
얄라리얄라2024. 6. 14. 13:44

 17개월 여의 기다림 끝에, 지브리파크를 다녀 왔다.
 
 지브리파크는 스튜디오지브리의 작품들 속에 들어가 보는 판타지를 제공해 준다. 어트랙션이라곤 회전목마 뿐인데(BGM마저 '인생의 회전목마') 그 조차도 지브리 애니메이션 속 탈 것들을 체험케 해준다는 의미가 강하다. 가오나시 옆 기차 자리에 앉아 볼 수도 있고, 포르코와 주먹다짐을 해볼 수 있으며, 아리에티처럼 소인이 될 수도 있다. 너구리들의 작전회의에 동참해 볼 수 있고, 포뇨와 물고기 파도를 타 볼 수 있으며, 고양이 버스를 타 볼 수 있는가 하면, 지로가 먹던 시베리아 카스테라를 사 먹어 볼 수도 있다. 유바바의 사무실이나 고양이 탐정사무소도 구경할 수 있다. 하울의 성 안에 들어가 휘저어 돌아다녀볼 수 있고, 키키와 아야의 집을 방문할 수 있으며, '지구옥'에 들러서 발코니 바람을 쐬거나 괘종시계의 실제 퍼포먼스를 볼 수도 있다.
 
 상당수의 공간들이 사진 촬영 금지 구역이다. 너무너무 사진을 찍고 싶게 만들어놓고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한다니, 고약한 변태 취향이라 여겨질 정도다. 하지만 덕분에, 사진을 찍었더라면 어쩌면 쉽게 지나쳤을 것들을 하나하나 꾹꾹 눌러 눈에 담을 수 있게 되기도 한다. 소중한 풍경들을 눈에 담으려다 보니 숨어있는 장치들도 발견하게 되고 작은 소품들도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사진을 못 찍게 하는 건 그런 의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뭐, 인간의 기억력이 제한적이란 점을 이용해 재방문을 유도하려는 전략일 수도 있겠지만. ㅋ
 
 사진을 찍을 수 없는 대신 맘껏 만져볼 수 있다. 각종 소품들을 손대 볼 수 있고 가구의 서랍이며 냉장고 문을 열어볼 수 있다. 그 안에조차 깨알같은 소품들로 채워져 있다. 열어보고 만져보고 건드려보면서 시각적 재미 못지 않은 촉각의 즐거움이 생긴다. 공간의 체험을 제공해준다는 점이 훌륭해 보였다.

 

 
 세앙이는 특히 마법의 공간들에 오래 머물렀다. 너저분하지만 환상적인 하울의 방에서 각종 마법 소품들을 넋을 잃고 봤고, 아야네 집에서도 기괴하고 역겨우면서도 재미있는 것들이 가득한 마녀 작업실에 빠져들었다.
 
 개인적으로는 '마녀의 계곡' 내에서 키키가 일했던 빵집에서부터 시작하는 동선이 마음에 들었다. 빵집 뒷마당으로 나가 계단을 올라가면 키키가 거주하던 방이 나오는데, 그 방을 구경하고 나와 옆 복도로 쭉 걸어 나오면 마법 책만 취급하는 서점이 나오고 그 서점을 나와서 계단을 내려 오면 소피가 살던 동네의 풍광과 함께 소피의 모자 상점이 나타난다. 모자 상점에서는 물론, 작품에 나온 화려한 모자들을 팔기도 한다.
 
 하루에 모든 구역을 돌아볼 것이라던 계획은 애저녁에 불가능한 미션이었다. 물리적 거리가 멀기도 했지만, 공간이며 소품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다 보니 7시간으로는 턱도 없었다. 줄 서서 기다리는 시간도 만만치 않았고. 모노노케 마을은 애초에 제끼기로 했었지만, 지브리파크 개장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꼭 가보겠다고 다짐하게 만들었던 가장 큰 요소인 사츠키와 메이의 집을 보지 못한 것은 너무너무 안타까웠다. (아마도) 지브리파크 측의 의도대로, 재방문을 계획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지브리파크는 스튜디오지브리의 후계자로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던 미야자키 고로의 쓸모를 발견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생각보다도 훨씬 잘 만들어내었다. 다만, 사실상 망작이었던 <게드전기>나 <아야와 마녀> 같이 자신의 연출작은 충실히 반영했으면서, 정작 스튜디오의 양대 축이었던 다카하타 이사오의 주옥같은 작품들은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뤄진 것 같아 그 점이 못내 아쉬웠다.
Posted by the12th
만끽!2024. 6. 14. 13:38

하도 기사가 많이 뜨길래 호기심에 일본드라마 '아이라브유'를 보고 있다. 일본 TBS 방송물인데, 이런 걸 거의 동시에 합법적으로 쉽게 볼 수 있는 것도 결국은 넷플릭스 덕이다. 넷플릭스가 만들어 준 위아더월드.
 
한국인 남주를 내세워 한국의 로맨틱 코미디 장르를 답습한, 말하자면 '한국식 일본드라마'가 되겠다. (아니, 차라리 일본식 한국드라마라고 해야 하나?? ㅋ) 완벽한 한국인 남주를 구현하기 위해 배우도 한국인을 그냥 데려다 썼다.
 
채종협이 연기한 윤태오는 그간 한국 드라마들에 나오는 남주들의 매력포인트를 다 갖다 때려박아 넣은 종합선물세트같은 캐릭터다. 잘 생겼고 키도 크고 몸도 좋은데, 잘 웃고 친절하고 한 여자만을 사랑하며 그 마음을 표현하는 데 꾸밈이 없다. 연하라서 귀엽지만, 또한 남자다워서 여주를 보호하는 데 몸을 사리지 않는다.
 
드라마는 여자주인공이 상대방의 눈을 보면 그의 마음을 읽는다는 설정으로 '판타지' 장르를 자처하지만, 사실은 윤태오의 존재 자체가 판타지다. 한국의 드라마들이 그동안 곰비임비 쌓아간 이상적인 남성상이 결국 얼마나 현실을 크게 왜곡했는가를 드라마틱하게 보여준다. ㅋ
 
이렇게 그려놓았으니 일본 여성 시청자들에게 어필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중년 한남인 내가 봐도 채종협의 사랑스러움밖에 안 보이더라. 이거 보다가 관심 밖이었던 <무인도의 디바>도 찾아 보게 될 정도다(재미는 없다).
 
현실감 없는 시놉시스이지만, 의외로 디테일한 고증을 잘 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일본인 유학생으로 나오는 윤태오의 일본어 발음이 정말 딱 유학생 수준으로 설정돼 있다는 것이나, 한국인이 일본 회사에 들어갔을 때 빚어지는 일들의 묘사가 현실감 있게 고증됐다는 이야기들이다. 허무맹랑하지만은 않게 매우 그럼직하게 보이도록, 꼼꼼함이 뒷받침됐다는 뜻이겠다.
 
상대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초능력의 여주인공이 남주가 하필 한국어로 마음의 소리를 내는 통에 그걸 읽어내지 못한다는 설정인데, 실제 일본 지상파에선 남주의 마음의 소리가 나올 때 자막처리를 안 해줘서 시청자들이 여주의 답답함을 함께 느끼게 해준다고도 한다. 그 바람에 자막버전을 또 찾아보는 n차 시청이 붐이라고도 하고, 또 그 때문에 한국어를 배우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고 하니 일본드라마를 통해 한류가 이어지는 해괴한 현상이기도 하다.
 
마냥 국뽕에 젖을 일만은 아니다. 한국 드라마의 강점을 배워 자신들의 것으로 흡수해 소화하려는 일본 콘텐츠 업계의 시도로 보여, 우리로선 긴장감도 챙겨야 할 것 같다.
 
드라마 설정의 곳곳에 '친환경'을 배치한 것도 인상적이다. 여주인공은 버려지는 카카오허스크로 초콜릿 등 가공 제품을 만드는 회사의 대표, 남자주인공은 멸종 위기종인 해달을 연구하는 유학생이다. 친환경 비눗방울이라든지 배달음식을 선택할 때 친환경용기를 쓰는지 살펴본다든지 하는 장면들이 자주 나오면서 시청자들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친환경 생활을 받아들이게 만든다. 달콤한 로맨틱 코미디장르로 시청자들을 유인해 공적 가치를 전파하는 영리한 방식은, 특히 우리가 배워야 할 부분이다.

 

Posted by the12th
만끽!2024. 6. 14. 13:35

애플TV+의 런칭작이라던 <더 모닝쇼>를 보았다.
 
개인화 디바이스 시대를 만들어 가구 시청 기반의 텔레비전 산업에 위기를 몰고 왔던 애플이, 공중파를 위협하는 OTT를 통해, '레거시 미디어의 속살'을 소재로 콘텐츠를 만들었다는 점부터가 내 흥미를 잡아 당겼다. 물론 어쩌면 애플은 애초부터 구닥다리 방송국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을 즐기려 한 것일지도 모를 일이긴 하지만. ㅋ
 
뉴욕에 소재한 50년 전통의 가상의 방송국, UBA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다룬 이야기이다. 시즌 1은 미투운동, 시즌2는 코로나19, 시즌3는 레거시미디어의 위기라는 현실적 소재들을 다루면서 공감을 산다. 시즌제 드라마들이 늘 그러하듯, 완성도는 뒷 시즌으로 넘어갈 수록 떨어진다. 시즌 1만큼은 매우 높은 몰입도를 선사해 준다.
 
에피소드들과 한 시즌을 둘러싼 플롯이 훌륭하다. 단순한 병렬형 전개가 아니라서 몰입해 보지 않으면 행간의 스토리를 놓치고 지나가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다. 그렇다고 피곤한 몰입도를 요구하는 건 아니라서, 적당히 집중해서 보다보면 적절한 시점에 이야기의 종합성을 깨닫게 되는 경험을 준다. 시놉시스 자체는 허술한 면이 많은데, 플롯의 단단함이 영리하게 그것을 보완해 준다.
 
'더 모닝쇼'는, 방송이라는 게 으레 그러하다는 듯, 구성원들의 공고한 가식과 위선으로 유지되는 UBA의 인기 아침 보도 정보 프로그램이다. 송출되는 화려한 외양과 달리 안으로는 불안과 그늘이 짙게 배어 있다. 표리부동한 기존의 방송 관습을 대표하는 것이 주인공인 알렉스 레비(제니퍼 애니스톤)인데, 그녀의 곁에 우연히도 가식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기자 브래들리 잭슨(리즈 위더스푼)이 등장하면서 프로그램은 전례없는 투명성과 정직을 요구받게 된다. 그 과정들에서 일어나는 거센 소용돌이가 이 드라마 시리즈가 보여주는 재미 포인트가 되겠다.
 
개인적으로는 코리 앨리슨(빌리 크루덥)이라는 캐릭터에 매력을 느꼈다. 드라마 초반에 보도국장이었던 그는 브래들리 잭슨의 솔직함을 UBA에 끌고 들어온 사람이다. 그리고 방송국의 고위직임에도 불구하고 권위를 드러내는 대신 진보적이며 페미니스트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흥미로운 캐릭터이다. 일관되게 선함을 유지하지만 그는 끝내 성공하진 못한다. 마치 선한 것이 곧 능력은 아니라는 듯이.
 
시즌2부터 코리가 사장이 되면서 보도국장 자리에 스텔라 박(그레타 리)이 등장한다. 한국계 인사로 그려지고 실제 배우 역시 한국계다. 콘텐츠에 아시아인으로 한국계를 등장시키는 게 요즘 글로벌 콘텐츠 업계의 유행인가 보다. 한국 문화의 위상을 다시 한 번 느끼게 해준다.
 
'젊은 여성 동양인 보도국장'의 등장도 그러하지만, 드라마 전반에 PC가 강력하게 영향을 행사한다. 주요 역할을 여성들이 맡고 있고 유색인종의 비율도 높다. 중년 백인 남성들은 나쁘거나 불쌍하게 그려진다. ㅋ 미투, 낙태, 인종차별 등의 사회적 문제가 소재로 등장하고, 동성애도 자연스럽게 묘사된다. 다만 일방적이진 않아서 사회적 이슈들을 다룰 때는 명암을 같이 조망하려는 시도도 엿보인다. PC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에겐 불편한 부분도 있을 수 있다.
 
제니퍼 애니스톤은 이제 레이첼 그린 시절의 상큼함은 잃어버렸지만, 그 자리에 원숙한 연기력을 채워넣었다. 레이첼에서도 그랬지만 '속물적인 여성 캐릭터'를 너무나도 납득되게 그려낸다. 리즈 위더스푼과 둘의 호흡도 좋다. 재미있게도 두 사람은 <프렌즈>에서 자매로 등장한 적이 있다. 그 때 구성됐던 둘의 화학 작용이 이 드라마에서 마침내 완성된 느낌이다.
 
알렉스 레비는 야먕과 이기심으로 세속적 성공을 향해 내달려가는 사람이지만, 결정적 순간에 선을 넘지 않는다. 반면 브래들리 잭슨은 에누리 없는 정의와 원칙을 앞세워 성공하게 되지만 스스로 본인이 설정한 엄격한 원칙을 위배하게 된다. 두 사람은 물과 기름처럼 섞이기 어려운 캐릭터다. 정치적으로 알렉스는 아마도 보수적일 것이고, 브래들리는 필시 진보적일 것이다. 서로 다른 캐릭터, 서로 다른 입장, 서로 다른 지향점을 갖고 두 사람은 번번이 갈등하고 부딪치지만, 또한 결정적인 상황에서 손을 잡고 연대한다. 그것은 여성으로서의 연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저널리스트로서의 연대이기도 하다. 판이하게 다른 생각과 가치관에도 불구하고, 언론인으로서 동의하는 지점에서만큼은 굳건히 어깨를 겯고 기꺼이 함께 싸운다. 딴은 서로를 위해, 그리고 실은 저널리즘을 위해서 말이다.
 
그들처럼 우리도, 그럴 수 있을까...?
Posted by the12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