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나2007. 4. 8. 00:30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최악의 황사가 휴일을 뒤덮었던 다음 날,
 황사가 지나간 뒤의 서울 풍경을 보여주기 위해
 촬영기자와 63빌딩 옥상에 올라갔다.
 향후 1년동안 못 나갈 마지막 '현장'.

calvin.
Posted by the12th
후일담2007. 4. 7. 10:39



 

  시트콤이 허구에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때때로 어딘가에 카메라를 박아놓은냥, 우리 삶은 한 편의 잘 짜여진 시트콤이 되곤 한다.

 아침 보고를 마치고 신문을 들척거리며 적당히 여유를 찾을 무렵, 캡에게서 전화가 왔다. 법조 파트에서 사이비 기 치료사에게 사기 혐의로 억대 배상 판결이 났다는 내용으로 리포트를 하는 모양인데, 우리가 그걸 받치는 꼭지를 맡아야 한다는 거였다. 기 치료가 무엇인지, 어디까지가 허용 범위인지, 실태가 어떤지 등등에 대한 리포트를 준비하라신다.

 시간을 보니 얼추 아침 편집회의 직후 쯤이다. 대략 어떤 시츄에이션인지 상황이 그려졌다. 꼰대들, 법조 파트의 아이템 개요를 보고 한 마디씩들 했겠지.

"아니 그럼 대관절 기 치료는 어떤거래?"
"어디까지가 사기라는 거야?"
"시청자들이 이런 걸 궁금해 하지 않겠어?"

뭐 이런 말이 오간 끝에,

"그럼 뒤에 하나 더 받치지, 뭐",

... 이랬을 것이다. 요즘 유행하는 팀장발 총은 대부분 그런 모양새로 발사되곤 한다. 이번 총알받이는 최근 몇일 좀 놀았던 내가 된 것일테고.

 일 할 때가 되었으니 주어진 총을 튕길 힘은 없다. 그렇지만 기 치료에 대해 백지상태인 사람에게 하루 안에 뚝딱 심층성 리포트를 만들어 내라는 고약한 요구가 어디 있나? 내 기가 다 막힐 지경이었다. 부담감에 짓눌려 난감해 하고 있던 차에 이 총의 빌미가 됐던 리포트의 주자인 법조 L선배가, 뒤에 받치는 리포트가 생겼다는 사실을 알고는 전화를 걸어 왔다.

"그 리포트는 뭐하자는 거에요?"
 아이구, 제가 드리고 싶은 질문.

"아침에 판결문 챙기면서 단신 용이겠거니 하고 올렸더니 법조 반장이 리포트 거리로 만들어 올렸더라고... 기 치료하고 별 상관 없는 사이비 교주라고 설명을 해도 듣지를 않아요."
 그럼 저는 어째요... ㅠ.ㅠ

"여하튼 내가 점심 때까지는 판결문을 반장 코앞에 들이대서라도 킬 시켜 볼테니까 그렇게 알아요."
 전 선배만 믿을 따름입니다... 아멘.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니 일단 오전 중에 속성으로라도 공부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라인 안에 있는 수습 두 명까지 동원해 여기 저기 전화를 돌려대고 나니, 얼추 이야기의 얼개는 마련이 됐다. 기 치료라는 게 사실은 기 치유의 잘못된 표현이라는 것, 기 치유는 라이센스도 없고 정통성도 딱이 없어 제각각이라는 것, 의료행위로 구분되지 않기 때문에 보건복지부는 전혀 관리를 하지 않고 있다는 것, 의학계에서는 일종의 보완 의료 행위로서 기 치유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있으며 실제 미국에서는 에너지 힐링이라 해서 치료에 적용되고 있다는 것...

 문제는 '그림'이었는데, 기 치유를 하는 상황이 섭외되지 않았다. 게다가 대부분의 기 치유소는 검증받지 못해 일정정도 사이비 성격을 띠고 있는지라 노출되는 것을 부담스러워 했다. 그렇다고 마냥 주저 앉아 있을 수는 없는 터여서, 일단 인터뷰가 가능하다고 한 어느 기 치유 수련원으로 향했다.

 그 사람들이 홍보 효과를 노리고 부러 설정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우리가 도착했을 때 마침 기 치유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래서 서둘러 인터뷰를 하고, 그림을 '만들어' 댔다. 기 치유하는 장면도 찍고, 명상을 하는 상황도 부탁해서 마구 마구 '만들어' 댔다.

 열심히 그림을 '만들어' 대고 있는데 법조 L선배가 다시 전화를 해왔다. 오호, 희소식을 전해 주시려나? 한껏 부푼 마음으로 다소곳이 전화를 받았다.

"아 미안해서 어쩌죠? 킬 시켜 보려고 했는데 죽어도 만들래."
 OTL....

 "반장의 마지막 얘기가, 네 얘기는 충분히 수긍이 된다만 우리 리포트 때문에 사건 파트가 총까지 맞았는데 만들어야 하지 않겠냐는 거에요.."
 아놔... 고양이의 쥐 생각... 주객의 전도... ㅡ,.ㅡ^

 이쯤 되면 그림도 '만들어' 대고 있겠다, 결국 하는 수밖에 없다. 급하게 인터뷰 해 줄 의사를 섭외하곤 또 냅다 뛰어 댕겼다. 그나마 다행으로 이 의사 양반이 비교적 영양가 있는 얘길 많이 해 주었다. 이로써 리포트는 겨우 구색을 갖출 수 있게 됐고. 대략 1분 20초 정도의 제작은 가능한 분량. 휴, 빵구내는 일은 어쨌든 막을 수 있겠다는 작은 안도감이 들 무렵, 캡이 전화를 걸어 오셨다.

 "어떻게, 잘 되겠나? 편집팀에서 아주 큰 관심을 보이고 있던데... 1분 50초 잡혔다니까 잘 만들어 보소."
 반나절 시간 주고 심층성 총을 쏘더니 "큰 관심"을 보이다 못해 1분 50초나 할애해 주셨단다. 된장, 하나 마나한 소리일텐데 그 긴 시간동안 도대체 무슨 소릴 지껄여야 된담?

 1분 50초씩이나 잡혔다면 제작 시간이 넉넉한 것만도 아니어서 서둘러 회사로 돌아왔다. 들어와서 9시 뉴스 가편집안을 봤는데, 어절씨구? 이날 기막힘의 하이라이트가 거기 준비돼 있었다. 내가 맞은 총의 원인을 제공했던 L선배의 법조 리포트가 그만 단신 처리되는 것으로 결정난 것이었다. 그야말로 배 보다 큰 배꼽. 아놔... 난 대체 뭐가 된거니...?

 결국 난 시의성 없는 리포트를 또다시 감놔라 배놔라 하며 읊어대는 모양새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까지 시간에 헐떡대며, 또 테이프를 들고 뛴 것은 물론이고 말이다.

 시트콤이 허구에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시트콤이 현실에서 펼쳐질 때, 지켜보는 이들에게야 '코메디'인 어처구니 없는 시츄에이션들이 정작 거기에 닥친 캐릭터에게는 눈물 없이 극복할 수 없는 '비극'이라는 점 또한 분명해진다.

calvin.

Posted by the12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