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6'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14.06.07 길고 깊은 밤입니다.
재활용창고2014. 6. 7. 17:52



 이 글은 지난 5월 8일 밤, 회사를 지키며 사내망 게시판에 올린 글이다. 유가족들과 대치하던 그 새벽에 이 사안을 리포트로 제작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철저히 회사 입장 편에 선 라인업이었다. 나는 리포트를 내 이름으로 제작하라는 지시는 거부할 수 있었지만, 결국 방송이 나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런 방식으로, 이런 편집 구성으로 뉴스가 나가면 정말 회사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이를 것이라고 부장에게 읍소를 했지만, 부장도 그 결정을 거스를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본부장에게 건의해 보겠다" 했지만, 그건 사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말과 다름 없었다. 무력감이 밀려들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이 위기 상황에서 아무 힘이 없다는 절망감에 빠져 멍하니 있다 사내망을 찾았다. 그 기록을 블로그에 담아둔다.

=============================================================================================

깊은 밤입니다. 

회사에 들어온지 11년째, 

아마도 그 기간 동안 제가 느껴보는

가장 긴 밤으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또한, 코비스 게시판에

긴 글을 써 보는 것 역시 처음이네요.


저는 개인적으로는 

지적되고 있는 보도국장의 발언이

와전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당시 그 발언의 현장에서 

직접 들은 당사자의 얘기에 의하면 말이죠.

우리 언론이 흔히 했듯이 맥락 거두절미하고 

자극적인 특정 발언이 "보도"됐을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게 다일까요?

정말 그 말 한마디로 이 어마어마한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오늘의 이 일에 앞서 

안산 현장에서 일찌감치 유가족의 싸늘한 반응을

체감했던 입장에선 그게 그렇지가 않습니다.

사고 이후 우리 뉴스의 보도에 대한 

실망감, 불만, 분노가 켜켜이 쌓여오다

국장이 했다는 자극적인 표현이 촉매제가 돼

폭발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오히려 온당합니다.


우리 뉴스가 문제가 없었다고요?

수뇌부에서는 "문제가 된 점도 있지만 

대체로 잘 보도했다"고들 하시죠.

같은 말이지만 저는 달리 할게요.

"대체로 잘 보도했지만 

문제가 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고요.

그리고 그 문제들이 당사자인 유가족들에게는

큰 상처가 되었다고요.


40기 후배들의 문제제기에 대해서도

색안경을 끼고 보는 분이 계시더군요.

이제 갓 회사에 입사한 41기 후배들은 어떨까요?


얼마 전에 41기 수습기자 후배들에게

과제를 내주었습니다. 

KBS, MBC, SBS, 그리고 이번 사고를 계기로 

화제가 되고 있는 JTBC의 세월호 관련 보도를

모두 모니터링해 보고 비교 분석한 보고서를 제출하라고 했죠.

이 친구들은 우리 뉴스를 어떻게 보았을까요?


놀랍게도 대부분 비슷한 시각,

그러면서도 정확한 시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 친구들, 회사에 갓 들어온 터라 

회사에 대한 자긍심이 무척 강한 상태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들어볼 필요가 있겠죠.


요컨대, 우리 뉴스는 밖에서 보았던 것보다

심층적이고 사고의 원인도 잘 지적했고, 

편집 구성도 좋고, 시청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제작도 잘 됐고,

타사 뉴스에 비해 전반적으로 잘 제작이 됐지만,

현장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데 소홀했고

정부 특히 청와대에 대한 문제제기는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편향적인 시각일까요?

JTBC에 대해서는 또한 정확하게

앵커의 힘이 크고 현장 목소리를 잘 전달하려 했지만

너무 감정에 치우쳤고, 개별 리포트의 완성도가

떨어진다고 평가했습니다. 


41기 후배들이 우리 뉴스에 대해 지적했던 부분만 

몇몇 문장을 직접 인용해 보죠.


"사건 관련자 및 책임자들에 대해 고루 보도하고는 있으나

청와대는 유독 그 대상에서 빠지는 경우가 잦다... 

이러한 경향은 시청자들이 더욱 KBS뉴스에 대해 

신뢰하지 못하게 한다는 점에서 아쉬움."


"실종자 가족들을 위한 의료 지원이 시급하다는 기사는

적절했으나, 바로 이어서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이

의료진을 보강하라고 지시했다는 단신이 이어진 것은

정부의 정책을 홍보하는 것과 같다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KBS는 특히 당국이 대규모 구조작업을 시행한다는 점을

4사 중 가장 크게 강조했다 (경비함정 81척, 헬기 15대,

특전사 150명, SSU 170명, 200명의 구조인력, 어선 수십척 등

4사 중 수치가 가장 컸음)"


"해경을 비롯한 구조 당국의 초기 대응이 미흡했던 점

혹은 해경과 언딘 및 세모 그룹 간 유착 관계에 대해서는

비판적 관점을 견지했던 반면 사고 대처과정에서

정부 측 인사들의 여러 실책성 행동들에 대해서는

거의 보도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상대적으로 진도나 안산 소식 등 현장 소식이 부족해 

보였습니다. 두 차례 이시각 현장 꼭지와 한 희생자 

스토리가 아니었더라면, 생생함, 우리 국민에게 와 닿는

실질적인 이야기가 없는 것처럼 느껴졌을 것 같습니다.

보도의 연성화가 아닌, 상대적 약자라고 여겨지는

세월호 관련 가족들의 입장을 이야기해주는 리포트가

필요하지 않나 자문해 봤습니다"


실종자 가족들, 그리고 이후 결국 유가족이 된 

그들이 일관되게 언론에, KBS에 요구한 것은 

자신들이 눈으로 보고 있는 사실을 

보도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빠른 구조를 독려하고 지지부진한 정부를 

혼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뉴스는 편집이나 제작 등 만듦새에 있어서 

높은 수준을 보여줬지만, 막상 희생자 가족들이

요구하는 것은 들어준 게 거의 없습니다. 

정부의 발표를 확인 없이 인용보도 했고,

정부의 실책을 비판하지 못했습니다.

"실종자 가족들은 박근혜 대통령의 말에

박수로 화답했습니다"와 같은 몇몇 리포트로

도리어 그들을 더 분노케 했을 뿐이었죠. 


이번 사고의 보도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이런 대참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감시자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 데 대한 도의적인 사과를 담은

리포트라도 방송하자고 수차례 제언했었습니다.

일부 오보에 대해 앵커가 사과멘트를 하도록 하자고도

제안해 봤습니다.

하지만 무엇때문인지 

우리는 시청자에 대한 사과에 무척 인색했고 

지금껏 공식적인 사과는 한 마디도 KBS에서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수많은 국민들이 죽어간 아이들에게 

"미안하다, 미안하다" 사과하는 와중에도 말이죠.


도의적으로라도 고개를 숙이며 나아갔다면

희생자 가족들의 분노는 저만큼 커지지 않았으리라

저는 생각합니다.

그들도 수신료를 내는 우리 회사의 주인인데

사과 한 마디도 아까워 하는 우리는 

그들에게 너무 교만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리고 오늘 우리는 

"조문 갔던 보도본부 간부들이 폭행·억류당했습니다"는

제목으로 회사의 공식 입장을 내놓았습니다.

저는 우리 회사가 정말 어디로 가는건지 

참담하고 또한 불안하기만 합니다.


몇 해 전부터 후배들 사이에서

"난파선에 올라탄 거 아니냐"는 

자조섞인 우스개 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세월호가 침몰하는 모습을 

제 눈으로 보고나니,

그 말의 의미가 시각적으로 너무나도 잘 와 닿습니다.

저를 비롯해 후배들의 불안감은 너무 큽니다.

어찌보면 선배들이야 정년퇴직으로, 간부 임기 만료로 

'퇴선'하면 그만일 수 있습니다.

객실에 남아 있는 후배들은 어떤가요?

"KBS는 좋은 회사다"는 안내방송을 믿고 그냥 있어야 하나요,

아니면 조금이라도 젊을 때 침몰하는 회사에서 뛰쳐 나가야 하나요?


그렇게 되기 전에, 후배들은

앞으로 오래오래 회사 다녀야 하는 입장에서 

내 회사 침몰하는 것 막아 보자고,

눈물 흘리며 메아리 없는 외침으로

애써 비어있는 평형수를 꾸역꾸역 채워넣고 있는게 아닌지요?


calvin.


Posted by the12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