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듦2014. 6. 24. 14:43




"왜 저보고 친일이다, 반민족이라고 말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단 한 번도 그가 "친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한일합방은 조선의 무능 때문"이라는 게 핵심인

일제의 '식민사관'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그의 '역사인식'에는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심지어 그 역사 인식도, '자연인' '언론인' 문창극에겐, 

너그럽게 생각해, 문제 삼을 수 없겠다 여겼다.

그저 '대한민국의 총리'가 품을 역사인식으론 

치명적인 결격 사유라고 여겼을 따름이다.

우리 보도도 일관되게 그 지점을 문제삼았을 뿐이다.


그러니 졸지에 "친일" 인사가 된 그는 억울할 수도 있겠다. 

'식민사관'을 갖고 있는 것과 

일제에 적극적으로 부역한 '친일'은

엄연히 그 범주가 다르다.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이 비뚤어졌다고 한들,

민족을 팔아먹어 개인의 영달을 탐하는 행위를 

곧바로 한다고는 볼 수 없는 법이다. 

"친일"은 명확한 행동을 기반으로 정리돼야 한다.

"친일"이라는 딱지를 붙일 때는 

좀 더 꼼꼼히 따져 붙일 일이다.


그건 "종북"이라는 딱지도 마찬가지다.


북한을 추종하는 것과 북한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 사이에는

명백한 차이가 있다. 

통일을 지향하고, 통일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분단국가라면,

이 차이에 대한 이해는 필수불가결이다. 


그런데 이 정부는 도리어 

자신에 대한 비판 세력 전부를 "종북"으로 내몰아

갈등과 분열을 키우고 권력을 유지하는 데 이용해 왔다. 

주장의 맥락을 자르고 정황과 취지를 짓뭉개 가며 

'종북 몰이'를 정치적 반대파를 숙청하는 데 요긴하게 써먹어 왔다. 

그 선동에 문창극과 같은 극우 언론인들이 앞장서 왔음은

두 말 하면 잔소리다. 


문창극은 이번 일을 계기로 

언론인으로서 주필로서 스스로의 과거를 돌아볼 수 있었을까?

단순히 억울함만 남았다면, 그 자신에게나 우리 사회에게나

이번 소동은 그저 소모적인 일이었을 뿐이다. 


calvin.

Posted by the12th
떠듦2014. 6. 12. 15:27




문창극 동영상 풀버전을 찾아 봤다. 하필 중앙일보 홈페이지에 떴더라.
맥락이 왜곡됐다는 주장들에 대한 옹호 차원일까?


무려 65분짜리. 길기도 하다. 

다 들어보니, 이해가 되기는커녕 더 한심하다.

한국 교회의 아전인수, 견강부회의 코어를 보는 것 같더라.


요컨대 전체 내용은 이렇다.

- 하나님은 우리나라를 어떻게 쓰려고 한 걸까?
- 우리민족은 게으르고 일하기 싫어하고 더러웠다.
- 그래서 시련을 준거다. ex>한일합방, 분단, 6.25까지.
- 그 시련을 통해서 우리나라는 이만큼 발전했다.
- 하나님이 쓰고자 하는 나라로 더욱 정진하자.


스스로를 이스라엘 민족으로 여기고 이 곳을 가나안으로 여기며 

선민의식에 가득차 있는 가치관 자체부터 거북하기 짝이 없다. 
모든 일의 끝을 기독교로 갖다 대는 '기승전敎'의 단편적이고 한심한 논리는 
저 자가 대체 무슨 논리로 '주필'씩이나 한 건지 기가 막힐 따름이다.


가령 이런 식이다.

- 게으른 이 민족에게 근면하라고 깨우친 것은 기독교다.
- 소련의 붕괴는 레이건이 고르바초프를 선교했기 때문이다.
- 미국이 쇠퇴하고 있는데 그 뒤 하나님이 쓰실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이건 뭐, 거의 과대망상 수준이다.


문제가 됐던 발언 외에도 거슬리는 표현이나 사고의 수준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추려보면 이렇다.


- 나라라는 건 비행기의 1등석이냐 3등석이냐와 같다. 어느 자리에 앉아있느냐에 따라 대접이 다르다.

(나라의 존재 가치를 외부로부터 대접받기 위한 수단 정도로 보고 있음)


- 구한말 서양 선교사들이 바라본 조선은 더럽기 짝이 없는 나라였다. 깨끗한 일본과 비교됐다.
(해외 선교사들의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은 배제함. 구한말 조선에 대한 평가를 전적으로 

 서양 선교사의 시각에 근거함)


- 고종과 민비는 백성을 돌보지 않고 왕실만 돌봤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한 일이 없다.

(당시 왕실의 무능도 있지만 헤이그특사 파견 등 긍정적으로 평가할만한 노력도 깡그리 무시. 

 그냥 무능한 걸로 결론)


- 조선시대 지식인들은 비싼 돈 들여 외국 유학 가서도 문학이나 공부하고 있었다.

(인문학 경시. 그래서 이런 천박한 철학이 공공연히 나도는 거야)


- 우리 경제가 발전한 건 우리가 만든 공산품을 미국이 사줬기 때문이다.

(필요에 의해 수출과 수입을 하는 국제 경제 원칙을 무시하고 미국이 적선해서 잘 살게 됐다는 식으로 호도) 


- 북한 아이들 어릴 때 잘 못 먹어 자라서도 저능아 된다. 통일 뒤 이 저능아들 어떻게 먹여 살리냐.

(저능한 발언. 통일을 북한 먹여 살려야 하는 일로 인식함)


- 영국은 한 때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됐었다 지금은 망했다.

(ㅋㅋ 영국이 망하긴 왜 망하냐. 제국주의국가 그만 두면 망한거냐?)


그의 강연 가운데 동의할 수 있었던 게 딱 하나 있었다. 

기독교의 개혁을 주문하며 강연 말미에 인용한  어떤 목사가 했다는 말,
"지금 예수가 넝마를 입고 한국에 나타난다면 한국 교회는 그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내가 한국 교회 얘기하면 늘 하는 말인데, 바로 이거다.
이런 강연하는 수준의 기독교인이라면 넝마 입고 나타나 기득권층을 비판하는 예수를 일컬어
"종북"이라고 할 게 분명하다. 


한 시간 넘게 보면서 내내 거북했던 것은 이 일방적으로 쏟아붓는 설교 문화인데,

가끔 반려자 따라 교회 갈 때마다 느끼지만, 이거 폭력이다. 

듣는 사람들은 그저 일방적으로 수용할 뿐이다.
토론? 반박? 의견 개진? 소통?
이런 거 기대할 수 없다.

라틴어로 된 성경을 읽을 수 없는 교인들에게 독해를 해주기 위해
만들어진 중세 시대의 교회 문화가 21세기에 횡행하는 거,
이런 거부터 뜯어 고쳐야 개혁인지 뭔지도 되는 거 아니겠냐.
일방적으로 마이크 쥐어주고 맘 편히 떠들게 하니 이런 망언도 막 비집고 나오게 된 거 아니냐.
문창극이 이런 참극을 빚게 된 것은 교회 문화에도 책임이 있다.


마지막으로,

그가 하나님께 이 나라를 위해 드릴 기도의 주제로  제안한 것들 가운데 마음에 와 닿는 게 있었다.


"좋은 지도자를 달라"


제발 좀 달라. 문창극 같은 이를 주지 말고. 쫌!


calvin.

Posted by the12th
재활용창고2014. 6. 7. 18:03



 <한겨레21> 1012호에 기고 요청을 받았다. 재미있게도, 회사 선배 두 명으로부터 같은 요청을 전달받았는데, 얼마 전 사내망에 올린 글 때문에 추천받은 것이다. 글은 익명으로 작성됐다. 한겨레 측은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회사의 불이익이 있을까 우려해 익명을 제안해온 것이었는데, 어차피 이 시기에는 부장단까지 사장에 반기를 든 상황이니, 불이익을 우려할 상황도 아니었다. 사실 난 그보다도 내 개인이 드러나는 일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겼다. 누구라도 쓸 수 있는 내용인만큼 "아무개"보다는 "KBS기자"의 이름으로 쓰고 싶었다. 


 어린 시절, 오랜 꿈이었던 한겨레 지면에 내 글을 올리는 일이, 이런 식으로 내가 몸 담고 있는 회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루어진 것은 참 기분이 묘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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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밤을 잊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요. KBS 공사 창립 이래, 아마도 최악이 되었을 그날 밤을요. 그날 밤은 KBS에 대한 불편한 진실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한꺼번에 터져 나왔던 밤이었습니다. 오랫동안 감춰왔던 곪은 상처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한 번에 터지는 것 같았어요.

 

국가적 대참사의 희생자 유가족들이 항의를 하기 위해 KBS 앞을 가득 채운 광경은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은 충격적인 그림이었습니다. 가슴에 묻은 자녀들의 영정을 품에 안고 KBS를 향해 사과하라고 외치는 모습을, 과연 이전까지 상상할 수나 있었을까요? 특정 진영도, 특정 단체도 아닌 말 그대로 약자 중의 약자’, 우리가 보호하고 위로하고 대변해야 할 피해자들이 우리로 인해 상처를 받고 우리를 원망하며 거칠게 항의하는 모습을 말이에요. 국민으로부터 멀어지고 국민에게 항의 받는 국민의 방송’, 그 모습이 가장 비극적인 형태로 나타난 것으로 보여, 저는 그만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또 다른 충격이 전해졌습니다. 한달음에 달려 나가 사과하고 희생자 유가족들을 위로해도 모자랄 판에, 회사는 도리어 유족들을 기예 문전박대하고 말더군요. 김시곤 보도국장은 물론, 사장님에 대한 면담 요구도 회사는 매몰차게 거부했습니다. 심지어 회사는 보도국 간부들에 대한 일부 유가족들의 폭력 행사를 문제 삼아 공격하는 공식입장을 급히 만들어 배포하기까지 했지요. 비슷한 시각, 보도국에서는 아침 뉴스에 마찬가지로, 유족들의 폭행과 감금을 강조하는 형식으로 리포트를 준비하라는 지시가 내려졌습니다. 여러 사람이 재고를 요청하고 꼭지수를 조정해서 결과적으로는 상당히 톤 다운된 리포트가 나가긴 했지만, 고압적인 자세로 희생자 유가족들과 싸우자고 덤비던 회사의 대응 방식에 전 또한 그만,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KBS에 대한 요구 사항이 관철되지 않자 유족들은 KBS에 대한 자신들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 압박의 대상을 돌연 청와대로 바꿨더랬죠. KBS가 온전한 공영방송이 아니라 청와대의 지시를 따르는 곳이라는 공공연한 사실에 바탕을 둔 결정이었습니다. 애써 국영방송이 아닌 공영방송의 기자가 되고자 했던 저는, 유족들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KBS 문제 해결을 청와대에 요구하는 것을 보고는, 맥이 풀려 버렸습니다. 우리를 지켜보는 시청자들의 시선이, 우리의 독립성과 공정성 정도를 바라보는 국민들의 일반적인 생각이 여기에 머물러 있다는 생각을 하니, 온 몸에 기운이 없어졌습니다.

 

유족들의 판단이 정확했다는 것은 몇 시간이 채 되지 않아 입증되었습니다. 다름 아닌, 사장님 스스로가 몸소 입증해 주셨죠. 유가족들이 KBS 앞까지 찾아와 그렇게 만나고자 했던 사장님이, 일이 그 지경이 돼서야, 청와대 앞으로 직접 찾아가 사과를 했으니 말입니다. 혹여 그 사과가 사장님의 독자적인 결단일지도 모른다는 다른 해석(?)이 나올까 걱정했는지, 박준우 청와대 정무수석은 내가 KBS에 문제 해결을 부탁했다고 밝혀 ‘KBS에 대한 청와대 개입설을 친히 뒷받침해 주기까지 했지요.

 

그에 앞서, 훨씬 더 명료한 얘기도 나왔어요. 김시곤 전 보도국장이 자진 사퇴를 알리는 기자회견 자리에서 사장님이 그간 청와대의 하수인 노릇을 하며 KBS의 독립성을 무너뜨려 왔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었으니까요. “언론에 대한 어떠한 가치관과 신념도 없이 권력의 눈치만 보며 사사건건 보도본부의 독립성을 침해해 온 길환영 KBS 사장은 즉각 자진 사퇴해야 한다고 말이죠. 김 전 국장은 이어 다른 언론을 통해 사장님이 평소에도 끊임없이 보도를 통제했으며 대통령만 보고 가는 사람이라고 추가로 밝히기도 했지요. “윤창중 사건을 톱으로 올리지 말라고 한 적도 있다는 구체적인 사례까지 언급하면서요.

 

너무 적나라하게 KBS 보도의 위상이 드러난 발언이라, 사실 액면 그대로 믿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세월호 희생자에 대한 부적절한 발언으로 구설에 오른 김시곤 전 국장이기에 더욱 그랬고요. 하지만 또다시 사장님이 입증해 주셨죠. 김 전 국장의 사임으로 공석이 된 보도국장 자리에, 이정현 청와대 홍보수석의 고등학교 동문인 백운기 시사제작국장을 앉힘으로써, 사장님 스스로 김 전 국장의 주장이 사실일 가능성을 한껏 높여 주었습니다.

 

하필 백운기라니요. KBS에는 여전히 후배들에게 존경과 신망이 두터운 능력있고 성품 좋은 선배들이 여럿 있습니다. 물론 보도국장 감으로도 손색이 없는 분들입니다. 그들을 제치고 백운기라니요. 이미 2009년 김인규 전 사장이 물리력을 동원해 사장실에 진입하던 그 날, 후배들의 저항을 온몸으로 앞서 뚫으며 사장을 호위하던 모습을 또렷이 사진으로까지 남겨, 후배들로부터 조롱의 대상으로 자리 잡은 인물을 보도국의 수장으로 앉히다니요.

 

백운기 국장의 청와대 커넥션은 이미 단순 의혹 제기 수준을 넘어섰습니다. 백 국장 본인이, 친절하게도, 관용차를 사용하며 투명하게 남긴 기록으로 확인을 해 주셨죠. 보도국장으로 임명되기 직전인 지난 11일 오후 3시 쯤 행선지 청와대로 회사 차량을 타고 나가 누군가를 만나고 온 사실을 말이죠. 이렇게 구체적인 정황증거마저 있는 마당에, 그를 국장으로 임명한 배경을 어떻게 보는 게 이치에 맞을까요? 청와대의 요구를 국장에게 전달하다 사달이 났으니, 아예 청와대와 직접 끈이 있는 보도국장을 임명해 폭로의 가능성을 차단하려 한 것으로 보는 게 상식적이지 않을까요? 아니, 그보다는 이번 인사 역시 청와대의 지시를 받아 그대로 집행했다고 보는 편이 사장님의 행동을 일관성 있게 설명하는 쪽이겠군요.

 

사장님이 제 20KBS 사장으로 결정될 즈음, 일선에 있던 아는 PD에게 사장님이 어떤 분이신가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 때 그 PD는 한 마디로 내 후배라면 참 좋았을 사람이라고 평하더군요. 리더로서의 자질에는 물음표가 생기지만, 아랫사람으로서는 선배나 윗사람의 말을 참 충직하게 잘 따르는 사람이라는 평가였지요. 지금에 와서 그 평가를 곱씹어 보니, 저는 왜 권력이 사장님을 선호했던 건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신의 말을 잘 따르는 사람, 자신의 뜻을 잘 관철시키는 사람으로 사장님만한 적임자가 없다 여겼을지 모를 일입니다. 바꿔 말하면, 사장님이 KBS호의 선장이 된 순간, ‘언론사 KBS’로서는 그 자체로 그만큼 불행한 일도 없었던 셈입니다.

 

희생자 유족들 앞에서 사과를 하신 뒤 맞이한 월요일 보도국 회의에 사장님이 참석해 현 난국을 정면돌파하겠다는 의지를 내보이셨단 말을 전해 들었습니다. “본의 아니게 수십 년간 쌓아온 KBS 뉴스의 신뢰가 실추돼 유감스럽다고 하셨다지요.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하기도 하셨고요. “중립성과 공정성을 담보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보도국 내부적으로 마련하면 수용할 준비가 돼 있다고 나름대로 비전도 제시하셨다더군요.

 

그런데 말이죠. 평소와 같았으면 설레었을지 모를 사장님의 말씀에 아무런 감흥이 일지 않았습니다. 사장님의 능력이나 재량이 어떨지, 사장님이 이 위기를 어떻게 타개해 나갈지, 더 이상 궁금해지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그냥, 사장님의 존재자체가 공영방송 KBS에 짐이 되고 독이 되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사장님에게는 다시는” “앞으로이런 표현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사장님이 그 자리에 앉아 계시는 것만으로도, KBS는 언론사 취급을 받을 수가 없어요. KBS 기자들은 공보처 직원과 다름 아니게 되고요. 누구도 우리의 취재를 순수하게 보지 않을 것이며, 누구도 우리의 보도를 믿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신뢰를 먹고 사는 언론사로서 온전히 기능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린 것이지요. KBS 사장이 권력의 눈치만을 본다고 온세상 만천하에 알려진 이상, 오롯이 사장님의 존재만으로 말이에요. 기자협회가 긴급비상총회를 열어 94.3%의 찬성률로 사장님과 본부장의 퇴진을 요구하고,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제작 거부에 나서겠다고 결의하게 된 절박한 배경이 여기에 있습니다. 사장님이 있는 회사에서는 일할 수 없다는 단호한 뜻입니다.

 

저희는 세월호 참사 30일을 맞아 지난 15KBS 뉴스9에서 우리의 지난 보도 태도를 반성하고 스스로 비판했습니다. 방송이 나가는 순간까지, 역시나, 쉽지 않은 과정이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오로지 시청자들을 바라보며 이번 만큼은 반성의 기회를 놓쳐선 안 된다는 다짐으로 많은 선후배들이 지혜를 모았고, 마침내 시청자들에게 머리를 숙일 수 있었습니다. 지금껏 KBS에 없었던 작지만 큰 변화였고, 이를 통해 우린 KBS 뉴스가 거듭날 수 있는 소중한 계기를 비로소 마련했다고 생각합니다.

 

급기야 보도국 부장들도 사장님께 당장 사퇴하라고 요구하며 후배 기자들과 뜻을 함께 했습니다. 그동안 보도에 대한 책임을 느낀다며 전원 보직 사퇴도 했지요. 보도본부장도 결국 우리의 요구를 받아 스스로 물러나셨고요. 늦었지만 박수받을만한 결단입니다. 이제 사장님만 결단하시면 됩니다.

 

사실 이쯤 되고 보니, 사장님께서 물러나는 문제가 사장님 혼자만의 판단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그날 밤, 유가족들 앞에 나가 사과를 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스스로 결정하지 못했던 것처럼, 자신의 거취조차 청와대의 오더를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닌지, 그래서 마지막 명예를 위해서라면 지금 물러나는 것이 맞지만 혹시 그러지 못 하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칩니다.

 

사장님께서는 취임사에서 유난히 KBS 출신으로서 내부 승진을 거쳐 사장이 된 첫 번째 사례라는 점을 강조하셨지요. 낙하산 논란과 함께 청와대 사전 낙점설이 난무하는 와중에서도, 그래, 그 점 하나는 그래도 상징성이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잠시 가져본 적도 있습니다. 그 때 사장님께서 하셨던 약속도 새록새록 기억이 나네요. 이렇게 강조하기도 하셨죠.


그동안 KBS로부터 받은 많은 사랑을 모두 돌려드린다는 각오로 KBS를 위해 마지막으로 봉사하고자 합니다. 말을 앞세우기 보다는 행동으로 실천하겠습니다.”

 

사장님. 지금이 바로 그 약속을 지키실 때입니다. 청와대의 지시를 기다리지 않고 사장님 스스로 행동할 마지막 무언가가 있다면, 바로 이것이 될 겁니다. 물러나십시오. 보도국장도 함께 데리고 가주세요. 거듭나야 하는 공영방송에, 사장님과 청와대 하수인들이 있을 자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calvin.


<한겨레21> 1012호

Posted by the12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