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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27 미야자키 유니버스의 총화 1
그런데 하도 많이들 보길래 뭐가 다른 게 있나, 싶어 기예 보았다. 보고 났는데, 역시나 새로운 다른 이야기는 없었다. 그냥 역사책을 스크린에 잘 펼쳐놓은 영화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영화적'으로는 그래서 이 영화가 그렇게 뛰어난 영화인가 싶다. 역사에 구체적으로 남기지 못한 디테일한 대사와 행동들은 영화적 상상력으로 메운 것이겠지만, 큰 얼개에서는 그냥 역사에 기대어 버려 감독이 태만하다 보일 정도였다. 같은 역사적 사실을 스크린에 옮겨 놓았더래도, 크리스토퍼 놀란처럼 플롯이 아름다운 것도 아니고 쿠엔틴 타란티노처럼 과감한 상상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감독이 가미한 것은 마지막 극적 효과를 위해 전두광과 이태신의 시내 대치 장면을 넣은 것 정도일텐데, 실제 역사의 드라마가 주는 힘에 비해 결정적이거나 인상적인 것도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외려 사족 같은 장면이었다)
그런데 의외로 '교육적' 효과가 있었던 거다. 타깃은 나같은 역덕 꼰대가 아니라 저 시절 역사를 잘 몰랐던 젊은 세대였다. 누군가에게 전혀 새롭지 않은 이야기가 누군가에게는 너무나도 신선한 이야기였던 것이다. 이 커다란 간극은 대체 어디서 왔을까. 역사 교육의 문제였던 것일 수도 청산하지 못했던 정치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꾸준히 얘기했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한 언론의 문제 때문이지는 않을까.
사람들이 반란군보다 그들을 진압하지 못한 "똥별들"의 무능함에 더 열받아 했다고들 하던데, 역사를 되돌려도 어쩌지 못할 일이었다. 권력을 찬탈하려는 자들은 전방의 부대를 서울로 향하게 할만큼의 뚜렷하고도 강렬한 의지가 있었지만, 그들을 막으려는 자들에게는 그런 게 있을리 없었기 때문이다. 박정희 체제를 떠받치던 군벌들에게는 민주주의가 그렇게까지 지켜야 할 가치가 아니었다. 심지어 이태신 조차, 그저 '총장님'을 잡아가면 안 되고 반란을 일으키면 안 된다 정도의 의지였지 어떤 가치를 지켜내기 위해 분연히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그 민주주의를 목숨 걸고라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총칼이 없던 시민들이었고, 그래서 결국엔 광주 시민들이 마지막까지 저항하다 희생되고 말았다. 당시 군 수뇌부에게 자신들이 지켜내야 할 것이 민주주의를 희구하는 국민들이었다는 의식이 있었다면, 그래서 자신들이 뚫리면 국민들이 학살당할 수 있다는 자의식이 있었더라면, 저렇게 허망하게 하룻밤 사이에 전두광 일당에게 권력을 내주지 않지는 않았겠나. 자신들이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도 모르는 자들에게 총칼을 내어준 후과가 너무나도 컸다.
전두환은 한국 현대사 최악의 빌런이다. 그는 국민 투표를 거치지 않은 채 대통령이 돼 정통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던 사실상 유일한 인물이다(최규하도 있긴 하지만 임기가 짧았으니 무의미하고). 그의 정치적 치적은 단임제를 만들어 지켰다는 것이지만, 2인자를 인정하지 않고 홀로 왕이 되고자 했던 박정희와 달리, 그것조차 그가 하나회 세력을 통한 군벌 집권 체제를 만들었다고 생각했기에 시도할 수 있었던 일이었을 뿐이다.
대대로 전두환을 연기한 이들이 있었다. 박용식은 오로지 외모 때문에 전두환 정부에서 핍박도 받고 전두환 퇴임 이후에는 전두환의 연기를 맡기도 했는데 실은 너무나도 유순한 인상 때문에 전두환을 그려내는 데는 적합하지 않았다. 이덕화는 지나치게 카리스마를 뿜어대는 통에 전두환을 미화한다는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황정민의 캐스팅은 처음엔 좀 의외였는데, 다소 왜소해 보이는 체구로부터 오는 핸디캡을 신들린 연기력으로 커버해 내었다. 아마도 반란수괴 전두환의 야비함을 그처럼 적나라하게 연기해 낼 배우는 앞으로도 등장하기 힘들 것이다. 다만, 황정민조차 전두환 특유의 거만한 모습은 드러내지 못했다. 야비하고 탐욕적이고 거들먹거리고 파렴치한 그 모습을 누군들 어찌 다 담아낼 수 있겠는가. 앞으로도 보기 힘든, 또 나와서는 안 될 악인이다.
지옥의 가장 어두운 곳에서 그의 영혼이 영원히 고통받길 간절히 빈다. ■
미야자키 하야오 선생의 은퇴번복작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보았다.
미야자키 선생의 영화이니 반드시 보긴 보았겠으나, 아마도 제목이 영어 제목처럼 <소년과 왜가리> 이런 식으로 나왔었다면 개봉 당일부터 부랴부랴 찾아가 보지는 않았을 거 같다. 그만큼 내게는 이 제목이 강렬했다. 요즘 부쩍 꽂혀있는 화두라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미야자키 선생이 혼란한 내 마음에 영감 한 방울 떨궈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나의 발걸음을 평일 퇴근길에 영화관에까지 이르게 하였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 제목은 일본의 학자 요시노 겐자부로의 동명 소설(혹은 청소년 인생지침서?!)에서 가져온 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 본인이 소년 시절 어머님의 권유로 읽고 큰 감명과 영감을 받은 책이라고 하는데, 그렇다고 이 책이 영화의 원작인 것은 또 아니다. 제목과 미야자키 본인이 받은 영감, 그리고 이 책을 만났던 본인 이야기를 모티브로 삼아 만든 미야자키 선생의 오리지널 스토리인 건데, 책과의 연결성이 가깝다고도 또 멀다고도 할 수 없다. 책이 준 영감이 작품 제작의 단초가 되었다고 하니 아마도 요시노 겐자부로의 책을 읽으면 보다 더 영화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기는 할 것이다.
책도 책이지만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좀 더 잘 보려면 미야자키 하야오가 만들어온 그간의 작품들을 다 섭렵해 두는 편이 더 필요하다. 이 영화는 '미야자키 유니버스'를 집대성했다 할만큼, 그간 미야자키 하야오가 만들어온 작품들의 흔적들이 아주 두텁게 칠해져 있는 작품이다. 어디선가 본 듯한 장면, 어디선가 만난 듯한 풍경이 눈에 자꾸 밟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가령 파도가 넘실대는 장면은 <벼랑 끝의 포뇨>를, 하늘에 떠 있는 돌은 <천공의 성 라퓨타>를, 귀여운 와라와라는 여지없이 마쿠로구로스케나 코다마를 연상시킨다. 주인공 마히토는 <바람이 분다>의 지로를, 그가 모험에 돌입하는 과정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꼭 닮았다. 마히토와 히미가 함께 위기를 헤쳐나가는 장면들은 <미래소년코난>과 <천공의성 라퓨타> 등에서 숱하게 보였던 소년소녀 모험물이고 마히토가 큰할아버지를 만나는 정원은 다름아닌 <붉은돼지>에서 지나의 정원이다. 그 밖에도 미야자키 선생은 영화 곳곳에 전작의 상징적 장면들과 은유를 덧대고 또 덧댄다. 때문에 미야자키 하야오 세계를 아는만큼 이 영화를 더 풍족하게 즐길 수 있다.
이 영화가 난해하다는 인상을 받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싶다. 혹은 미야자키 하야오가 거장이 되고 국제 영화제에서 작품성을 인정받으면서, 이해되지 않는 장면마다에 무언가 의미를 심어놓았다는 의심(?)을 받게 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미야자키 유니버스'는 원래부터, 현실 세계의 눈으로는 개연성이 없으나 풍부한 상상력만 있다면 환상적인 이야기들이 가득찬 곳이었다. 뜯어보고 따지기보다 그냥 선생이 펼쳐놓은 무한한 상상의 세계에 몸을 내맡기면 그것만큼 재미있는 게 없는 곳이다.
그렇게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미야자키 하야오 자신이 만들어 온 세계를 정리하고 종합하고 또한 극대화한 작품이다. 여전히 신나는 모험이 있고 여지없이 환상적이고 몽환적이면서도, 그 이면에는 여실히 실사와 컴퓨터그래픽이 닿을 수 없는 고집스러움과 치열함도 엿보인다. 이 정도라면 나이 여든이 넘은 노애니메이터가 은퇴를 번복할 만 한 이유가 충분하다.
영화의 말미에 마히토는 선택의 기로에 선다. 막강한 권한을 가질 수 있는 저 세계에 머무를지, 혼란하고 악의가 가득한 이 세계로 돌아갈지. 마히토는 후자를 선택한다. 그가 선택하는 이유가 성장하는 소년 답다. 그 숱한 어려움들을 혼자 힘으로 이겨내지 못하면 친구들과 함께 이겨내겠단다. 요시노 겐자부로의 책에서 주요한 내용 중 하나가 친구들과의 다툼을 어떻게 극복할지에 대해 서술한 부분이라고 하는데, 영화 초중반부에 마히토가 학교 친구들과 갈등을 빚었던 장면들을 되짚어보면, 마지막에 그가 직접 목소리를 내는 '친구론'이 이 영화가 거의 유일하게 직접 드러내는 주제 의식이라 할 수 있다.
혼탁하고 어지럽고 앞이 잘 가늠되지 않는 세상이지만, 그러함에도 극복하고 이겨내야 한다, 혼자 하려 하지 말고, 주변의 여러 친구들과 함께, 그러니까 말하자면 '연대의 힘'으로 헤쳐나가야 한다는 말씀 되시겠다. 나도 그렇게 살 것이라 마음 먹는다.
역시, 미야자키 선생을 서둘러 알현하길 잘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