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끽!2023. 9. 15. 22:16

오랫동안 목이 빠져라 기다려왔던,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보았다.

슬램덩크가 극장판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다는 이야기가 들려왔을 때부터 줄곧 기다려왔다. 작화 방식이나 성우 교체 논란 같은 시덥잖은 이야기들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26년 만의 슬램덩크이고, 이노우에 다케히코가 직접 연출을 한다는데 그런 게 다 무슨 논란거리가 된단 말인가. 작품성은 고사하고 심지어 완성도가 떨어진다 하더라도 하등 문제 될 게 없었다. 슬램덩크는 어느 폐교 교실 칠판에 분필로 그려주는 후일담 같이 아주 작은 조각조차도 소중한 존재인 법이다. 그러니 그저 만들어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다. 왜? 슬램덩크니까!

영화는 익히 잘 알려져 있다시피, 원작 만화에서 최고의 경기였던 산왕공고 전을 애니메이션화 하고 경기 중간 중간에 송태섭의 과거사를 중심으로 지금껏 드러낸 적 없는 멤버들의 서사를 삽입한 형태로 구성되었다. 원작에 대한 팬들의 기대와 향수를 품은 채, 같은 이야기만 답습하고 마는 것은 피하려는, 이노우에 선생다운 영특한 구성이다.

산왕전 경기 장면은, 수십번 읽어 이미 매 커트 커트를 다 읊고 있는데도 기대를 크게 뛰어넘는다. 모션캡쳐와 컴퓨터그래픽 기술을 활용한 작화는 실사를 방불케 하는 몰입도를 불러일으킨다. 실제 농구 경기를 보듯이 순간순간 숨을 멎게 될 만큼 매우 역동적이다. 조금 과장을 보태면, 흡사 27년 전 요절한 친구가 AI 딥페이크 기술로 '환생'한 모습을 보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든다. 흑백 만화 속에 박제돼 있던 캐릭터들이 하나 하나 살아나 뛰는 모습을 보다 보니, 나도 모르게 울컥하게 되더라.

반면 새로운 이야기인 송태섭의 과거사는 다이내믹한 경기 장면 중간 불쑥 불쑥 들어오며 리듬을 크게 죽여 놓아 보는 이에 따라 지루하게 여겨질 수도 있겠다. 냉정하게 보면 사실은 플롯도 (만화답게) 단순해서 유치해 보인다. 그런데 이게 슬램덩크고, 그게 송태섭 이야기이다 보니 보다 보면 묘하게 감정이입이 되고, 어느 새 쪽팔리게도 눈물까지 찔끔 나게 된다. 거 참.

이노우에 다케히코는 새로운 서사를 삽입함으로써 "슬램덩크를 본 사람도, 보지 않은 사람도 모두 즐길 수 있을 것"이라고 했지만, 아무래도 원작 만화를 보지 않으면 느낄 수 없는 포인트들이 몇 있다. 이를테면 강백호가 서태웅에게, 서태웅이 강백호에게 패스를 한다는 것의 의미를 이 영화만으로는 충분히 알기 어렵다. 강백호가 부상을 당한 뒤 선수 생명의 위기를 맞이한다는 것의 의미도 슬램덩크 뉴비라면 쉬이 이해하기 어렵다. 독립적인 영화로 설계한다고 했지만, 내게 이 영화는 '슬램덩크 세계관'을 한층 더 풍성하게 해주는 스핀오프로서 만족감이 더 크다. 그건 원작의 이야기가 워낙 위대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슬램덩크를 처음 만났던 1992년은 고2 때였다. 말하자면 슬램덩크 캐릭터들과 동년배였던 셈이다. 이 만화가 그냥 흔하디 흔한 청춘스포츠만화가 될 수 없었던 것은, 그 때 그 세대의 정신을 대표하고 재정의했기 때문이다. 겸양보다 자신감과 패기를 앞세우고, 엇나가고 불량해도 우정과 의리만큼은 지켰으며, 기약없는 내일을 준비하기 보다 현재의 감정과 도전에 충실하고자 했던 당시 젊은 세대를 이 만화의 캐릭터들이 대변해 주었다. 그래서 슬램덩크는 우리에게 만화를 넘어 문화였고 현상이었고, 무엇보다도 우리 청춘의 자화상이었다. 한낱 애니메이션 상영관에 아재들이 유독 많아 보인 것도 그래서다.

영화의 제목이 <더 퍼스트 슬램덩크>라고 작명돼 벌써부터 후속작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고 있는 모양인데, 개인적으로는 이노우에 선생이 제목에 '역설'을 심었다고 생각한다. 예상하지 못한 작별을 맞이하곤 26년동안이나 끊임없이 재연재를 기다려 왔을 수많은 팬들에게 주는 일종의 마지막 선물인 게 아닐까, 하는 거다. 슬램덩크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며 가졌던 허탈함과 짙은 여운을, 나 역시 이번 영화로 상당부분 해소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그 때 끝내 떠나보내지 못했던 백호를 이제는 놓아줄 수도 있을 것 같다. 잘 가, 슬램덩크. 안녕, 나의 미숙했지만 가능성으로 반짝였던 젊은 날...

Posted by the12th
얄라리얄라2018. 9. 18. 14:11


- 기껏 제일 좋다는 스쿠터 사줬더니, 탈 때마다 바퀴에 불이 안 들어온다고 찡찡.. "알리에서 같은 사이즈의 저렴이 LED 바퀴를 사서 교체해주면 되지 뭐"라고, 처음엔 아주 가볍게 생각했던 거다.


- 그런데, 바퀴를 고정한 볼트가 안 빠진다. 육각렌치로 돌리면 쉽게 풀려야 하는데, 아무리 힘을 줘도 이거 뭐 당최 풀리질 않는다. 그제서야 검색해보니, 마이크로 스쿠터는 안에 본드(!)를 발라놔 바퀴가 잘 안 빠진다는 얘기. 헐. 자전거수리점에서 풀었다는 얘길 보고 집 근처 수리점에 갔지만, 스쿠터를 잘 만져본 적 없는 사장님도 결국 실패. 바퀴 바꾸는 거 구경하겠다고 같이 따라나선 아이는 더욱 시무룩해지고...


- 인터넷 폭풍검색 끝에, 이런 LED 바퀴를 파는 곳에서 "사무실로 가져오면 공임 받고 직접 교체해 준다"는 문구를 발견. 마침 거리도 그리 멀지 않은 곳이길래, 주말을 이용해 방문을 했다.


- 이전에 이미 마이크로 스쿠터에 애를 먹은 적 있다는 사장님은, 그래도 경험이 있는 분이라 믿음이 갔다. 조금 애를 먹었지만, 드디어 왼쪽 바퀴 하나를 떼는 데 성공! 아, 역시 기술자는 달라. 옆에서 막 입에 발린 칭찬을 하며 이제 문제 없겠지, 얼른 바꿔 달고 집에 가야지, 하던 차였는데...


- 오른쪽 바퀴가 안 빠진다. 심지어 헛돈다. 게다가, 젠장, 육각홈까지 마모가 됐다. 정상적인 상황에서 바퀴를 빼는 건 이제 불가능해진 상황. 안 빠지는 볼트 푸느라 사장님의 손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사장님도 난감해지고, 나도 난감해지고. 아, 그냥 애한테 반쪽 LED 바퀴로 만족하라고 해야 하나..? 했는데.


- "교체 뒤 이 바퀴 더 안 쓰실거죠?" 라고 큰 결심을 한 듯 한 표정으로 사장님이 묻길래, 네, 뭐;; 더 쓸 일은 없겠죠... 했더니 "바퀴를 잘라냅시다" 이런다. 네?? 그리곤 느닷없이 전기톱 장전. 전기톱으로 사정없이 바퀴를 잘라내고는, 바퀴를 단단히 고정하고 있던 볼트마저 무지막지하게 잘라내기 시작. 그런데 이게 쇠잖아. 쉽게 잘릴리 없는 육각 볼트는 정말 오랫동안 버텨주었고, 덕분에 저게 얼른 잘려야 집에 갈텐데..하는 생각 중에 키야, 이놈들 튼튼하게는 만들었네, 뭐 이런 믿음도 아주 잠깐 생기긴 했다. 그렇게 40분 넘는 치열한 사투 끝에, 결국 사장님이 이겼다. 스쿠터 바퀴와 육각 볼트는 수많은 쇳가루를 남긴채 잔혹한 최후를 맞았다.


- 사장님은 사무실에 있는 다른 스쿠터에서 빼온 볼트를 끼워 바퀴 교체를 완성해 주셨다. 이렇게까지 바퀴교체가 어려운 건줄 몰랐으므로, 기왕이면 광폭 바퀴로 바꿔달았다. 또 기왕이면 뒷 바퀴도 LED로 바꾸고. 그렇게 바퀴값+소정의 공임을 드리고 두어시간 만에 힘들게 집에 돌아왔다.


- 그 치열했던 사투의 현장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는 이제 제 스쿠터 바퀴에도 불이 들어온다는 사실에 감격해 당장 시승을 하겠다고 졸라댔다. 즐겨타던 집 밖 트랙에는 비가 오는 상황. 하는 수 없이, 차량 이동이 한가로운 지하3층 주차장으로 내려가 적절히 가드하며 태워줬더니, 신나게 폭주를 한다. 땀까지 뻘뻘 흘려가며 멈출 줄을 모른다. 그러면 된 거다. 임무 완료.



calvin.


Posted by the12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