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끽!2023. 9. 15. 22:29

영화 <오펜하이머>를 보았다.
 
 
알다시피 ‘원자폭탄의 아버지’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영화는 불친절하고 낯설다고 알려져 있다. 1940년대 역사적 실화를 담고 있지, 그 시대 과학자들이 무더기로 등장하지, 양자물리학과 같은 원자폭탄의 배경 이론들이 대사로 쏟아지지, 그런데다 러닝타임은 장장 세 시간에 달한다. 그런데도 재미가 있겠냐고?
 
결론부터 말하면, 재밌다. 그것도 무척이나. 하지만 이 영화의 재미를 느끼려면 미리 공부를 좀 하고 가야 할 거다. 공부라고 해서 무슨 핵물리학을 공부할 필요까진 없다. 그저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누구고 무슨 일을 했고 어떻게 성공과 좌절의 시간을 보냈는지 정도의 정보는 알아야 이야기를 쫓아갈 수 있다. 배경 지식 없이 봐야 재미있는 영화가 있는 반면, <오펜하이머>는 아는만큼 재미를 더 느낄 수 있는 영화다.
 
가장 큰 이유는 이 영화의 플롯 때문이다. 영화는 크게 오펜하이머의 이야기와 루이스 스트로스(오펜하이머를 정치적 파멸의 길로 내모는 미 원자력 위원장)의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두 파트는 ‘분열(Fission)’과 ‘융합(Fusion)’이라는 부제까지 부여되었으며 각각 컬러와 흑백으로 구분된다. 여기에다 ‘분열’ 파트는 또다시 오펜하이머가 원자폭탄 개발로 성공하는 이야기와 그가 모함에 빠져 몰락하는 서사로 나누어진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이렇게 서로 다른 세 개의 시계열에 놓인 이야기들을 마구 쪼개고 나눈 뒤 다시 이어붙이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정렬해 낸다. 서로 교차되는 지점이 많지 않은데도, 감독은 기가 막히게 그 지점들을 찾아내 능수능란하게 편집점들로 활용을 한다. 현란하게 이뤄지는 교차편집 때문에 ‘오펜하이머 이야기’에 대한 사전 정보가 없이 보았다가 관객은 미로에서 길을 잃은 미아가 되고 만다. 반대로 이 이야기를 대체로 알고 영화관에 들어선다면 스토리는 물론이고 풍성한 플롯까지 만끽하며 가슴이 폭발하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될 것이다. 달리 ‘플롯의 장인’이라 찬사 받는 게 아니다.
 
‘분열’과 ‘융합’은 각 파트의 부제이기도 하지만, 이 영화가 줄곧 담고 있는 테마이기도 하다. 과감한 플롯도 요약하자면, 각각의 이야기들을 ‘분열’시킨 뒤 ‘융합’해 낸 것일테니까. 오펜하이머가 개발한 원자폭탄은 핵분열을 토대로 만들어졌고, 이후 오펜하이머가 줄기차게 개발을 반대했던 수소폭탄은 행융합 이론을 통해 개발되는 것도 부제와 맞닿아 흥미로운 점이다.
 
무엇보다도 영화의 가장 큰 이야기 줄기인 오펜하이머의 삶이 그렇다. 오펜하이머는 분열적이고 모순적인 삶을 살아왔다. 케임브리지 유학 시절 지도교수와의 갈등 끝에 일으켰던 독사과 사건을 부러 영화 초반에 묘사한 것도 오펜하이머의 분열적 캐릭터를 묘사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연애사에서 있어서도 그는 자신의 청혼을 거절해 헤어진 진 태틀록을 유부남이 돼서도 끊임없이 갈구하며 가정에 정착하지 못하는 불안정한 모습을 보인다.
 
그의 분열적 삶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그의 업적(혹은 업보)인 원자폭탄일 것이다. 세계 평화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만들었지만, 정작 세계 평화에 가장 위협적인 존재가 되고 만 원자폭탄은 태생 자체가 분열과 모순덩어리다. 게다가 오펜하이머는 전례없이 강력한 무기를 세상에 선보이고는, 이내 군축을 비롯해 반핵주의자로서의 활동을 벌여 나간다. 원자폭탄을 자신의 손으로 만들었으면서 수소폭탄 개발은 지속적으로 반대한다. 원자폭탄은 되고 수소폭탄은 왜 안 되는지를 묻는 청문위원의 질문에, 그는 답하지 못한다. 분열적이고 모순된 그의 언행들은 원자폭탄 이후의 행보가 회한과 속죄를 위한 것이었는지, 책임회피와 자기변명을 향한 것이었는지조차 가늠하기 어렵게 한다.
 
오펜하이머만이 분열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가 속해 있던 환경, 원자폭탄 개발을 둘러싼 과학계의 분열이나 그 시절 정치사회적 분열 양상은 사실 오펜하이머 개인의 분열적 상황보다 더 심각한 일이었다. 특히 2차세계대전 이후 소련과의 체제 경쟁과 매카시즘으로 빨려들어가 자신들이 띄운 ‘2차 대전 종식의 영웅’조차 공산주의자로 몰락시킨 미국 사회의 자기분열적 모습은, 오펜하이머를 지극히 안정적이고 정상적인 사람으로 보이게 할만큼 광란 그 자체였다. 그러니 정말 분열적인 것은 누구란 말인가.
 
그래서 이 영화는 2023년 대한민국에서 더 각별한 의미를 갖게 된다. 1953년 오펜하이머가 겪었던 마녀사냥이 노골적으로 재연되고 있는 것부터가 그러하다. 윤석열 정부 출범 뒤 한반도 주변의 고조되는 군사적 긴장 상태로 인해 핵전쟁의 위기감이 실존적으로 느껴지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분열적이고 모순된 사회적 갈등이 이성과 합리성을 마비시키며 공동체를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다는 점도, 우리에게 이 영화가 담고 있는 이야기를 지나간 역사적 사실 이상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오펜하이머는 정말로 원자폭탄 개발한 것을 후회했을까? 원자폭탄 개발 전후로 그가 보였던 분열적이고 모순적인 행동들은 그가 원자폭탄 개발을 불가피한 숙명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미 핵분열이 발견된 마당에 당시에는 오펜하이머가 아니었어도 누군가 언제고 원자폭탄을 개발하고 말았을 상황이었다. 오펜하이머 역시 나치 독일이 먼저 핵무기를 개발하면 안 된다는 사명감으로 원자폭탄 개발에 뛰어든 것이었으니까. 누군가 개발해 내게 된다면, 그는 아마도 그것이 자신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정작 오펜하이머의 문제가 자신이 이후의 상황을 통제할 수 있으리라 자신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오펜하이머는 자신만이 원자폭탄을 관리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을 것이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투하 이후 보인 오펜하이머의 모순된 행동은, 어쩌면 사실 애초 그 자신이 계획한 대로 원폭 개발로 얻은 명성과 정치적 영향력을 원자폭탄을 질서있게 관리하는 데 행사하려 했던 것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 아닐까. 허나, 트루먼과의 독대에서 그것이 그만의 착각이란 점이 우습게 확인 됐듯, 오펜하이머는 그저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자신이 만든 원자폭탄이니 자신이 주체적으로 관리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은 그의 자기 과신에서 온 오판이었을 뿐이었다.
 
온갖 수모를 겪으며, 그럼에도 적극적으로 자기 변론을 하지 않으면서 그가 참회했던 것은, 자신의 오만과 착각이 아니었을까. 영화관을 나설때, 어쩌면 오펜하우스는 프로메테우스보다 이카로스에 더 가깝지 않은가 하는 데 생각이 이르자, 마음이 마구 어지러웠다.
Posted by the12th
만끽!2023. 9. 15. 22:28

영화 <에어>를 봤다. 나이키가 마이클조던을 전속모델로 영입해 에어조던 시리즈로 대박을 터뜨리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란다.
 
마이클조던이 스스로 신격화되어 가는 과정을 학창시절에 리얼타임으로 지켜봐 온 세대이지만, 나에게는 그 시절의 추억같은 게 없다. 농구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친구놈들이 침을 튀겨가며 마이클조던을 추앙할 때에도, 나는 그저 심드렁했다. 그 시절 누구나 한 번쯤 신고 싶어했던 에어조던조차 사 본적도, 갖고 싶다는 생각도 든 적이 없었다. 나이키라는 브랜드도 마찬가지였다. 농구보다 축구를 더 좋아한 내게는, 그 때나 지금이나 최고의 스포츠브랜드는 아디다스다. 그러니 내가 이 영화에서 추억을 더듬으며 짜릿해할 만한 포인트는 별로 없다.
 
그 보다는 <굿윌헌팅>이후 다시 만난 맷데이먼+벤애플렉 조합이 내겐 더 반가웠다. <굿윌헌팅> 때 혼란과 도전의 20대 청춘을 그렸던 두 사람은, 이제 치열한 비즈니스 세계에서 생존 투쟁하는 중늙은이의 모습을 보여준다. <굿윌헌팅>에서 번뜩이는 각본을 선보였던 두 친구는, 이제 어찌 보면 뻔한 이야기를 제법 능수능란하게 다룰 줄 아는 중견 영화인들이 되었다. 그 간극을 느껴보는 것도 흥미로웠다.
 
실화에서 에어조던 신화의 주인공은 마이클조던이겠지만, 이 영화에서 마이클조던은 재연배우로조차 등장하지 않는다. 어찌 보면 서글프게도, 이제 갓 NBA 지명을 받은 신인 선수에게 자신의 운명을 거는 배불뚝이 아저씨가 주인공인 건데, 그가 운동하는 걸 더럽게 싫어한다는 것까지 포함해서, 나 같은 아자씨들에게도 공감을 사는 포인트가 되겠다. 에어조던에 대한 추억이 없이도, 중년 아저씨는 충분히 재밌게 볼 수 있겠다.
 
<굿윌헌팅>에서 수학 천재를 연기했던 맷데이먼은, 이제 농구 천재를 한 눈에 알아보고 그에게 자신의 커리어를 올인하는 소니 바카로 역을 맡았다. (천재를 알아보는 안목도 실은 천재적인 거 아냐? ㅋ) 그는 마이클조던과의 계약을 통해 나이키가 3등에 머물러 있던 농구화 시장의 판을 뒤집어 보겠다는 계획을 추진하려 하지만, 정작 마이클조던은 나이키를 싫어하는 아디다스빠이고, 사장도 무모하다며 지원에 소극적이다. 악조건의 환경이다 보니 결국 계약 성사 여부가 모 아니면 도의 하이리스크 상황으로 이어진다.
 
마이클조던과의 계약이 성사될지 안 될지 모르던 순간, 소니는 농구화 부문 직원들을 하나씩 둘러본다. 자기가 저지른 일 때문에 자칫하면 농구화 부문이 사라져 직원들이 생계 위협에 빠질 수 있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자각하며 책임감과 중압감을 느낀다. 그 장면에서 괜히 나도 모르게 울컥해지기까지 했는데, 중년 남성의 호르몬 변화 때문이 아니라면, 최근 회사가 겪고 있는 위기의 상황과 그 장면이 중첩돼 보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영화 중간 중간에는 극의 흐름에 따라 롭 스트라서가 만들었다는 나이키사의 10가지 원칙이 하나씩 나온다. 하나하나가 하필 나와 우리에게 던지는 말과 같아 주옥같이 가슴에 새겨진다. '늘 공세를 유지하라' '자급자족을 하라'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그 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 문구는 마지막에 등장한 10번째 원칙이다. '옳은 일을 한다면 돈은 저절로 벌게 될 것이다'.
 
요즘 같은 상황에서 누군가 해주었으면 했던 가장 듣고 싶은 종류의 말이 아니었나 싶다. 저 문구 하나만으로도 이 영화는 별 다섯 개.
Posted by the12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