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끽!2024. 6. 14. 13:35

애플TV+의 런칭작이라던 <더 모닝쇼>를 보았다.
 
개인화 디바이스 시대를 만들어 가구 시청 기반의 텔레비전 산업에 위기를 몰고 왔던 애플이, 공중파를 위협하는 OTT를 통해, '레거시 미디어의 속살'을 소재로 콘텐츠를 만들었다는 점부터가 내 흥미를 잡아 당겼다. 물론 어쩌면 애플은 애초부터 구닥다리 방송국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을 즐기려 한 것일지도 모를 일이긴 하지만. ㅋ
 
뉴욕에 소재한 50년 전통의 가상의 방송국, UBA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다룬 이야기이다. 시즌 1은 미투운동, 시즌2는 코로나19, 시즌3는 레거시미디어의 위기라는 현실적 소재들을 다루면서 공감을 산다. 시즌제 드라마들이 늘 그러하듯, 완성도는 뒷 시즌으로 넘어갈 수록 떨어진다. 시즌 1만큼은 매우 높은 몰입도를 선사해 준다.
 
에피소드들과 한 시즌을 둘러싼 플롯이 훌륭하다. 단순한 병렬형 전개가 아니라서 몰입해 보지 않으면 행간의 스토리를 놓치고 지나가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다. 그렇다고 피곤한 몰입도를 요구하는 건 아니라서, 적당히 집중해서 보다보면 적절한 시점에 이야기의 종합성을 깨닫게 되는 경험을 준다. 시놉시스 자체는 허술한 면이 많은데, 플롯의 단단함이 영리하게 그것을 보완해 준다.
 
'더 모닝쇼'는, 방송이라는 게 으레 그러하다는 듯, 구성원들의 공고한 가식과 위선으로 유지되는 UBA의 인기 아침 보도 정보 프로그램이다. 송출되는 화려한 외양과 달리 안으로는 불안과 그늘이 짙게 배어 있다. 표리부동한 기존의 방송 관습을 대표하는 것이 주인공인 알렉스 레비(제니퍼 애니스톤)인데, 그녀의 곁에 우연히도 가식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기자 브래들리 잭슨(리즈 위더스푼)이 등장하면서 프로그램은 전례없는 투명성과 정직을 요구받게 된다. 그 과정들에서 일어나는 거센 소용돌이가 이 드라마 시리즈가 보여주는 재미 포인트가 되겠다.
 
개인적으로는 코리 앨리슨(빌리 크루덥)이라는 캐릭터에 매력을 느꼈다. 드라마 초반에 보도국장이었던 그는 브래들리 잭슨의 솔직함을 UBA에 끌고 들어온 사람이다. 그리고 방송국의 고위직임에도 불구하고 권위를 드러내는 대신 진보적이며 페미니스트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흥미로운 캐릭터이다. 일관되게 선함을 유지하지만 그는 끝내 성공하진 못한다. 마치 선한 것이 곧 능력은 아니라는 듯이.
 
시즌2부터 코리가 사장이 되면서 보도국장 자리에 스텔라 박(그레타 리)이 등장한다. 한국계 인사로 그려지고 실제 배우 역시 한국계다. 콘텐츠에 아시아인으로 한국계를 등장시키는 게 요즘 글로벌 콘텐츠 업계의 유행인가 보다. 한국 문화의 위상을 다시 한 번 느끼게 해준다.
 
'젊은 여성 동양인 보도국장'의 등장도 그러하지만, 드라마 전반에 PC가 강력하게 영향을 행사한다. 주요 역할을 여성들이 맡고 있고 유색인종의 비율도 높다. 중년 백인 남성들은 나쁘거나 불쌍하게 그려진다. ㅋ 미투, 낙태, 인종차별 등의 사회적 문제가 소재로 등장하고, 동성애도 자연스럽게 묘사된다. 다만 일방적이진 않아서 사회적 이슈들을 다룰 때는 명암을 같이 조망하려는 시도도 엿보인다. PC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에겐 불편한 부분도 있을 수 있다.
 
제니퍼 애니스톤은 이제 레이첼 그린 시절의 상큼함은 잃어버렸지만, 그 자리에 원숙한 연기력을 채워넣었다. 레이첼에서도 그랬지만 '속물적인 여성 캐릭터'를 너무나도 납득되게 그려낸다. 리즈 위더스푼과 둘의 호흡도 좋다. 재미있게도 두 사람은 <프렌즈>에서 자매로 등장한 적이 있다. 그 때 구성됐던 둘의 화학 작용이 이 드라마에서 마침내 완성된 느낌이다.
 
알렉스 레비는 야먕과 이기심으로 세속적 성공을 향해 내달려가는 사람이지만, 결정적 순간에 선을 넘지 않는다. 반면 브래들리 잭슨은 에누리 없는 정의와 원칙을 앞세워 성공하게 되지만 스스로 본인이 설정한 엄격한 원칙을 위배하게 된다. 두 사람은 물과 기름처럼 섞이기 어려운 캐릭터다. 정치적으로 알렉스는 아마도 보수적일 것이고, 브래들리는 필시 진보적일 것이다. 서로 다른 캐릭터, 서로 다른 입장, 서로 다른 지향점을 갖고 두 사람은 번번이 갈등하고 부딪치지만, 또한 결정적인 상황에서 손을 잡고 연대한다. 그것은 여성으로서의 연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저널리스트로서의 연대이기도 하다. 판이하게 다른 생각과 가치관에도 불구하고, 언론인으로서 동의하는 지점에서만큼은 굳건히 어깨를 겯고 기꺼이 함께 싸운다. 딴은 서로를 위해, 그리고 실은 저널리즘을 위해서 말이다.
 
그들처럼 우리도, 그럴 수 있을까...?
Posted by the12th
만끽!2024. 6. 14. 13:33
 
 
 
 12.12 군사반란을 별다른 가감없이 극화했다는 <서울의 봄> 시놉시스를 보고는 사실 '굳이 왜 보아야 하는가' 생각을 했었다. 이미 역사책에서, 현대사를 다룬 드라마에서 숱하게 많이 봤고 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인데 말이다. 전두환 일당이 얼마나 나쁜 놈들인지는 물론이고 장태완이나 정병주나 김오랑 같은 이들이 있었음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노재현이나 최규하 같은 이들이 얼마나 비겁했는지도 알고 있는데, 그걸 또 볼 필요가 어디에 있냐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하도 많이들 보길래 뭐가 다른 게 있나, 싶어 기예 보았다. 보고 났는데, 역시나 새로운 다른 이야기는 없었다. 그냥 역사책을 스크린에 잘 펼쳐놓은 영화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영화적'으로는 그래서 이 영화가 그렇게 뛰어난 영화인가 싶다. 역사에 구체적으로 남기지 못한 디테일한 대사와 행동들은 영화적 상상력으로 메운 것이겠지만, 큰 얼개에서는 그냥 역사에 기대어 버려 감독이 태만하다 보일 정도였다. 같은 역사적 사실을 스크린에 옮겨 놓았더래도, 크리스토퍼 놀란처럼 플롯이 아름다운 것도 아니고 쿠엔틴 타란티노처럼 과감한 상상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감독이 가미한 것은 마지막 극적 효과를 위해 전두광과 이태신의 시내 대치 장면을 넣은 것 정도일텐데, 실제 역사의 드라마가 주는 힘에 비해 결정적이거나 인상적인 것도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외려 사족 같은 장면이었다)

 

 그런데 의외로 '교육적' 효과가 있었던 거다. 타깃은 나같은 역덕 꼰대가 아니라 저 시절 역사를 잘 몰랐던 젊은 세대였다. 누군가에게 전혀 새롭지 않은 이야기가 누군가에게는 너무나도 신선한 이야기였던 것이다. 이 커다란 간극은 대체 어디서 왔을까. 역사 교육의 문제였던 것일 수도 청산하지 못했던 정치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꾸준히 얘기했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한 언론의 문제 때문이지는 않을까.

 

 사람들이 반란군보다 그들을 진압하지 못한 "똥별들"의 무능함에 더 열받아 했다고들 하던데, 역사를 되돌려도 어쩌지 못할 일이었다. 권력을 찬탈하려는 자들은 전방의 부대를 서울로 향하게 할만큼의 뚜렷하고도 강렬한 의지가 있었지만, 그들을 막으려는 자들에게는 그런 게 있을리 없었기 때문이다. 박정희 체제를 떠받치던 군벌들에게는 민주주의가 그렇게까지 지켜야 할 가치가 아니었다. 심지어 이태신 조차, 그저 '총장님'을 잡아가면 안 되고 반란을 일으키면 안 된다 정도의 의지였지 어떤 가치를 지켜내기 위해 분연히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그 민주주의를 목숨 걸고라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총칼이 없던 시민들이었고, 그래서 결국엔 광주 시민들이 마지막까지 저항하다 희생되고 말았다. 당시 군 수뇌부에게 자신들이 지켜내야 할 것이 민주주의를 희구하는 국민들이었다는 의식이 있었다면, 그래서 자신들이 뚫리면 국민들이 학살당할 수 있다는 자의식이 있었더라면, 저렇게 허망하게 하룻밤 사이에 전두광 일당에게 권력을 내주지 않지는 않았겠나. 자신들이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도 모르는 자들에게 총칼을 내어준 후과가 너무나도 컸다.

 

 전두환은 한국 현대사 최악의 빌런이다. 그는 국민 투표를 거치지 않은 채 대통령이 돼 정통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던 사실상 유일한 인물이다(최규하도 있긴 하지만 임기가 짧았으니 무의미하고). 그의 정치적 치적은 단임제를 만들어 지켰다는 것이지만, 2인자를 인정하지 않고 홀로 왕이 되고자 했던 박정희와 달리, 그것조차 그가 하나회 세력을 통한 군벌 집권 체제를 만들었다고 생각했기에 시도할 수 있었던 일이었을 뿐이다.

 

 대대로 전두환을 연기한 이들이 있었다. 박용식은 오로지 외모 때문에 전두환 정부에서 핍박도 받고 전두환 퇴임 이후에는 전두환의 연기를 맡기도 했는데 실은 너무나도 유순한 인상 때문에 전두환을 그려내는 데는 적합하지 않았다. 이덕화는 지나치게 카리스마를 뿜어대는 통에 전두환을 미화한다는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황정민의 캐스팅은 처음엔 좀 의외였는데, 다소 왜소해 보이는 체구로부터 오는 핸디캡을 신들린 연기력으로 커버해 내었다. 아마도 반란수괴 전두환의 야비함을 그처럼 적나라하게 연기해 낼 배우는 앞으로도 등장하기 힘들 것이다. 다만, 황정민조차 전두환 특유의 거만한 모습은 드러내지 못했다. 야비하고 탐욕적이고 거들먹거리고 파렴치한 그 모습을 누군들 어찌 다 담아낼 수 있겠는가. 앞으로도 보기 힘든, 또 나와서는 안 될 악인이다.

 

 지옥의 가장 어두운 곳에서 그의 영혼이 영원히 고통받길 간절히 빈다. ■

 
Posted by the12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