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끽!'에 해당되는 글 41건

  1. 2009.09.12 [영화] 엄마라는 사람 14
  2. 2009.08.06 [인터넷] 반갑지 않은 부활 4
  3. 2009.05.09 [음반] 춤을 추다 1
만끽!2009. 9. 12. 15:28


 기대작에는 따라붙는 숱한 '말'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난 <마더>를 보기 전부터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이 영화에 대한 얘기들에 최대한 귀를 닫으려 애를 써야만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정적 스포일링을 제외한 얘기들은 어쩔 수 없이 내 귀에 와 닿았다. 이를테면, "아름다운 모성애 이야기를 기대하지 말라"는 얘기, 그리고 "엄마가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알게 될 것"이라는 얘기, 또는 "상당히 불편한 이야기"라거나 "마지막에 반전이 있는 이야기"라는 얘기 따위들이다. 그런 얘기들로부터 난, 그만 이 영화가 엄청나게 기괴한 이야기일 것이라고 짐작하고 말았다. 이를테면, 범인이 알고보니 엄마였다거나, 혜자와 도준이 사실은 모자 사이가 아니라 연인 사이라거나. ;;;

 지나치게 기괴한 짐작은 오히려 이 영화에 대한 이러저러한 얘기들에 노출된 나를 비로소 영화에 온전히 몰입할 수 있는 상태로 만들어 주었다. 완전히 엇나간 선입견으로부터 영화를 마주하기 시작했으니, 백지 상태에서 본 것보다 영화에 대한 이해도를 더 높이는 효과를 거둔 셈이다. 결론적으로 내가 본 <마더>는 다행히 내 지나치게 기괴한 짐작과는 달리 지극히 정상적인(!) 엄마의 이야기였다. "극도의 아름다운 모성애 이야기"였고 "엄마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알게 됐으며, 너무나도 감동스럽고 가슴 아팠다.

 엄마의 사랑과 엄마의 헌신이 어떻게 그저 좋을 때에만, 마냥 좋은 모습으로만 나타날 수 있겠나. '엄마'라는 존재는 (특히 대한민국에서는)원체 "진 자리 마른 자리" 가리지 않는 법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이, 나 역시 <마더>를 보는 내내 우리 엄마를 연상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우리 엄마도 그런 분이셨다. 아들에게는 '데모질'이 몹쓸짓이라고 누누이 강조하시면서도, 그게 아들을 위한 일이라고 한다면 도리어 앞장서 데모에 나서는 분이셨다. 아들이 어릴 땐 옳은 것 그른 것을 가르치셨지만, 다 큰 아들이 옳은 것 그른 것을 가려 말씀드리면 그게 그저 옳은 것이고 그른 것이라고 받아들이셨다. 엄마의 사랑은 맹목적이고 조건이 없다. 이유가 없고 이성적으로 따질 게 아니다. 그저 자식이 목적이고 이유고 유일한 조건이다. 수단은 무엇이 되든 상관 없다.

 <마더>에서 엄마의 사랑과 헌신이 끝간 데까지 가서 그렇지, 따지고 보면 이 세상 엄마의 사랑은 모두 같은 모양이다. 자식 인생을 좌우하는 교육권에서 과도하게 치맛바람을 날리시는 대치동 엄마들이나, 열사가 된 아들로 인해 남은 인생을 투사로 살고 계시는 엄마나, 풍진 세상 홀로 남겨져 괴로운 인생 살게 할 수 없다며 철부지 자식에게 동반 자살을 강요하는 엄마나... 각기 지닌 사연과 드러나는 모습이 다를 뿐 부피와 출발점은 같다. '헌신적인 모성애'나 '비정한 모정'조차 실은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하나같은 자식에 대한 엄마의 고유 정서다.

 마지막 장면, 관광 버스를 광란의 도가니로 만드는 그 아줌마들도 실은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가 사랑하는 엄마들이다. 한없이 좋은 모습을 보이다가도 한없이 창피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 너무나도 정상적인 엄마들이다. '대한민국 아줌마'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더러 눈쌀을 찌푸리게 만들지라도, 결코 미워해선 안될, 내겐 하나 뿐인 엄마들이다. 

 도준 역을 맡은 원빈의 가장 큰 단점은, '너무 잘 생긴 얼굴'이다. 연기자 원빈 본인으로선 억울해할 만한 일일텐데, 띨빵한 도준의 캐릭터에 원빈의 눈부신 얼굴은 관객의 감정 이입을 방해하기 충분했다. 나무랄데 없었던 연기력에도 불구하고, 차라리 원빈이 아니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쉬울 것 없을 것만 같았던 원빈에게 너무 잘 생긴 얼굴이 도리어 걸림돌이 될 줄 누가 알았겠냐만, 연기자로서 발전해 나가려면 배역 결정에 있어 본인 욕심을 좀 덜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한민국 대표 엄마' 김혜자의 연기는 이제 별로 놀랄만한 일도 아니다. 딱 기대치만큼 해주었는데, 사실 그 기대치는 이미 최고치였다. 그걸 가뿐히 해내다니, 대표배우는 역시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부분에서 도준이 침통을 챙겨줬을 때 그걸 받아 들고 황망히 자리를 피하는 롱테이크 장면에서의 표정 연기는 정말 압권이다. 짧은 순간 이루 말할 수 없을만큼 다양한 표정이 스쳐 지나가는데, 그 장면에서만큼은 그동안 충무로에서 난다긴다 하는 배우 누구를 갖다 대놔도 김혜자를 대신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표정은 또한, 초인적이기까지 한 엄마도 자식 앞에서 자식에게만큼은 알리고 싶지 않은 일을 들켰을 때 와르르 무너지게 되는, 세상에서 가장 약해지는 순간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엄마라는 사람은 자식을 위해 강해지고 자식 앞에서 약해지는, 그런 사람이란 얘기다. 

 봉준호 감독의 '썰 푸는 능력'은 한국 영화판에선 이미 최고다. 단순한 이야기를 재미나게 전개시키는 이야기꾼으로서의 그의 재능은 이번 영화에서도 여지없이 빛났다. 어찌보면 밋밋한 시놉시스를 가지고 2시간이 넘도록 관객의 호흡을 농락하며 관객의 시선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고 가는 봉 감독의 연출력은, 앞으로도 최소 몇 년동안은 그의 작품을 주목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calvin.
Posted by the12th
만끽!2009. 8. 6. 20:08


 <딴지일보>를 마지막으로 봤던 게 언제였더라? 2002년 대선 직전, 대권 도전자들을 도발적으로 인터뷰했던 기사를 인상적으로 기억하고 있는 걸 보니, 그 때까진 비교적 꾸준히 이 '신생 매체'를 찾았던 모양이다. 그 이후, (지금은 부쩍 커지다 못해 막 나가는) 김구라와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황봉알을 내세웠던 인터넷 라디오 방송이 런칭됐던 것이나, 성인들의 명랑 성생활을 지향하며 '남로당'을 출범시켰던 것을 어렴풋이 기억하는 걸 보면, 그때까지만 해도 간헐적으로 이 사이트를 드나들긴 했던 것 같다. 그리곤 기억이 없다. 그러니까 대략 한 5년동안, <딴지일보>는 잊혀진 존재였다. "그거 아직도 있나?" 싶을 정도로 차라리 내게는 폐간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제와 지난 기사들을 찾아 보니, 없어졌는 줄 알았던 지난 시간 동안에도 <딴지일보>는 꾸준히 기사를 양산해 내 왔더라. 그건 예전처럼 정치 사회 문화 성인컨텐츠를 망라한, 여전한 수준과 물량이었다. 그런데 왜 그동안은 눈 밖에 났던 걸까? 왜 한 때 인터넷의 새로운 시장을 개척한 것으로 평가받았던 이 매체가 잊혀진 존재가 되었던 것이냐?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가령 <오마이뉴스>나 <프레시안>같은 다른 매체들이 보다 뉴스다운 컨텐츠를 쏟아내 놓으며 '대안 매체'의 자리를 잠식해 버렸달지, '재미'있기는 <디씨인사이드>나 <풀빵닷컴>같은 골때리는 사이트들이 <딴지일보>는 게임도 안 되게 더 재미있었달지 . 팬더와 같은 주요 필진들이 총수와 갈라서며 <미디어몹>으로 떨어져 나간 것도 동력 상실의 요소였다. 게다가 초창기 센세이션을 불러왔던 '딴지투'는 자극적인 세상의 모든 것이 그러하듯, 식상해져 버렸다. 개인적으론 <딴지일보>에서 어느 날부터인가 주구장창 '명랑 성생활'만 떠들어대는 걸 보곤, 맛이 갔다고 단정지었다. <딴지일보>는 없어도 될, 그저그런 인터넷 신문 중 하나가 되는 것 같았다.

 그랬던 <딴지일보>가 돌아왔다. 관에 못질을 했어도 진작 했을 것만 같던 '구식 매체'가 다시 활력을 되찾았다. 식상했던 딴지투는 다시금 따라하고 싶을만큼 매력적이 되었고, 감을 잃은 것 같았던 재미도, 오, 빵빵 터져주신다. 매일 사이트를 찾아 왜 업데이트가 안 되는 거냐고 성질을 내기 시작했다. 언제 냉랭했냐는 듯, 기사마다 만면에 웃음을 선사하고 마음을 훈훈하게 만들어준다. 이게 다 MB덕분이다.

 내가 <딴지일보>를 다시 찾기 시작한 건, 노짱 서거 직후, 김어준 총수가 한겨레에 쓴 칼럼을 읽으면서부터다. 그 칼럼에서는 2002년 대선 전에 노짱과 했던 인터뷰를 언급하며 고인을 기렸는데, 내 기억에도 그 인터뷰 기사는 넷심의 상당 부분을 노짱으로 향하게 했을만큼, 솔직함이 정말 매력적이었던 대단히 파괴력 있는 기사였다. 그 칼럼을 읽고 옛날 그 인터뷰 기사를 다시 찾아 읽고 싶었다. 그렇게 다시 찾은 <딴지일보>에서 이 신문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만거다.

 칼럼에서 총수는 분개해 있었다. 하지만 그 분노를, 그는 딴지의 방식으로 표출하고 있었다. 전직 대통령에 대한 정치 살인과, 소통 없이 밀어부치는 오만과, 공권력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 드는 만행과, 최고 국가 수반의 참을 수 없는 허접함을 <딴지일보>는 특유의 방법으로 가뿐히 요리한다. 요리법은 '풍자'와 '해학'이다. 

 대화가 불가능한 폭압적인 권력을 마주했을 때, 힘없는 자들이 할 수 있는 최상의 저항은 풍자와 해학이다. 답답해 홧병으로 죽어나가지 않으려면 허탈한 웃음으로라도 버티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딴지일보>는 거기에 기반해 출발했더랬다. 어느 순간 <딴지일보>가 재미없어지고 효용 가치를 급격히 잃었던 건, 역으로 그런 풍자와 해학이 더이상 필요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는 뜻이었다. 노무현의 5년은 그랬다. "할말을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누구나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는 시절이었다. 풍자와 해학을 굳이 찾지 않아도 소통이 가능한 시절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지금은 풍자와 해학이 다시금 필요해진 시절이 되고 말았단 얘기다. 모든 것의 시간을 역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MB의 요상한 '타임 리프' 능력으로, 그렇게 되어 버렸다. <딴지일보>가 뒤늦게 만개해 회춘하는 것은 바로 그런 사정 때문인 거다. 

 아닌게 아니라 요즘 <딴지일보>를 찾는 심정이 그렇다. 어떤 독자는 "예전에 딴지일보는 재밌기만 했다. 하지만 요즘은 재밌기도 하고 고맙기까지 하다"고 했는데 정말 그러하다. 그런 심정은 한 두명의 독자만의 것이 아니어서, 이미 어떤 독자들은 <딴지일보>에 비품을 보냈는가 하면, 심지어 요구하지도 않은 구독료를 자발적으로 보낼 움직임마저도 솔솔 불고 있다. 

 <딴지일보>의 귀환, 내지는 부활은 사실 반가운 현상이 아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풍자가 필요 없는 시대를 살아야 했다. 그래서 <딴지일보>같은 사이트는 폐간되고 말아야 했다. 풍자와 해학이 필요한 시대는 불운한 시대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우리 손으로 만든 불운한 시대의 유통기한 까지는 어찌됐든 버티고 버텨 살아 남아야 하지 않겠나. 그러기 위해서라도, <딴지일보>는 정말이지 강추 중에 강추다.

 (특히 김어준 총수의 '틈새 논평'을 새겨 보시기 바란다. 어느 매체도 주목하지 않지만 어찌 보면 가장 본질적인 문제를 지적해주는 명코너다. '촌철살인'의 언론이 사라진 시절에, 그 정수를 깨닫게 해준다.)

calvin.

p.s. 미디어법을 염두에 둔 행보인가...? 김어준 총수는 요즘 <뉴욕타임스>라는 이름으로 한겨레 인터넷 TV 방송도 진행하고 있다. 딴지다움이 철철 흘러넘치는, 훈훈한 프로그램이다. 이것도 함 챙겨보시라.
Posted by the12th
만끽!2009. 5. 9. 13:48












 타고난 몸치인 나는 춤을 추지 않는다. 클럽을 의도적으로 회피하고, 소싯적에 록카페를 가봤으나 그냥 맥주만 빨고 있었을 뿐이다. 회사 회식 끝무렵에 취한 상태로 가는 노래주점에서조차 흥을 내는 몸짓 한 번 보여주지 못해 분위기를 망치기 일쑤였다.

 물론 환희가 극에 달했을 때, 몸은 내가 의도치 않아도 알아서 움직이게 마련이다. 원래 춤이란 게 작심하고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스스로 흥겨울 때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춤 추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댄스 음악류를 들으면서도 내 몸은 뻣뻣하게나마 좀체 움직여 본 적이 없다. 내가 몸으로 표현하는 환희는, 기껏해 봐야 축구장이나 록 공연장에서 방방 뛰고 팔을 휘둘러대고 머리를 흔드는 정도다. 

 프란츠퍼디난드의 새 앨범 <Tonight>을 다소 뒤늦게 구했다. 그렇잖아도 2집 이후 소식이 뜸했던 이 밴드의 근황이 궁금하던 차였다. 그러고 보니 정말 오랜만에 나온 세 번째 앨범, 반가운 마음에 앨범을 뜯자 마자 시동을 건 윈스톰 스테레오에 CD를 밀어 넣었다. 1집이나 2집과 다르지 않은 사운드며 음악 컬러에, "음, 역시로군" 하며 도로를 달렸다. 그러다 어느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대기를 하고 있을 즈음, 몸이 들썩였다. 차는 그대로 멈춰 서 있는데, 어느 결에 손도 운전대에서 뗀 채, 나는 그만, 앉아서 춤을 추고 있었다!

 카스테레오가 'Track 3'라고 일러줬던 그 노래는 'No You Girls'였다. 언제나 그러한(!) 프란츠퍼디난드의 리듬과 멜로디로 시작하는 듯 하다 "no no no you girls never know"하는 절정부에 접어들면 사람의 몸을 은근히 들썩거리게 만드는, 와우, 그야말로 신비로운 능력이 있는 노래다. 

  "소녀들을 춤 추게 만들고 싶었다"던 데뷔 당시의 기조를 프란츠퍼디난드는 버리지 않았다. 경쾌하고 신나고 그래서 펑크록처럼 요란하지 않아도 충분히 춤을 추게 만드는 록큰롤은 그들의 트레이드마크다. 라디오헤드나 뮤즈처럼 한없이 우울해지는 모던록이 있는가 하면, 모던록도 춤 추고 싶게 만들 수 있다는 걸 보여주겠다는 투다.

 'No You Girls'의 강도가 가장 세지만, 다른 트랙들도 몸을 움직이게 하는 능력은 평균 이상이다. 알렉스의 감질 맛나는 보컬로 손가락부터 까닥이게 하는 'Ulysses', 'No You Girls'의 흥분을 그대로 이어 나가는 'Send Him Away', 경쾌한 리듬감이 다리부터 근질거리게 만드는 'Bite Hard', 어깨춤을 이끌어내는 'What She Came For', 제목 그대로의 'Can't Stop Feeling'도 모두 무아지경의 경지를 만날 수 있게 한다.

 40분 가까이 춤을 추다 보면 마지막 트랙 'Katherine Kiss Me'를 만나게 된다. 해독제 같은 노래다. 앨범 내내 춤에 탐닉해 들어갔던 기분을 다시금 맑고 청아하게 씻어 되돌려 준다.

 <Tonight>에서 한층 업그레이드 된 프란츠퍼디난드의 댄서블한 음악은 강화된 일렉트로니카에서 비롯된다. 일렉트로니카의 효과는 8분에 가까운 'Lucid Dreams'에서 극대화 되는데, 특히 4분 50초 쯤부터 시작되는 압도적인 신디사이저 음은 몽환적인 이 노래 뿐 아니라 전체 앨범의 분위기를 절정으로 이끈다. 차 안에서 볼륨을 있는대로 올리고 이 노래를 듣는데, 순식간에 차 내부가 바깥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로 돌변하는 느낌이었다. 반드시 헤드폰으로, 귀를 틀어 막은 채, 빠져들어 보기를 추천한다.

 올 여름에 국내 락페스티벌에 온다는 소식이 들리던데, 지난 해 카사비안을 놓친 나로선, 프란츠퍼디난드는 오아시스와 함께 반드시 락페스티벌을 사수해야 할 이유다. 그곳에서, 난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은채, 마음껏, 춤을 추고 싶다.

the best track : No You Girls

calvin.
Posted by the12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