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끽!2018. 5. 27. 22:01


누군가 <레디 플레이어 원>의 원형이 <주먹왕 랄프>에 있다고 그래서, 애니메이션 <주먹왕 랄프>를 봤다. 그러고 보니 일전에 취향저격이 될거라며 일찌기 추천받았던 애니메이션이었다.


- <레디 플레이어 원>이 주인공이 게임 속으로 들어가서 벌어지는 이야기라면, <주먹왕 랄프>는 게임 속 주인공들의 이야기다. 특히 오락실에서 즐겼던 추억의 아케이드 게임들을 그대로 접목해, 어렸을 때 오락실 죽돌이들이었다면 마치 <레디 플레이어 원>을 보며 팝컬쳐 아이콘들을 찾던 재미를 여기서도 느껴볼 수 있겠다.


- 게임 속 세상을 대단한 상상력으로 잘 구현해 놨다. 코드라든지, 오류라든지, 버그(사이버그!) 등의 게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기술적 개념들도 아주 훌륭하게 잘 이야기 속에 버무려놨다.


- 오락실 게임에서 건물 깨부수는 악당 역할을 하는 랄프가, 왜 자기는 영웅이 돼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수 없냐며 불만과 의문을 품는 것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슈렉>처럼 안티히어로의 서사인데다, 프로그래밍 된 본인의 '운명'을 거스르고자 하는 메시지까지 내포돼 있어, 오락실을 잘 드나들지 않아 옛날 게임을 즐기지 못했음에도 상당히 내 취향이다.


- 프리퀄의 방식으로 사고해 보면, 더 생각할 여지가 있다. 원래 세가에서 만든 이 게임의 프롤로그에서 랄프는 그저 평화롭게 나무 그루터기에서 살던 야생의 존재였는데, 어느날 아파트 개발에 삶의 터전을 잃고 똥무더기에서 살게 되면서 분을 이기지 못하고 아파트를 깨부수는 악당이 되었다. 악당은 원래 악당인가, 그 악당을 만든 배경은 무엇인가, 선악의 구분은 누가 어떤 기준으로 정하는가, 뭐 이런 피곤한 생각까지, 하려면 할 수도 있겠다.


- 그보다, 꼬마아이 바넬로피와 랄프의 교감 과정이 특히 내 마음을 건드렸다. '미운 7살'을 제대로 선언한 딸 아이가, 부쩍 훈육을 거부하는 사례가 늘어 갈등이 격해지던 중인데, 요즘엔 애가 다칠까봐 지적하는 문제들에 대해서도 따르지 않고 미운짓을 해대는 통에 결국 고함치며 화도 몇번 냈었다. 애니메이션에서 (킹 캔디의 농간에 속아넘어간 것이긴 해도) 바넬로피를 걱정하고 생각해 그녀의 차를 부수는 랄프와 거기에 상처를 받는 바넬로피를 보면서, 목적이 아이를 위한 것이라 하여 방법까지 수용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나의 훈육에 아이를 끼워맞추려 하기 보다, 훈육 방법을 바꿀 것을 생각해 봐야겠다.


- 조만간 <주먹왕 랄프> 2가 나올 모양인데, 기다려진다. 딸 아이랑 같이 사이좋게 볼 수 있으면 더 좋겠다.


ca;lvin.

Posted by the12th
만끽!2018. 5. 27. 21:59



다카하타 이사오 선생을 추모하며, 그의 유작 <가구야 공주 이야기>를 봤다.


- 원작이라 하기도 뭣하지만, 이 애니메이션은 일본의 가장 오래된 구전 민담을 애니메이션화 한 것이라고 한다. 물론 큰 줄거리를 가져왔다는 것이고, 디테일한 이야기 전개는 감독의 역량이 채웠다.


- <가구야공주 이야기>에는 여성, 생태, 생명 존중, 본질적 행복 추구, 기성 체제에 대한 저항 등 다카하타 이사오 선생이 평생 작품 속에 녹여왔던 주제들이 모두 담겨 있다. 일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고 친숙한 이 고전에 자신의 (다소 과격한) 작품 철학을 절묘하게 접목시킨 지점이 놀라웠다.


- 작화의 완성도에 대한 고집스러움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추억은 방울방울>에서 실사를 방불케 하는 디테일한 그림에 홀딱 반했던 기억이 있는데, 현대적 (미야자키 식)그림체를 버린 이후에는 그야말로 득도의 경지에 올랐다. <이웃집 야마다군>도 그랬지만, 여백을 한껏 강조해 단조로우면서도 그러나 있을 거 다 있는 이 애니메이션의 그림체에서도 그 특유의 장인 정신이 묻어난다. 특히 가구야 공주가 연회장을 박차고 산으로 뛰쳐 나가는 장면은 정말 기가 막힌다. 제작기간이며 막대한 제작비가 다 수긍이 간다.


- 산중의 노부부가 어린 딸을 얻게 돼 애지중지 키운다는 이야기는 다카하타 이사오의 대표작이자 초기 연출작인 <빨간머리 앤>을 연상시켜 느낌이 찡했다. 딸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는 특히 이 이야기가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진정한 행복은 세속적인 데에 있는게 아니라는 가르침, 삶 그 자체의 가치에 대한 깊은 통찰은 양육자에게 짙은 울림을 준다. 괜히 거장이 아니다.


- 이 정도의 작품을 유작으로 남겼으니, 다카하타 선생은 분명 열반하였을 것이다. 다시 한 번 고인의 명복을 빈다.


calvin.

Posted by the12th
만끽!2018. 5. 27. 21:57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을 봤다. 무료로 볼 수 있는 쿠폰이 있어서 2D로 보려다가 누군가 이건 꼭 아이맥스 3D로 봐야 한다고 그래서, 용산 가서 봤다. 


- 시간적 배경은 2049년, VR 기술을 통한 고도화된 환상적인 가상현실 게임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한 최첨단-미래 지향-유토피아적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더니, 이거 완전 1960-70년대 생 '오타쿠 아재'들을 위한 영화잖아. 애들은 가라, 이거 우리 영화다. ㅋㅋ


- 1980~90년대 비디오게임과 헐리웃과 저패니메이션과 팝송에 통달한 오타쿠일 수록 영화의 잔재미를 느끼기 좋게 만들어 놨다. 난 그 흔한 아타리 게임에 빠진 적도 없고 그닥 오타쿠적인 "그런 삶을 살아 오지 않았"지만, 그런 나조차도 반가운 미소를 머금고 재미를 느끼는 장면들이 넘쳤다. 가령 가네다 바이크나 빽투더퓨처의 드로리안같은 탈것이 나올 때나, 에이리언이나 터미네이터2의 장면들이 패러디될 때, 처키나 건담같은 익숙하고 친숙한 캐릭터들이 나올 때, 나도 흥얼거리는 비지스의 노래가 흘러나올 때, 아, 그리고 <샤이닝>...! 그 호텔과 쌍둥이 자매와 욕조 속의 여성과 도끼질, 도끼질, 도끼질!!!


- 그만큼 자라면서 꼭 오타쿠가 아니더라도 아재들은 자연스럽게 팝컬쳐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던거다. 전후 풍요의 시대 속에서 태어나 그야말로 쏟아지는 대중문화의 비를 맞으면서 자란 세대였으니 말이다. 그 속에서 성장스토리를 썼고 그 자신이 하나의 시대적 상징이 되었던 스티븐 스필버그가 이런 이야기를 담은 원작소설에 매료될 수밖에 없었던 것 역시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고.


- 스필버그는 첨단 기술을 소재로 화려한 그래픽을 앞세운 이 영화를 통해 미래를 그리는 게 아니라, 아이러니하게도 추억을 더듬는다. 핼러데이가 자신의 추억 여행으로 설계한 이스터에그 찾기 게임부터가 그러하다. 스티브잡스가 아이폰이라는 첨단 기술의 집약체를 내놓으면서 아날로그적 감수성을 잔뜩 품은 스큐어모피즘을 강조했던 것을 닮았다. 마치 지금의 세대에게 "너네가 지금 뻑 가는 새로운 기술들 있지? 그거 다 옛날 우리 시절에 이런 게 있었기에 가능한 거야"라고 뻐기는 것도 같다.


- 게다가 이 영화의 플롯을 보라. 80년대에 스필버그 자신이 만들어 왔던 각종 모험담의 뻔한 플롯을 고답적으로 반복하고 있다. 그건 흔한 비디오 게임 플롯같기도 하다. 주인공이 있고, 이뤄야 할 목표가 있으며, 방해하는 악인이 있고 마지막엔 뻔하디 뻔한 교훈도 남긴다. 오아시스는 혼자 독점하면 안 된다고?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 게임을 만들었지만, 사실 진짜 삶은 진짜 현실 속에 있다고? 하나마나한 소릴 교훈이랍시며 제시하는 것도, 스필버그 옹 답다. 한결같아 반가웠다. ㅎ


- 영화에 앞서 CG 애니메이션 시대에 고군분투하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다큐를 봤어서 그런지, 과거를 주워 섬기는 이 영화의 노력이 더욱 눈에 밟힌 것 같다. 말하자면, 옛것의 소중함을 잊지 말라. 온고지신. oldies but goodies 와 같은 이야기. 자꾸 추억에 잠기고 과거를 되짚는 것에 공감하게 되는 걸 보니, 영락없는 꼰대가 다 되었나 보다. 아놔. ㅋㅋㅋ


- "콘텐츠의 미래는 게임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을 적이 있다. 내가 주인공이 되어 스토리를 만들어나가는 것만한 몰입도 높은 콘텐츠는 없다는 얘기다. 이 영화가 딱 그렇다. 스토리를 쫓아 주인공과 함께 추억을 되짚어가며 핼러데이가 남긴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는 재미도 있지만, 결정적인 건 영화 스토리와 관련없는 데 있다. 바로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숨겨진 8-90년대 캐릭터들과 각종 팝컬쳐 레퍼런스들을 찾아내는 것, 이거야말로 오아시스와 마찬가지로, 영화 속에서 수많은 '이스터에그'를 찾아나가는 한 편의 게임이다.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은 관객들로 하여금 게임을 하게 만들었다는 것일테다. 훌륭하다.


calvin.

Posted by the12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