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막 올라와 다시금 암담한 사회팀 생활을 해야 했을 때 그는 마침 사회팀 바이스였다. 캡이 엄한 아버지의 역할을 한다면 바이스는 원체 자상한 어머니 역할을 하는 편이어서, 그는 그 자리에 맞춤으로 보였다. 서글서글한 눈빛에 언제나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던 그였기 때문에 그에게선 늘 선한 빛이 감돌았다. 한없이 따뜻하고 마냥 사람이 좋아 보였다.
그런 그에 대한 내 인식에 작은 균열이 생겼던 첫번째 계기는, 같은 라인의 1진 선배가 했던 어떤 얘기가 만들었다. 당신이 수습 때 일을 배웠던 게 그였는데, 사소한 실수를 매섭게 지적받은 기억 때문에 아직까지도 회사 내에서 다른 누구보다도 그가 가장 무서운 존재라는 것이었다. 난 그 얘기를 들으며 그토록 친절한 표정의 그가 누군가를 사납게 쪼아대는 모습을 머릿속으로 재구성해 보려 했지만, 그만 실패하고 말았다. 그가 무서울 수 있다는 점은 이론으로만 가능한 얘기인 것처럼 여겨졌다.
이론이 현실에서 드러나 보이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처음 내가 그를 봤을 때 그는 캡과의 불화로 다소간 힘겨워 하고 있었는데, 일정한 상황을 지낸 뒤 그는 마음을 단단히 다져 잡고 제 역할을 본격화 하기 시작했다. 사회팀 안에서 바이스로서의 지분과 발언권, 결정권 따위를 조금씩 확장해 나가기 시작했고 더러는 캡과의 마찰을 정면 돌파해 나갔다. 치밀하고 집요하고 다부졌던 그 모습들로부터, 난 비로소 그가 그냥 속 없이 사람 좋기만 한 인물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의 투쟁은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아서 끝내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기도 했다. 그리고 그가 그 투쟁 끝에 자신의 지분을 일정하게 확보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가 행사하는 권한으로부터 누군가 어처구니 없이 오해를 사고 피해를 보게 되는 상황도 만들어졌다. 그럴 때 그는 심지어 주도면밀하기까지 했고, 마음 속 깊은 곳이 소스라칠만큼 정말이지 무서운 사람이었다. 난 맑디 맑은 인상을 하고 사실은 치밀했던 그가, 너무 무서웠다.
그를 전혀 모르던 사람들도 이제는 어느정도 알다시피, 그는 좋은 아빠였고 멋진 남편이었다. 그리고 회사 선배들에게는 명민한 후배였고, 후배들에게는 자신의 경험으로 배운 점을 조금이라도 더 일러주고 싶어 했던 자상한 선배였다. 취재 현장에서 또는 회사에서, 그는 꼼꼼하고 열정적이고 사명감을 다하는 훌륭한 기자였다. 그런 점들은 그가 너무 투명하게 내비쳐 보여져서 굳이 그에 대해 심도있게 알고 싶지 않아도 너무 분명한 면들이다. 그는 매스컴이 전하는 말들이 한 점 과장이 없을만큼,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또한 내가 느낀 바, 그런 사람이기도 했다. 한없이 좋다가도 어느 순간 무섭고 어렵고 부담스러웠다. 까다롭고 호오가 분명했다. 자신의 가치관이 선명해 상대에게도 기면 기고 아니라면 절대로 아니었던 사람이었다. 자신의 앞 길을 모색하고 치밀하게 내일을 전망하는 사람이었다. 그랬으니 일로도 일정한 성취를 거둘 수 있었겠지만, 내게 그의 그런 면들은 다소간 거북하기도 했더랬다.
그가 1년 6개월 가까이 긴 바이스 생활을 마치고 사회팀을 떠나던 날, 난 환송회 자리에 그의 그림을 하나 그려 그에게 전했다. 그는 내게 나직이 "고맙고, 미안하다"고 말했다. 난 그가 '하필' 나에게 그 말을 했던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도 그동안 마음에 두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정말 고맙고 미안했던 것은 다름 아닌 나였다. 그 모든 것은 사실 나의 거리두기 탓이었다. 그는 나에게조차 틈만 나면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줌으로써 보다 나은 후배로 나아감에 떠밀어 주려 했다. 그 날 그에게 남은 마지막 서먹함에 차마 그 말을 하지 못했던 나는 결국 앞으로도 영원히, 영영, 그 말을 그에게 건네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고마웠어요, 바이스.
그리고, 정말 미안해요.
안녕히 가세요.
좋은 곳에서 부디 편히 쉬어요...
calv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