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에 해당되는 글 9건

  1. 2009.11.06 작별인사 2
  2. 2009.06.02 盧公移山 4
  3. 2009.05.28 노짱과 노빠 2
후일담2009. 11. 6. 12:26


 장례식이 치러졌던 5월 29일에, 난 사회팀으로 파견됐다. 국민장 특집 뉴스에 사회팀 일손이 많이 필요했던데다, 반면 이런 특집 뉴스의 경우 경제팀에선 딱히 할 일이란 게 없기 때문이다. 난 이례적으로 차출을 반겼다. 경제팀 농식품 부문을 맡은 까닭에, 노짱 서거 정국에서 기자로서 별다른 기능을 하지 못했던 것이 내심 마음에 걸려있던 참이었다. 개인적으로야 그의 삶을 마음에 새기고 그의 죽음이 지닌 뜻을 기렸지만, 기자된 입장에서도 무언가 자취를 남기고 싶었다. 국민장 특집 뉴스에서의 사회팀 파견은, 나로선 직업적으로 그를 추억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내게 할당된 아이템은 '시민 분향소 7일의 정리'였다. 굳이 촬영하러 나갈 일도 없었다. 국민장 기간동안 덕수궁 앞에서 찍어온 무수한 테이프들이 이미 있었기 때문이다. 그 자료들을 꼼꼼이 새겨 보고 녹취를 정리하고 잘 구성하고 편집하면 될 일이었다. 난 한 박스 되는 테이프들을 순서대로 챙겨서 편집실에 틀어박혀 부지런히 그림들을 스캐닝했다.

 테이프에는 말로만 듣던 시민들의 취재 거부 현장도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카메라를 내려놓은채 마이크를 켜 놓아 현장을 담아낸 그 촬영본에선, 차분한 어조로 왜 취재거부를 할 수밖에 없는지 설명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남아 있었다. 그들은 흥분하지 않았고 이성을 잃지도 않았다. 오히려 지나치게 이성적으로 취재를 거부하고 있었다. 그쯤 되면, 도저히 그들의 의사를 거스른채 취재하는 게 불가능한 일이다. 현장의 기자가 느꼈을 곤혹스러움과 자괴감은, 그 장면을 뒤늦게 바라보는 내게도 고스란히 전달됐다. 

 시민 분향소의 7일을 함축적으로, 그러면서도 의미있게 담아내는 것이 내 목적이었다. 의미있는 녹취를 추리고 영상을 구성했다. 첫 문장이었던 "낮에는 국화가, 밤에는 촛불이"는, 시민분향소에 있던 시민들이 썼던 그 문구였다. 그 외에 그 현장을 함축적으로 표현할 길은 없었다. 그리고 노짱의 삶과 죽음이 살아남은 자들에게 남긴 의미를 담아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나서 서로를 돕는 모습은 고인이 꿈꾸던 세상을 닮았습니다"라고 시민분향소를 평가했다. 말 그대로의 "깨어있는 시민의 자발적 참여"에 고인은 지하에서라도 바라보고 흐뭇해 했을지 모를 일이다.

 사실 나 역시 덕수궁 앞 분향소를 다녀와 봐 느껴봤지만, 현장의 감정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분노'였다. 미안함이나 안타까움은 그 다음이었다. 덕수궁 돌담길 주변을 가득 메운 사람들의 격문에는 분노의 감정이 압도적으로 표출돼 있었다. 난 그걸 외면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해서, 내가 애초에 썼던 원고는 "슬픔과 안타까움, 자책감, 그리움, 먹먹함, 그리고 정부에 대한 분노... 시민 분향소에는 시민들의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났습니다."였다. 데스크는 "정부에 대한 분노"를 거론하는 것이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최종 원고에서 그 부분이 빠진 것은 그 때문이었다. 클로징 멘트 역시 원래 내가 썼던 원고는 "지난 7일 동안은 사방이 막힌 서울 광장보다 차라리 이곳이 시민들의 광장이었습니다" 였다. 이 부분 역시 데스크 과정에서 한결 다듬어진 언어로 바뀌었다.

 나는 여전히 방송이 '있는 그대로의 민심'을 실어 전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방송의 파급 효과 때문에 그것이 '정제'될 필요가 있다는 주장에 그렇지 않다고 적극적으로 반박하지는 못한다. 데스크와 짧은 커뮤니케이션 뒤에 난 데스크의 판단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렇게 난 노짱을 향해 기자로서의 작별 인사를 건넸다. 1주일 내내 마음을 짓누르던 먹먹함, 상실감, 미안함도 그제서야 조금 걷어낼 수 있었다. 리포트 BGM에 사용한 음악의 제목처럼, 그렇게 벚꽃이 지는 것과 함께, 그 봄날은 끝이 났다.

calv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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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듦2009. 6. 2. 22:06

 그가 선택한 죽음은 그의 삶과 같았다. 마지막 순간 바위 위에 자신의 몸을 내던졌던 그가 일생동안 살아왔던 삶 역시, 한결같이 "계란으로 바위 치는 일"이었다. 지역 할거 주의에, 보스 정치에, 자본에, 언론 권력에, 문벌 주의에, 권위와 폭압에, 세상 모든 종류의 차별과 불평등에 그는 우직하게 맞서 싸웠다. 여와 야, 주류와 비주류를 막론하고 공고하게 포진해 있던 '앙시엥 레짐'에 대한 그의 도전은 사실 무모해 보였다. 그는 포기하지 않았고, 마침내 자신의 진심을 '직접' 소통할 수 있었던 인터넷을 만났다. 무모했고 어리석었고 불가능해 보였던 일이 일어났고, 그는 기어이 계란으로 바위에 얼마간의 균열을 내고야 말았다. 그건 '작은 혁명'이었다.

 거대한 바람에 잠시 어안이 벙벙했던 기득권 세력은 이내 정신을 차렸다. 그들은 인정할 수 없었다. 별볼 일 없는 빈농 가문에, 학번으로 얽을 수 없는 상고 출신. 하고 싶은 말을 거침 없이 하고, 조금도 굽실대지 않는 자. 비루하고 힘 없는 이들을 대변하려 들고, 기득권을 떼어 내 놓으라고 요구하는 자를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야말로 "어디서 굴러 들어온 놈"을 권력의 최상층부에 '모실' 수 없었다. 서둘러 끌어 내려야 했다.
 
 탄핵은 그런 조바심이 빚은 가장 노골적인 첫번 째 시도였다. 지역주의를 자극해 정치하지 말자는 그의 적극적인 움직임이 민주당 분당 사태를 빚게 되자, 지역주의 정치로 나름대로 입지를 굳혔던 민주당 잔당 세력은 독이 바짝 오른 나머지 한나라당과 함께 그를 끌어내린다. 그렇지만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 '의회 쿠데타'는 국민과 헌법재판소의 저지로 처참하게 실패하고 만다. 상대를 너무 얕잡아 봤음을 깨달은 그들은 장기전을 모색했다.

 그의 임기 내내 마치 와신상담이라도 하듯 집요하고 치밀하고 악랄하게 그의 지지 기반을 갉아 먹고 들어간 것은 언론 권력이었다. <조선일보>로 대표되는 수구 언론은 그의 말과 행동 정책을 하나같이 악의적으로 몰아갔다. 그들에 의해 그의 구상은 '꼼수'가 되고, 그의 솔직한 언변은 '막말'이 됐다. 여러 해에 걸쳐 집요하게 반복되는 그들의 흑색선전은  점점 큰 효과를 발휘했다. 처음에 '설마' 하던 사람들도 그들이 불어대는 나팔 소리에 현혹돼 마치 기득권 세력이 그러듯, 그를 경멸해 나가기 시작했다. 저잣거리에선 모든 잘못을 그에게 돌리는 말이 유행처럼 번졌다. 

 지지자들마저 등을 돌리고 그의 인기가 떨어지자, 그의 가치를 좇아 열린우리당으로 모였던 이들마저도 그에게 손가락질하며 다시 손쉬운 지역주의에 기댔다. 국민들이 그로부터 멀어지게 된 것을 기다리기라도 하듯, 기득권 세력은 다시 구체제를 공고히 만들었다.

 오랜 노력으로 국민들의 눈과 귀를 멀게 한 뒤 그들은 권력을 다시 탈취해 냈다. 그는 조용하고 담대히 고향으로 내려가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갔다. 평범하게 농삿일을 시작했다. 기득권 세력은 마지막에 인기가 없었던 그를 뒤에서 조롱하고 비웃었다. 그를 실패자로 만듦으로써 그가 꿈 꾸었던 세상을 헛된 이상으로 내몰고, 그로 인해 자신들이 기득권을 천년만년 유지할 수 있는 체제가 더욱 강화될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그는 가장 낮은 모습으로, 가장 폄범하게 낙향했을 뿐이었는데, 그를 찾는 사람들이 늘어만 갔다. 작은 시골 마을에 사람들이 수백명 씩 몰려가 그를 연호하고 그를 바라보며 즐거워했다. 퇴임 직전 인기가 바닥을 기던 대통령이라고는 누구도 생각할 수 없을만큼, 그에 대한 관심과 인기는 뜨거워져만 갔다.

 그들은 초조해졌다. 그에게 쏠리는 사람들의 관심, 그의 이상에 고개를 돌리는 사람들의 눈길이 부담스러워졌다. 어떻게 되찾은 권력인데, 다시 그가 정치를 하려 들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국민들과 있는 그대로 소통하는 그의 힘이 두려웠다. 

 그들은 다시 그를 흠집 내기로 했다. 자신의 재임 기간 기록물을 갖고 있다는 것을 두고 '불법' 운운 하며 그를 범법자로 만들려 들었다. 그 법을 만든 이가 바로 그 자신인데 말이다. 그가 인터넷 토론 사이트를 개설하려는 것을 두고도 수구 언론은 그가 '인터넷 대통령'을 참칭하려는 것이라고 갖은 흑색선전을 일삼았다. 전직 대통령의 사회에 대한 작은 발언조차 용납하려 들지 않았다. 두려웠기 때문이다.

 결국 그와의 이른바 '검사와의 대화' 끝에 국민들로부터 망신을 사고는 벼르고 별렀던 검찰을 앞세웠다. 검찰은 그의 도덕성에 흠집을 내 정치적 재기의 싹을 잘라버리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그의 주변을 샅샅이 뒤졌다. 결국 뚜렷한 증거는 없지만 여론 재판하기 좋은 건수를 하나 물게 되자, 그들은 언론 권력과 함께 그에 대한 마녀재판을 벌였다. 그는 항변하고 싶었고, 해명하고 싶었고, 법리 다툼을 벌이고 싶었지만, 이미 그들이 짜 놓은 프레임 안에서는 어떠한 해명도 국민들에게 온전히 닿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남아 있지 않았다.

 바위 위에서 결국 몸이 으스러진 그의 실험은, 그로써 좌절하고 만 것일까? 그가 품었던 이상, 그가 했던 도전, 그가 벌인 싸움, 그가 이루고자 했던 세상은 그의 육신이 사라짐으로 해서 동시에 먼지처럼 사라지고 만 것일까?

 인터넷에서 그가 자신을 이르던 이름은 '노공이산'이었다. '우공이산'이라는 고사에서 빌어온, 그에게 썩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모두가 불가능하다며 비웃는데도 뚜벅 뚜벅 산을 옮기려 했던 노공은, 끝내 미처 산을 다 옮기지 못한 채 영면에 들었다. 그래서 그의 노력이 헛되이 된 것일까?
 
 고사에서 우공은 말한다. "나는 늙었지만 나에게는 자식도 있고 손자도 있다. 그 손자는 또 자식을 낳아 자자손손 한없이 대를 잇겠지만 산은 더 불어나는 일이 없지 않은가. 그러니 언젠가는 평평하게 될 날이 오겠지."

 그 산을 옮기는 일은, 이제 남아있는 그의 '아들들'의 일이 되었다.

calvin.
Posted by the12th
얄라리얄라2009. 5. 28. 17:55

 나는 조롱이 섞인 그 표현을 좋아하지 않아 한사코 그렇지 않다고 해왔지만, 주변 사람들은 나를 '노빠'로 알고 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나의 정서 역시, '비판적 지지자' 쪽 보다는 '노빠'쪽에 더 가까웠을 것이다. 나는 그를 참 좋아했고, 지지했으며,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지지하게 했고, 그를 두둔했는가 하면, 그래서 더러는 곤란한 지경에 이르기도 했더랬다. 그런 점에서, 이제사 고백하지만, 그래, 난 '노빠'다.

 이제는 모두가 알고 있는 그 2000년 총선 직전까지, 나 역시 그의 다른 팬들이 그러했듯, 그를 잘 알지 못했다. 청문회 스타, 전두환에게 경망스럽게도 명패를 집어던진 의원,  그리고 부산 시장 출마 당시 DJ의 정계 복귀를 노골적으로 불평했던 사람 정도? 그랬는데 그가 총선에서 부산에 그것도 민주당 간판으로 출마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냥 그때 차지하고 있던 지역구만 잘 관리해도 재선은 쉽게 될 수 있던 상황, 게다가 그 지역구는 다름 아닌 '정치 1번지' 종로가 아니었던가. 이상하고 무모한 도전을 한다 여기면서도 그의 도전이 어찌될까 관심이 쏠렸다. 그리고 총선이 끝나고 난 뒤, 총선 연대의 부적격 판정을 받은 의원들 가운데 누가 붙고 누가 떨어졌나가 온통 관심사였던 신문의 한 귀퉁이에서, 노무현의 낙선 소식을 접했다. 난 충격과 감동에 빠졌다.

 그래서 처음 찾아 들어간 그의 홈페이지 노하우. 게시판에는 이미 나와 같은 사람들이 몰려와 그를 격려하고 있었다. 그는 "농부는 밭을 탓하지 않는다"는 말로 사람들을 더 감동시켰다. '바보 노무현'은 그렇게 나왔다. 한국 정치에서 지역주의라는 괴물을 잡가 죽이기 위해 자신이 쥐고 있는 걸 과감히 내던질 줄 아는 사람, 이 정도 사람이라면 희망을 품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인터넷 게시판 여기 저기를 쏘아다니며 노무현이라는 사람의 가치를 알리는데 한동안 혈안이 됐다. 나같은 사람들이 오프라인에서 한 두 차례 모이더니 급기야 팬클럽을 꾸렸다. 노사모는 한국 정치사 최초로 자발적으로 만들어진 정치인 팬클럽이자, 다른 아류 팬클럽과 달리 누군가를 증오해서 만들어진 게 아니라 그 정치인을 그야말로 사랑해서 만들어진 팬클럽이었다.

 노무현 바람은 돈과 줄세우기, 지역 할거식 기존 정치에 염증을 느낀 사람들 사이에서 이미 솔솔 불고 있었다. <한겨레21>에서 2년 연속으로 노무현이 차세대 리더로 꼽힌 것은 그러한 분위기가 반영된 결과였다. 노풍의 전조랄까? 하지만 언론계를 포함한 식자층에서 노무현은 차기 주자로 전혀 주목받지 못했다. 잘 알고 지내던 한겨레 기자도, 노무현의 가능성에 대해 콧방귀로 응대했다. 독불 장군 타입이라 당내 세력이 없어 현실 정치 안에선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이었다.

 난 그가 "민주당 후보로 살아 남기만 하면 도시락 싸들고 다니면서 선거운동 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하고 다녔다. 그만큼 그를 지지한다는 뜻이기도 했고, 나 역시 그가 대선 후보가 되는 일이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안다는 뜻이기도 했다.  

 국민 참여 경선이 없었다면, 당연히 노무현의 등장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가 경선 후보로 나섰을 때 그 곁을 지켰던 의원은 천정배 등 소수에 불과했다. 하지만 국민 경선은 당권을 쥐는 것만으로 이길 수 없는 게임이었다. 노사모의 활동 폭이 넓어졌다.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의 당선을 위해 진심으로 뛰는 자발적 선거운동의 힘은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그것은 이내 바람을 몰고 왔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가 대선 후보가 된 것만으로도 꿈 같은 일이었다. 하지만 거기서 머물러선 안 됐다. 난 처음으로 선거운동을 벌였다. 인터넷 게시판을 들쑤시며 정치 얘기 자체에 냉담해 하는 사람들에게 노무현이 기존 정치인과 얼마나 다른지를 설파하고 다니고, 메신저와 대화로 주변 사람들에게 노무현이 대통령이 돼야 할 당위성을 설득하며 다녔다.

 선거 운동을 하는 건 주변의 눈총을 받아야 하는 일인 동시에, 나 역시 일정부분 정치적 책임을 공유해야 하는 부담스러운 일이다. 가족들부터 쉽지 않았다. 반복되는 설득 속에서도 노무현의 진정성을 좀체 믿지 못하던 누나는 그가 고졸 출신으로 한국 정치판에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충격을 먹고는 이후 나보다 더 적극적인 노무현 지지자가 되었다. 부모님은 끝까지 이회창을 마음에 두셨지만, 선거 당일 아침 누나와 나의 적극적인 읍소에 노무현에 표를 행사하시고는, 그의 집권 기간 내내 적극적인 지지 뜻을 보여 오셨다. 몇 시간에 걸친 메신저 토론으로 한나라당 지지자 몇을 노무현에 투표하게 했는가 하면, 희망 돼지 저금통을 주변에 나눠주기도 했다.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정치인 구좌에 후원금을 전달한 것도 노무현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렇게까지 했으니 그가 당선됐던 그 밤은, 내 인생에서 맛본 몇 안 되는 환희의 순간이다. 그가 모든 것을 다 잘 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앞선 어느 정권보다 잘 할 것이라는 믿음이 앞섰다.

 적극적인 지지자로서 지지 대상의 집권기는 쉽지 않은 기간이다. 그가 취임한 날, 나는 '비판적 지지'를 외치는 사람들에게, 난 그를 지지한 사람으로서 또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지지하게 만든 사람으로서 일정 부분 그의 책임을 나눠 질 것이라고 공언했다. 대북 송금 특검 도입에서도 난 그의 편을 들었고, 민주당 분당에서도 난 그의 편이었다. 잇따른 설화에 대해서도 "언제는 노무현이 서민적인 언변을 갖춰 좋다고 하지 않았냐"며 그를 두둔했고, 신자유주의적 정책들에 대해서도 "노무현은 원래부터 좌파가 아니었다"며 좌파들과 싸웠다. 심지어 노무현 스스로 실패한 정책이라고 실토한 부동산 정책이나 그의 지지자들을 등돌리게 했던 대연정 발언에 대해서도, 노무현의 문제의식과 그것이 설정한 방향만큼은 옳다고 강변하고 다녔다. 

 하지만 100% 그의 편에 선 것은 아니었다. 정치인은 인간적으로 평가받는 동시에 정책으로 평가받기 때문에 그의 어떤 정책적 결과물들은 나를 곤혹스럽게 했다. 이라크 전쟁 파병과 한미 FTA 추진이 그랬다. 그 정책적 결과물이 나오는 과정에서 그의 고뇌와 진정성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었지만 정책의 파급 효과는 그 사람이 한 고뇌와 진정성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법. 그 정책적 결과물들이 앞으로 야기할 문제들을 생각해 보면, 그의 정책에 대해 대해 반대할 수밖에 없었다.

 도덕성이 그의 가장 큰 자산이었던만큼, 검찰 수사로 일부 드러났던 그의 치부들에 대해, 나 역시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자신이 받았든 가족이 받았든, 그게 5억원이든 5조원이든, 지인이 준 것이든 생면부지의 사람이 준 것이든간에, 그건 문제 있는 돈 거래였다. 그게 그래서 검찰이 들씌우듯 '포괄적 뇌물'이냐는 점에선 법정에서 가려 볼만한 문제라고 여겼지만, 뇌물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의 티끌 없는 청렴함을 믿고 지지했던 나같은 사람들에게 그건 충격이고 상실감이었다.

 그렇지만 그게 그에 대한 모든 평가가 될 수는 없다고도 생각했다. 대통령은 자연인으로만 평가받는 게 아니라, 그가 재임했던 시대와 함께 평가받는 것이다. 선량한 국민도 시위를 하면 범법자로 모는 게 아니라, 시위대도 국민으로 여기던 시대. 정부에 대한 비판을 봉쇄하는 게 아니라, 표현과 소통의 자유를 보장하던 시대. 가진 자들이 더 가지게 없는 자들이 더 없게 하는 게 아니라, 분배를 앞세워 골고루 잘 살도록 하려던 시대. 서울에만 사람들이 몰려들게 하는 게 아니라, 지역에서도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게 하려던 시대. 증오와 이간질로 표를 모으는 게 아니라, 지역 구분 없이 정책으로 정정당당한 선거를 추구하던 시대. 노무현은 비록 상처투성이가 됐을지언정, 그가 평가받을 '노무현 시대'는 지금과 비교했을 때 훨씬 더 높이 평가받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 자신이 존경했던 링컨처럼, 노무현과 그의 시대도 이제까지와 달리 재평가받을 수 있을까? 그의 사후 불어닥치는 추모 열풍을 보자면, 다소간 희망이 엿보이기도 한다. 그의 정신이, 그의 시대가 온전히 평가를 받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좀 더 바빠져야 하겠다.

calvin.
Posted by the12th